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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Apr 21. 2020

잠복기 (2)

Day2


그저 그렇게 보냈다. 뚜렷한 증상은 없었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었다. 영화는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았지만 누구에게 권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무언가를 써야 한다는 의무감으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이 곧 잊혀질 것을 알았다


Day3


시시한 책을 하나 집어들었다. 그럴듯한 제목이었지만, 내용은 생각보다 별 것 없었다. 저자는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야기 안으로 나를 끌어들일 흡입력은 부족했고, 나는 책을 읽는 것을 중단했다.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고, 쏟아지는 햇살을 막으려 그 그럴듯한 이름의 책을 나의 얼굴 위에 올려 두고 한 숨 잠을 청한다. 뚜렷한 증상은 없었다.


Day4


무의식적으로 담배 갑 하나를 사서 들어왔다.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어제의 결심을 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스스로가 조금 한심스러워져서는 그걸 그대로 쓰레기통 안에 집어 던져 버렸고, 나를 감싸고 있는 흡연의 욕망을 잠재우려 옷을 바꿔 입고 달리러 밖으로 나왔다. 땀에 흠뻑 젖었고,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목표한 체중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오늘도 괜찮다. 그리고 뚜렷한 증상은 없었다.


Day5


커피머신을 하나 살까 하는 고민을 하다 그만 두고, 인스턴트 커피를 샀다. 마시면서 유명한 프렌차이즈 커피의 맛과 이것의 차이를 내가 크게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나의 판단에 만족했다. 그러나 그만큼 닭가슴살을 필요 이상으로 주문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냉장실의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현명한 소비와 멍청한 소비가 비등하다는 것에 허탈했다. 그러나 뚜렷한 증상은 없었다.


Day6


시시한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어제의 멍청한 소비가 못내 아쉬워, 쉽게 산 이 책이라도 마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내용을 따라 읽을 수 없었고, 나는 이 책을 산 것 역시도 멍청한 소비의 목록 안에 넣어 두기로 했다. 앞으로는 표지에 속지 말고 충분히 읽어 본 뒤에 사기로 했다. 과거의 전력을 미래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설정하기로 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뚜렷한 증상은 없었다. 하지만 이 삶이 견딜 수 없게 지루하다는 생각을 했다.


Day7


견딜 수 없이 지루해서 집 앞 공원으로 나간다. 하늘은 너무나 맑았고, 바람은 따스하다. 땅에는 벚꽂 무리들이 휘날리고 있었고, 이제 벚나무 가지에는 푸른 잎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여전히 뚜렷한 증상은 없었다. 그러나 정말로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여서. 그래서 나는 넋을 놓고 그 길을 걸었다. 여전히 뚜렷한 증상은 없었다. 더는 지루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득 외롭다고 느꼈다.


Day8


여전히 뚜렷한 증상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도 여전히 세상은 아름다웠고, 그 방안에 있는 나는 권태롭고 지루했다. 그리고 외로웠다.


Day9


비가 추적 추적 내렸고, 빗길을 미친듯이 달렸다. 땀으로 젖었는지 비로 젖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러나 800칼로리를 태웠다. 수분을 빼고 나니 목표 체중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며칠만 더 하면 공복이 아니라 하더라도 목표 체중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기분은 달라지지 않았다. 뚜렷한 증상은 없었으나, 모든 것이 정말로 짜증나게 그대로였다. 물론 체중은 그 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Day10


다시 화창한 날. 지하철을 타고 미술관에 가는 길. 누군가 나를 스쳐지나갔고 어디선가 맡아보았던 향수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그러며 지하철은 한강변으로 접어 들었고 저 멀리까지 풍경이 펼쳐졌다. 어디서 맡아본 향이었더라. 그러며 나는 무언가를 떠올렸고, 문득 웃음이 나왔다. 우연히 만나서 알게 되었던 사람. 술을 한 잔 했다. 새끼 손가락에는 희한하게 생긴 은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 손으로 웃으면서 나의 팔을 만졌었다. 고사리처럼 생긴 그 손의 찬 온도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그때였을 것이다. 아니, 분명히 그때였다. 밖으로 나와서 함께 담배를 피웠다. 검은 배경들 사이로 알알이 박힌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을 뿐이었다. 단지 한번의 접촉 하나. 몇가지 실 없는 농담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대화. 그러나 생각 외로 인상적인 이야기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웃음이 나왔다. 


외로움과 권태와 지리멸렬과 설렘과 아름다움의 이유를 알아챘다. 보고싶었다.











Day1



워크숍에서 만난 사람과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한 잔 했다. 그저 오늘의 만남이 평범하게 지나가고, 그저 완벽한 하루가 되기를 바랐다. 


뚜렷한 증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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