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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Feb 11. 2019

슈퍼맨의 사랑

fiction : 타인의 일기 프로젝트

나는 아직도 그 날을 기억해.

나는 벽에 단단히 밀쳐졌어. 벽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너는 내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강적이었지. 그러나 네가 내게 요구하는 것은 내 목숨이 아니었어. 나는 그것에 벅차올랐지. 네 양 손은 내 양팔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고, 나는 내 손목이 끊어질 것 같다는 것을 실감하고 새삼 놀랐어. 그러나 또 알고 있었지. 너는 나를 부러트릴 수 있지만, 아프게 할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었어. 그래서 너는 온 힘을 다해서 나를 끝까지 밀어붙여서는 우리 집 침실 벽을 붕괴시켰고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까지 망가뜨려 버렸지. 나는 웃고 있는 네 입술을 보면서 네가 알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 네가 온 힘을 다 한다 해도, 내가 기꺼이 모든 것을 버텨낼 수 있으리라는 것을. 내 몸은 넘어진 테레비 옆에 뉘어졌고, 아주 가까이에서 네 숨소리를 느낄 수 있었어. 나는 이 아수라장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온 신경을 그 숨소리와 네 피부에 집중하고 있었어. 너는 우리 집을 다 파괴해 버릴 것 같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다른 사람들은 슈퍼히어로의 일상이 어떤지에 대해서 종종 궁금해한다. 그러나 내 삶은 단지 다른 이들의 삶 보다 주어진 힘만큼만 편했다. 학교 아이들은 나를 괴롭히지 못했고, 나도 그들에게 너그럽게 대했다. 사내아이들과는 팔씨름을 주로 했다. 아이들은 내게서 패배한 것에 대해 자존심 상해하는 법이 없었다. 나는 늘 가장 강한 인간으로서 깍두기 취급을 당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도 나를 좋아했다. 내 신체의 비밀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늘 고교 레슬러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왔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자랄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때 만났던 체육 선생님 때문일 것이다. 그는 내가 한 손으로 교과서 여러 권을 두툼하게 잡아서 찢어버리는 것을 보고도 나를 겁내지 않았다. 그는 선생으로서의 자존심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자존심이랄 것은 그를 소인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를 선생답도록 했다. 그는 눈빛으로 나를 다스릴 줄 알았다. 나는 그 선생 덕에, 철봉을 한 손으로 뽑을 수는 있어도, 내가 일개 고등학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했다.

심심풀이로 야간에 돌아다니며 자경단 일들을 도왔다. 레슬러 특채로 대학교에 진학할 수 없다는 것이 확정된 이후로, 선생님은 내게 그것을 권했다. 때는 바야흐로 입학사정관제도가 확대되고 있을 때였다. 선생님은 그러한 일들을 하고 내게 그를 적어서 글로 남기도록 했다. 취객의 횡포를 제압하고, 전복된 차량을 일으켜 세웠다. 사람들은 나를 위해 증언해줬다. 나는 그때 사람들을 돕는 일이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이유는 내가 선량한 인간 이어서라기 보다도, 내가 가지는 힘에 대한 합당한 대가들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뿐이었다. 결국 나는 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입시를 준비했고, 그러나 내가 가진 재능으로 꽤 편하게 대학교에 들어갔다. 경찰행정학과에 진학했다.

영웅들의 이야기 속에서 가장 의아했던 것은 슈퍼맨이 로이스 레인에게 입 맞추고, 꽉 안아주는 장면이었다. 그는 덤프트럭을 들 수 있는 힘이 있으면서, 어떻게 건드리기만 하면 으스러질 수 있는 사람들을 건드릴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그가 우주 악당을 물리치는 것보다, 그런 일상적인 장면들이 더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다. 게다가 더욱 말도 안 되는 설정은 슈퍼맨이 클락 켄트일 때의 직업이 기자라는 점이다.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진 사람이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것은 타이핑을 하는 것이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마지막 포트폴리오 작업에 착수했을 때, 점점 내 힘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당한 범위까지 눌렀다가 떼는 그 감각이 제일 어렵다. 내가 쓰고 싶은 말이 많고 그에 조급해 힘의 감각을 잊는 사이에 관통된 키보드 조각들이 내 손가락에 덜렁덜렁 붙어 있었다. 노트북이 점점 자주 망가지기 시작한다. 노트북의 키보드가 점점 자주 망가지기 시작했다. 지하철 손잡이가 손으로 쥔 찰흙처럼 변형되었다. 나는 클락 켄트가 기사를 쓴다는 것도 사랑을 한다는 것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때, 종종 온 힘을 다해서 사랑하고 싶을 때가 있다. 슈퍼히어로가 빌런과 싸우는 이유는, 그들이 온 마음을 다 하고 싶을 때 온 힘을 다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사랑했을 때, 그것은 아마도 대학교 1학년 때였을 것이다. 평범해서 좋은 사람을 만났고, 내가 평범하지 않아서 좋지 않게 끝났다. 다행히도 나는 여자를 만나는 것에 지나치게 쑥스러워하고 조심스러워했기에 네게 상처를 입히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는 내가 너무 조심스러웠다는 것이다. 그 맘때 쯤에 나는 무언가를 쥐는 것에 너무나 예민해져 있었다. 모든 세상들이 모래로 쌓은 성처럼 보였다. 연필을 쥐는 것과 수수깡을 쥐는 것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의 살을 만지는 것과 두부를 만지는 것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먼저 좋아해서 만났던 사람이었다. 피부가 유독 하얘서 더 두부 같았다. 무엇을 만지는 것이 두려운 것보다, 그냥 호기심 많은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 모습에 더 쑥스러웠다. 그래서 손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장면 장면들만이 이제는 기억에 남는다. 함께 걸을 때, 나는 그 사람의 눈을 정면으로 똑바로 마주 보지 못했다. 그녀가 다른 곳을 볼 때만 흘끗 흘끗 그를 몰래 봤다. 그는 내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갈 때에 대신해서 내 팔을 잡아 주었다. 그게 좋았다. 내가 무언가를 쥐면 그것은 부서지지만, 대신에 나는 자동차가 박아도 상관없는 전봇대처럼 있는 것이 편했으니까.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우리는 천천히 만나서 걸었고, 한들을 또 그렇게 나는 전봇대처럼 멍하니 서서 그녀를 만났다. 그 사람은 그런 나를 귀여워하다가, 조바심 내다가, 그리고 그 조바심은 점차 짜증으로 바뀌다 어느 순간 시큰둥해졌다. 마지막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술을 마셨고, 나는 처음으로 그 사람의 눈을 똑바로 봤다. 연두부 같은 볼을 처음으로 만졌다. 나는 내 손이 어디에서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느낄 수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젓가락으로 두부를 쥐는 마음으로 너를 안았고,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고 싶은 그만큼 이 세상에서 무력하게 끌어안았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꼭 안아달라는 노랫말이 떠올랐다. 그것은 내게 전혀 낭만적인 말이 아니라, 괴물 같은 나 자신을 실토하도록 이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사람을 다시 만나지 않았다.

헤어지고 나서 술을 진탕 마시고 일어난 다음 날, 자취방의 문짝은 떨어져 있었고, 내 손에는 문고리가 쥐어져 있었다.

<연습해봐. 너 컴퓨터 망가뜨린 것도 몇 번 안 됐었잖아. 그것도 결국 고쳐졌었던 거야.

깨진 액정을 통해서 간신히 문자 메시지 하나를 읽었다. 체육선생님이었다. 전화했다는 사실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내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혼자 있을 때에는 종종 손으로 집어먹는 음식을 먹어보았다. 땅콩의 껍질을 까는 것부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금이 간 것은 먹지 않았다.


뜨개질을 시작했던 것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실의 질김과 바늘의 강도를 구분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나무로 된 대 바늘을 부러뜨리지 않으면서, 코 수를 맞추기 위해서 집중해야 했다. 많이도 찢어 먹었다. 그러다 어느새,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목도리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안뜨기와 겉뜨기를 응용해서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드는 법을 터득했다. 졸업할 때 즈음에는 뜨개질에 도사가 되어 있었고, 군대에 가서 전역할 때 즈음에는 분대원들에게 목도리 하나씩을 해주고 나왔다. 그리고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경찰 공무원이 되었다. 크고 작은 연애를 반복했다. 그리고 또 헤어졌다. 클락 켄트가 사람을 만질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연습했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세상은 따분하게 흘러갔고, 나는 두려울 것 없이 살아서 더 권태로운 삶을 지속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 내가 너를 만난 것은 회식을 마치고 술에 잔뜩 취해서 길바닥에 나자빠져 있었을 때였다.

나는 종종 밖에서 노숙을 하기도 했다. 이것은 나의 가장 안 좋은 습관 중에 하나였는데, 사실 안 좋은 습관이라고 하기에는 내게 해로운 것들이 이 세상에는 별로 없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가끔 누군가 시비를 걸어올 때에는 종종 맞아주기도 했다. 나는 내가 무언가를 부수는 대신에 종종 전봇대처럼 서서는 무언가 나를 파괴해주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사실 그럴 수 있는 것도 없었고, 그냥 샌드백 역할을 하는 것이 재미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도 술에 잔뜩 취해서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한 여름이었던 탓에 도대체 집으로 가야 할 필요조차 느낄 수 없었다. 취기에 그냥 자려던 차에, 저 너머에서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 서넛이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중에 제일 재빠르게 생긴 녀석이 내게 오더니 담배를 한 갑 사달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경찰이니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가면 봐줄 거라고 말한다. 어린애들을 대하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다. 애들이랑 엮이면 처벌도 못하고 오히려 내가 곤란해지기 십상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나도 지고 싶지 않았는지, 애들에게 훈계조로 말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냥 몇 대 맞아주고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때리는지는 알 수 있다. 오히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담담하게 있으면 주먹은 더 쉽게 날아온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비굴한 어떤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질릴 때까지 가져다주지 않으면 일은 이렇게 되는 것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뜨개질하는 상상을 했다. 한코 두코 세코, 내 머릿속은 안뜨기와 겉 뜨기를 오간다. 그러면서도 요즘 애들이 참 무섭구나 -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보통사람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저 야구방망이를 들고 있는 놈은 저게 멋있어서 들고 다니는 걸까, 야구부라서 들고 다니는 걸까. 아무리 막 나가도 저런 걸로 사람을 때리는 것은 좀 아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기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작고 마른 몸으로도 저 망나니 같은 놈들 앞에 서서 당당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문득 그 목소리의 크기에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이라고 강한 확신이 들었다. 아니 그것은 하나의 희망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때 그 순간을 뜨끔한 마음으로 떠올린다. 왜냐면, 그 작은 몸에 그 망나니 같은 어린것들이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명색이 경찰이라는 놈이 그것을 그냥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그때 확신을 했는지 희망을 했는지가 조금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다. 희망이라면 나는 도박을 한 것이고, 확신이라면 그저 확인을 한 것에 불과하니까. 그래도 나는 네가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기억하고 있고, 네가 아니라 그 방망이가 휘어질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예감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휘는 것을 보았다. 너는 나랑 같은 인간이다! - 나는 속으로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네가 그 방망이를 빼앗아서 그 놈들에게 되돌려 주려는 것을 보고, 나는 네 앞에 서서 네 팔을 잡았다. 어린 양아치 무리들은 휜 배트를 보았을 때부터 이미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너를 저지하는 사이에 아이들은 이미 도망치고 있었다.









그래. 그때 너는 흠칫 놀라더니, 내 옆구리를 걷어차면서 말했지 - 이런 사람인 주제에 내가 맞고 있는 걸 잘도 지켜보고 있었네요? - 그 말 때문에 나는 내가 너를 확인하려 했던 것이 아주 위험한 짓이었다는 것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어. - 원더 우먼처럼 생기진 않았네요? - 나는 그렇게 말했고, 너도 내가 클락 켄트처럼 생기지는 않았네요? - 라며 응수했었지.

맞아. 그 말을 듣고서는 사실은 알았지. 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었다는 걸. 나는 대단한 미남도 아니었고, 수퍼히어로는 커녕 그냥 남들도 다 하는 경찰 공무원에 불과했으니까. 사람들은 칼 한 자루에 위협을 느끼고 그 공포를 용기로 이겨내면서 자식을 위해서 먹고살고 있었던 거야. 지나고 보면, 그저 남들과는 다른 신체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것만으로도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지나친 오산이었고, 그 이후에  (말 그대로) 치고받고 싸우며 모든 것을 다 부서 버릴 정도의 우리 싸움을 보면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기는커녕 재앙 인지도 몰랐어. 그러나 그것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의 이야기.

아무튼, 나는 뒤돌아 가는 너를 얼른 따라갔어. 네게 술 한잔 더 하자고 말했고, 너는 진짜로 안 아프냐고 내 옆구리를 가리키며 물었지. 그때 나는 내 허리가 얼얼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우리가 더욱 한잔 해야 된다고 주장했어.

우리는 허름한 술집에 가서 팔씨름을 했고, 그때는 가까스로 져주는 척을 하느라 고생했다는 것을 사실 너는 모를 거야.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웃었지만, 그들은 내가 도대체 어떤 사람한테 간신히 졌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지. 나는 그것 때문에 더 크게 웃었고, 네가 소주잔을 세잔 째 부숴버렸을 때 우리가 일어나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지.

그리고 네 손을 잡고 우리 집으로 향할 때, 네 손이 나를 잡는 느낌과 내 손이 너를 잡는 느낌이 교차되면서 모든 의문이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았어. 사랑을 하는 데에는 연습이 필요해. 하지만 언제까지나 연습으로 되는 것은 없어. 그 증거로 나는 지금 내 모든 힘을 다해서 너를 쥐고 있지만, 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 감각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간신히 열쇠를 찾아 부러뜨리지 않고 현관문을 열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집중해야만 했어.

그래, 우리는 침실로 들어가 레슬링을 하듯이 서로를 패대기쳐대고, 벽면을 뚫고 마루까지 기어 올라왔어. 온몸의 뼈가 으스러질 때까지 꽉 안아도 너는 부서질 줄을 몰랐고, 그만큼 나도 네 완력에 압도당했지. 격렬함보다 더 격렬함으로, 치열함보다 더 치열함으로 나는 모든 것을 탐닉하려 애썼고, 그리고, 지친다는 느낌이 무엇인지를 아주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어. 어린 날에 아버지와 등산가던 시절에 허덕거림 같은 것.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야만 한다는 그런 버거움 같은 것들. 그리고 내 근육이 파르르 떨려오는 것을 느꼈을 때, 비로소 가장 미세한 힘으로 두부를 만지듯이, 그것을 깨지지 않게 다루는듯한 느낌이라는 것. 나는 한 번도 연약한 것을 만져본 적이 없었던 거야. 모든 감각들이 새로 전해졌어. 내 코와 인중과 입술, 그리고 네 볼과 귀와 목이 마찰할 때, 그것들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내 피부에 어떤 방식으로 와 닿는지를, 몸과 몸 사이에 질척거리는 느낌이 결코 불쾌한 것일 수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드러누워 에어컨을 켰을 때, 그 기진맥진의 모든 끝에서 내가 겪어온 모든 것들이 꿈같다고 생각했어. 내가 엄지와 검지만으로 동전을 구부릴 수 있다는 것은 그저 나의 망상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게 아니라면 나는 이 완전한 탈진으로 내 모든 힘을 소진한 채 그저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오늘부터 그저 보통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여전히 늘어서 있는 난장판을 바라보면서 그저 웃어 버렸어. 그 소리에 너도 일어났고, 너는 내 등에 묻은 콘크리트 조각을 털어 주었고, 나는 네 머리에 붙은 벽지 조각들을 떼어냈지. 우리는 잔해물들을 하나둘씩 줍고 또 쓸어 담았지. 걱정 마, 모아둔 돈 있어 - 나는 그렇게 말했고, 집에 수북이 쌓여 있는 목도리 중에 하나를 골라서 네 목에 걸어 주었어. 그리고 내일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는, 삼십도가 넘는 폭염의 한낮에 너를 내몰았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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