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 : 타인의 일기 프로젝트
정신 차려보니 내 앞에는 얼굴에 흉터 자국이 깊게 파인 검은 정장의 남자가 복면을 쓴 채로 총구를 내 이마에 겨누고 있었다. 복면을 쓰고 있는데 어떻게 얼굴에 흉터 자국이 깊게 파였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여기 이 초저녁 벤치에 앉아 있었던 것일까. 나는 어렴풋하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나를 겨누고 있었지만 내 생각을 방해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 남자가 왜 복면을 쓰고 있는데도 그가 흉터 자국이 깊게 파여 그것이 이마에서 볼을 따라 입술까지 쭉 찢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왜냐면 나는 오히려 안대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대를 쓰고 있으니 남자의 얼굴에 복면이 있는지 흉터가 있는지는 애초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무엇도 볼 수 없었고, 오히려 남자의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내가 앉아 있는 이곳도 외딴 공원의 벤치고 또 지금 뉘엿뉘엿해가지고 있으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고, 나는 남자의 그림자 아래서 죽을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그는 내게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없다고 답했다. 그는 이유를 물었다. 그 이유는 -
"내 인생에 마지막으로 떠올려야 할 그런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대답했던 이유는, 마지막으로 네가 나를 이기적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고 또 앞으로도 그럴 수 없으리라고 단언했기 때문이다. 네 말에 따르면 내가 사랑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고, 무언가를 진정으로 위하는 척하는 나 자신을 사랑할 뿐이라고 말이다. 너는 나를 한 명의 나르시시스트로 만들어 놓고는, 결국 너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나를 여기에 이렇게 버려놓고 떠났기 때문이다. 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욱 너라는 사람을 그리움의 대상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저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면서 십자가로 만드는 그런 한심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그 사람의 진정한 무엇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으로 한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자입니다. 인터뷰를 할 수는 있어도, 시를 쓰는 사람은 아닙니다. 기사는 써도, 뮤즈같은 것을 노래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겨냥해서, 누군가를 하나의 다가갈 수 없는 무엇으로 만들어 놓고, 죽기 직전의 순간에 하고 싶은 말을 마구 토해내고 싶은 그런 사람 따위는 절대로 만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 말에 그는 말했다.
"그게 도움이 돼?"
나는 그의 말에서 비웃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네 인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느냐는 말이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은 채로 대우해 놓고, 잃어버린 그 고양이를 앞으로도 주욱 그리워하지도 않겠다고 말하는 게 네게 위로가 된다고 생각해?"
나는 말했다.
"적어도 지나고 나서야, 소중한 줄 알았다고 되뇌며 뉘우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오히려 가장 비열한 것은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먹이를 제 때 주고, 또 필요하면 안아주던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은 인간이라고 매도하는 것이 더 역겹습니다. 결국 스스로만을 사랑할 뿐이라는 그런 말이야 말로 더 가혹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내가 그 잘난 무언가에 소홀했다는 그런 이유만으로, 이제는 지나고 나서야 이미 존재하지조차 않는 그런 대상을 위해서, 그 무언가를 비로소 떠올리며 가슴 아파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죠? 오히려 그런 마음을 의도한 채로 앙갚음을 위해 떠난 것이 더 비인간적입니다. 그리고 나는 절대로 그 비열한 복수에 응할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할수록 더욱 용감해졌다. 내 안에 숨어 있던 분노가 솟아오르는듯했다. 목소리를 더 높힐수록 내다 더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찼다. 너는 감히 나를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나를 죽일 수 있을지언정 너는 나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구만. 자네는 너무 화가 나 있어. 그것은 왜지? 자네는 내가 겨누고 있는 총구보다 다른 무엇에 더 화가 난 모양이구만. 하지만 이것은 내가 받은 의뢰 내용은 아니야. 내가 질문을 던졌던 이유는 그저 내 흥미 때문이지, 의뢰인이 시킨 것은 결코 아니야. 의뢰 내용은 그냥 자네를 죽이라는 거였네. 오히려 내 호기심 때문에 의뢰인의 요구사항을 어기고 있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그렇지? 왜냐면 네가 죽은 뒤에는 내가 이런 장난질을 했다는 사실을 지껄일 혓바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단지 나는 네 가장 약한 부분이 어딘지를 알고 싶었을 뿐이야. 아마도 제대로 짚은 것 같구만. 역시 의뢰인은 당신을 잘 몰라. 아니면 너무 잘 알아서, 깔끔하게 죽이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아. 그러면 이제 죽어."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찌르르르하는 그 소리가 울려 퍼져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모든 풍경이 반사되어 그려지는 듯하였다. 사내도 말이 많았지만, 나도 말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느냐는 물음에 나는 네 이름을 말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뒤에 내가 네 이름을 말하고 죽었다는 사실에 알려진다면, 어쩌면 너는 조금 슬퍼했을지도 모르지. 아니, 과연 그것은 정말 좋은 방법일까? 차라리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죽이기를 기다렸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네가 알게 된다면, 너는 평소에 그토록 짜증 내던 나의 그 모습이 결국 이렇게 생겨먹은 내 모습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더 분노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것대로 나쁘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말으 너무 많이 해버렸다
- 이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사내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고 내 앞에서 그가 고꾸라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내 저 멀리서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내가 순식간에 다가왔다. 차가운 손이 내 얼굴에 닿았다. 그것이 내 안대를 벗겼다.
그를 벗긴 것은 너였다. 나는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내가 저 사내 앞에서 지껄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인가. 너는 내가 어떤 말을 하는지를 지켜보고 네가 의뢰한 일의 결과를 두고 보려 했었던 것인가 - 그러는 새, 너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부엌 가위로 뒤로 묶인 밧줄을 잘랐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기분이 있다. 어떻게 해서든 나를 구해주려는 사람 앞에서 더욱 떼를 쓰고 싶은 기분. 엄마와 싸우고 난 뒤에, 배가 고파 죽겠는데 더욱 저녁 먹기를 거부하는 그런 기분. 그리고 여전히 배가 고파서 배에서 꼬르륵 나는 소리조차 수치스러운 그런 기분. 그러나 오늘 그 모든 전략은 하나도 말을 듣지 않았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엄청난 힘으로 너는 나를 들쳐 없고 달렸다. 내 심장이 갑자가 엄청나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정신을 하나도 차릴 수 없었다. 나는 앞만 보고 달리는 네게 업혀가는 채 후방을 주시했다. 저 뒤에 사내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상하게 그는 그 어떤 복면도 쓰지 않았고, 흉터도 없었다. 그는 평범한 체크무늬 남방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내가 예상했던 그의 모습과 유일하게 동일했던 것은 그가 들고 있던 총 한 자루뿐이었다. 그는 뚝뚝 흘리는 피를 닦더니 안경을 땅바닥에 내팽개 쳐 버렸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우리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너는 코너를 돌아서, 저기 보이는 풀숲에 나를 던져 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웅크려 숨을 죽였다. 헉헉 거리며 뛰어오는 사내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나의 모든 분노가 저 사내에게 전이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으르렁거리던 나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고, 몹시 두려워졌다. 비에 젖은 개처럼 온 몸이 오들 오들 떨렸다. 네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오직 건질 수 있는 것은 나의 자존심뿐이라고 믿었던 그런 호기는 원래 없었던 것처럼 증발한 것만 같았다. 갑자가 잃었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얻은 동시에 다 잃을 위기에 놓인 것만 같았다. 내 목숨 하나를 반항하며 잃는 것보다, 네가 나를 구해주려다 둘 다 죽는 게 더 끔찍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들오들 떠는 나를 보면서 너는 무심한 눈빛으로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해. 너를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어. 하지만, 우리 그런 의도 없이도 죽일 것처럼 싸웠잖아. 이해할 수 있지? 이해는 네가 제일 잘하던 거니까."
그리고 풀숲을 내다 보다가, 조금 더 다급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건 내 꿈이니까, 내가 너를 죽이려 했다는 것 정도는 이해해줘. 생각하는 것은 원래 자유잖아. 그런데 말야, 그래서 시간이 얼마 없어. 나는 이제 이 꿈을 깨야 해. 그러면 내가 다시 현실로 돌아가 눈을 뜬 뒤에도 너는 혼자 이 현실에 남아서 도망 다녀야 할 거야. 할 수 있지?"
너는 내가 죽는 꼴을 보기 싫어서 얼른 꿈에 깨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내가 여전히 여기 남아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네가 꿈에서 깬 뒤에도 나는 여기에 남아서 쫓겨야 한다고? 그건 너무 이기적이지 않아?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너잖아 -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말해도 네가 곧 가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너는 끝까지 우려스럽다는 듯이 풀숲 너머로 천천히 다가오는 사내를 지켜보며 말했다.
"앞으로는 죽을 짓 하지마."
네가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것도 같았다. 너는 무언가 더 말을 하려는 듯했다. 나는 그것을 듣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하지만 그 입이 떨어지는 찰나에, 나는 그 마지막 말은 저 꿈을 너머에 있는 네 현실에서 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너는 마치 가을 낙엽이 날리듯 저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죽을 짓까지 한 적 없어. 아니, 이 말이 아니다. 나는 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아. 아니 이 말도 아니었다.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다. 진정으로 너를 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었다. 아니 내가 사실은 그것을 지금 더 궁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숨쉬기가 답답했다. 말이 나오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 입에는 청테이프가 꼭 싸매 있었다.
그리고 내 손에 들려 있는 총 한 자루.
저 너머에서 희미하게 윙윙 거리는 냉장고 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풀벌레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누구도 더 이상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내가 쫓고 있었다. 그리고 쫓기고 있는 것이 사라지며 더 이상 좇을 것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희미하게 천장이 보였다. 모든 것이 이해가 됐다. 눈을 가려도 사내의 얼굴을 짐작할 수 있었던 이유, 제갈이 물린 채로도 실컷 떠들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네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던 이유. 우리가 싸운 이유, 결국 네 양보로 내 자존심을 지킨채로 우리가 서운하게 잠에 들었던 이유, 미안하다는 말이 부끄러워 그냥 입맞춤으로 대신했던 이유, 한심한 내가 보기 싫어 그냥 잠에 들었던 이유.
아직도 무거운 쇳덩어리의 촉감이 손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나는 땀에 젖은 이마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윙윙 거리던 냉장고 소리가 뚝 하고 멈췄다. 편안한 적막이 깔렸다. 나는 그때 지던 해가 사실은 뜨던 해였다는 것을, 저녁이 아니라 새벽이라는 것을 희미하게 알아챈다. 옆에서 쌔근 거리는 숨소리가 느껴졌다.
나는 더듬어 안경을 찾아서 너를 봤다. 내쪽으로 돌아누워 조용히 잠에 든 너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네 코 위에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점을 보고 안심했다. 뮤즈, 그리움, 더 해야 할 말들. 그런 것들로 엉그러져 나타난 사람은 아마도 네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사람도 무엇도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 내가 항변하려 했던 것은 옳았다. 꿈에 나타나는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알기 위해서 내 모든 과거를 되짚어 보는 것도, 또 지금 여기 자고 있는 너를 살피는 것도, 미래에 나타날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도 모두 무의미한 일이 될 터였다. 사람은 여기 있다. 그 유일한 사람은 지금 내 옆에서 너무 구체적인 방식으로 자고 있다. 그 사람의 코에는 점이 하나 있었고, 여기서 들 숨과 날 숨으로 코를 골고 있으며, 나는 네 속눈썹 개수를 지금 헤아릴 수도 있었다.
나는 지금 이 모든 것을 너를 깨워서라도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 방안에 잠든 너를 깨울만한 좋은 이유는 하나도 없을 것을 알았다. 나는 가만히 자는 너를 지켜보다가,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해서 다시 우리 모두를 위해 감싸 덮었다. 그리고 내일 해가 뜨면 이에 대해서 꼭 알려줘야겠다고 흐릿하게 다짐했다. 그러나 그 작은 다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았다. 언제나처럼 꿈은 떠올리고 싶어도 떠올릴 수 없게 될 것이고, 마침내 꿈을 꾸었다는 것조차 잊어질테니. 그저, 아직 늦지 않았다는 사실에 온힘을 다해 감사했다.
나는, 내 꿈을 꾸는 너를 꾸었다.
Key word : [내 현실에서 내 꿈을 꾸는 너를 만났다.] by. Sam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