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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전 두 시간

by 분홍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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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일찍 일어났다. 억지로 아니고, 기대에 차서 가뿐하게.

어제 비운 도시락을 씻어서 엎어놓고 계란말이를 했다. 풋마늘을 쫑쫑 다져서 넣었다. 아들이 계란말이는 아무것도 넣지 말고 해야 더 고소하고 맛있다고 했었지만, 아들 입맛에 많이 맞춰줬으니 오늘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양파를 썰어 넣고 돼지 불고기도 후다닥 볶았다. 이것저것 넣지 않고 오로지 양파만 넣었다. 이맘때 양파는 뭘 해먹어도 맛이 그저그만이다. 싱싱한 단맛이 입에 착착 감긴다.

재빨리 도시락을 쌌다. 반찬은 파김치와 계란말이다.어제 삶은 달갈과 노랑 파프리카도 함께 챙겼다.

반찬을 식탁에 차려서 덮어놓고 대충 식사를 한 후, 씻고 옷을 갈아입고는 바로 집을 나섰다.

출근시간은 12시이지만 되도록이면 빨리 집을 나오려고 애를 쓴다.

첫번째 이유는 남편을 위해서다. 남편은 내가 출근할 때까지 거실이나 부엌에 나오지 않는다. 방에서 내가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순전히 나를 위해서다. 내가 남편이 일찍 일어나(출근 준비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내 근처에서 얼쩡거리는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숨바꼭질을 한다.

내가 출근하고 나면 남편이 방 밖으로 나온다. 남편은 거실로 나오자마자 컴퓨터를 켜서 유투브를 크게 튼다. 밥맛떨어지는 극우 유투브, 아님 더 밥맛 떨어지는 국뽕 유투브를 틀고 볼륨을 크게 올린다. 잔소리할 사람이 없으니 상관이 없다. 그리곤 컴퓨터 책상 앞에 식탁 위에 있는 반찬을 갖다가 늘어 놓고 느긋하게 식사를 시작한다. 여유로운 아침을 맞는 것이다. 마치 아침부터 부산하게 종종 걸음을 치면서 남편 밥 먹여서 출근시키고 난 주부가 그러하듯이. 그 때부터 남편 세상이다.

출근시간까지는 두 시간이 남는다. 집을 나오는 순간 나는 집 밖에서 남편 처럼 여유로워진다. 자유다.

오늘은 도서관에 가지 않고 카페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카페에서 글을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사무실 한 정거장 앞에서 트럭을 대놓고 토마토를 팔고 있었다. 내려서 살까말까 잠시 갈등하다가 그냥 지나쳤다. 오늘은 왠지 이고 지고 다니고 싶지 않았다.

카페에 가기 위해 사무실을 한 정거장 지나쳐서 내렸다.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뭘 해도 그저그만일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뭘하면 이런 날에 딱 들어 맞게 잘 보낼 수 있을 까를 생각하니 '이거야'하는 것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쇼핑을 하나, 영화를 보면 어떨까? 책을 읽어야하나, 뭐야, 실내에서 하는 거잖아, 그럼 날씨와 상관 있게 어울리는 것은 뭐지?

손빨래를 해서 봄볕에 늘면 딱인데 우리집 빨래는 건조기가 평정한지 오래다. 나물 뜯고 쑥 캐러 갈까?고사리를 꺾으러 가야 하나? 너무나 비현질적이다

가능하다면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서 브런치 하고 함께 산책하는게 제일 나아 보인다. 친구 생각을 하니까 시간 내서 만나고픈 얼굴들이 떠올랐다. 평소에는 이런저런 거리낌으로 선뜻 만나기가 꺼려지던 친구들도 오늘은 좋게만 생각 되었다. 내 마음을 아프게 했거나 섭섭하게 했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느껴졌다. 언제든 편하게 만나 수다를 떨며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것 같았다. 확실히 그럴것이다.

봄날을 보려면 먼저 문을 열어야 한다. 쓰는 행위가 나에게 봄날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문을 열어 젖히고 눈을 들어 그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는 마음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어둔 곳에 눈을 대고 허우적거리던 옹졸하고 부정적인 마음에서 눈이 떼졌다. 내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주위 사람들에 대해서도 급 너그러워지고 관대해졌다. 미워하며(미움 대상 1호,남편)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왔다. 살 것 같았다. 날아갈 것 같았다.

내마음에도 봄이 왔다. 너그럽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봄볕 가득한 날이 꿈처럼 내게로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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