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와 나와 가지치기

by 분홍소금


불행(나쁜 일)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한다. 나쁜 사건에 나쁜 옵션들이 뒤따라 왔다. 남편의 외도와 함께 나를 괴롭힌 것은 가정 경제를 꾸려갈 수입이 끊어진 것이었다. 당시에 가정 경제는 전적으로 남편의 월급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남편은 집을 나가 있는 동안 생활비를 주지 않았다. 당장 먹고 살 일도 막막한데 설상가상으로 은행에서 수시로 독촉장이 날아 들었다.



은행에서 독촉장이 오게 만든 것도 남편이었다. 당시에 남편은 신용 보증 수표나 다름 없는 대기업 직원의 신분을 이용해 우리가 살고 있던 아파트 가격의 90퍼센트에 맞먹는 대출을 일으켜 지인의 사업에 투자를 하였는데, 퇴사를 하고 여자와 떠돌이 생활을 하며 이자를 내지 않아 그 사단이 난 것이었다.



은행에서는 기일까지 중도 상환 액과 이자를 내지 않으면 아파트를 경매에 넘기겠다고 했다. 독촉장이 협박장이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그 때의 트라우마로 한동안 우편물을 뜯지 못했다.)



남편의 외도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 없었다. 말에서 풍기는 끔찍한 뉘앙스로 외도 라는 단어 자체를 차마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그 말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부산에 살고 계시는 시어머니였다. 시어머니는 30대에 남편(시아버지)을 여의고 본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홀로 4 남매를 키우신 여장부였다. 결혼을 하고 시댁에서 만난 시어머니의 형제 자매들은 "너희 시어머니가 얼매나 고생했는지 아나? 우짜든지 너희 시어머니한테 잘해야 한다." 고 하셨다. '나 때문에 고생한 것도 아닌데 제가 왜요?'(속으로)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시댁에는 생색 나지 않을 정도로만 잘하자.'라며, 마음에 없는 과한 노오력을 경계하며 쿨한 며느리로 자리매김했다고 평가할 수는 있겠으나 우리 사이가 살갑거나 친밀하지는 않았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나 사이의 친밀감을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이 사건을 의논할 사람은 오직 시어머니 밖에 없었다.



흔히 시어머니들은 아들이 바람이 나도 아들 편이라고 들었다. 심지어 아들이 데리고 온 새 여자가 환심 성 선물 공세라고 펼칠라 치면 홀딱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가 되는 판이었지만, 우리 어머니는 달랐다. 어머니는 본인이 아들을 잘 못 키웠다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시며 기꺼이 함께 짐을 져 주셨다. 생활비를 보내주셨고 얼마간 은행의 이자도 마련해 주셨다. 어머니와 나는 우리가정을 위해 한 배를 탄 동지가 되었다.



인간이 얼마나 무력하고 심약한 존재인지 시어머니의 정신적 물적 지원과 한참 자라는 아이들의 대견한 모습에도 나는 길을 잃은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남편의 이혼 요구와 가정 경제에 대한 불안, 은행의 계속적인 빚 독촉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속절 없이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도 했다.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지옥 같은 생활에 두 손 두 발을 들고 마침내 교회에 제대로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평소에는 선데이 크리스챤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지만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환경이 오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담당 전도사님께 처음으로 남편의 외도를 말씀드렸다. 전도사님은 대뜸

-외도는 보통 10년은 잡아야 되는데....

-10년이라구요?

-아님 초기에 콱 잡든가?

-저는 10년 못 기다려요.



전도사님 말씀의 요지는 장기전 아니면 초전박살이라는 뜻으로 읽혔다. 나는 성미가 급하고(그때 나는 30대였다.)다혈질이라 장기전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선택지는 하나, 초전박살만이 남은 셈이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편이 그 여자와 사는 곳을 수소문해서 쳐들어갈까?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다시 생각해보니 돌부처도 돌아 앉는다는 일을 당했는데 그 정도의 실력 행사는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겐 더 이상 뻔하고 진부한 클리세가 아니게 되었다. 작은 왕국을 빼앗긴 자의 절규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알량한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을 뿐더러 실제적으로 따져봐도 문제 해결에 좋은 방법이 아닌 건 확실해 보였다. 내가 미쳐 날뛸수록 장작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이다. 회사를 다니면 회사에 가서 데모라도 하겠지만 남편은 이미 퇴사를 한지 오래였다. 다 포기하고 이혼을 한다고 해도 얻을 것이 없었다.



전도사님이 과외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느냐, 학생들을 모아 보는 게 어떠냐고 하셨지만 그럴만한 에너지가 1개도 없었다. 이미 바닥난 두뇌활동이 그 방면으로 도무지 활성화되지 않았다.



남편의 외도 사건 이전에 나는 자녀 교육에 올인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인성과 창의성을 키우는 것이 지상 과제라도 되는 양, 전인 교육을 한답시고 주말마다 연극이니 공연장이니 하는 곳에 데리고 다녔다. 피아노, 바이올린, 미술, 영어 선생님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툭하면 책을 사들이며 독서 교육에도 열을 올렸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것이 더 급해진 상황에서 학교 수업 외에 일체의 사교육은 사치가 되었고. 삶의 질(성적 말고)표방한 나의 교육열은 남편의 외도 라는 직격탄 한 방으로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



뒷날에 나는 아이들의 기질과 취향, 의사와 상관없이 밀어 붙인 대다수의 사교육들은 실은 나의 성장 과정의 결핍을 채우려 했던 빗나간 보상 심리와 열등감 가득한 허세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교육의 멸종은 남편의 외도로 끊어져서 잘 된 것 중 첫 번째 목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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