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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Sep 01. 2020

다시 보고 싶은 장면이 있었어

"시간을 되돌린다면 너는 언제로 가고 싶어?"


"글쎄, 그건 왜?"


"그냥"


"너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 먼저 질문하는 그거 아주 나쁜 버릇이다 너? 그거 충청도식이야."


"그런 거 아냐. 그리고 멍청도는 너 잖아!"


"근데 내 눈은 왜 피하지? 맞는 거 같은데?"


"아니라고. 그런 거."


"흠... 근데 시간을 되돌린다는 게 어떤 종류인데?"


"어떤 종류라니?"


"그러니까 영화 <나비효과>나 <어바웃 타임>처럼, 너 자신이 과거로 돌아가면서 동시에 어려지는 경우가 있고, <터미네이터>처럼 그냥 타임머신 같은 걸 타고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여행'을 가는 방식이 있잖아."


"음... 내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아닐 거 같아." 


"그래? 근데 결국 두 종류의 시간 여행 모두 미래를 바꾸는 시간 여행 아냐?"


"그건 그렇네. 근데 내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떤 종류든 그냥 구경만 할거 같아. 내가 너를 처음 만날 때 내가 그 시간으로 어려지든, 아니면 저 멀리서 어린 나를 관찰하든, 그 시간들을 그냥 그대로 보고 싶어. 이를테면 영화를 다시 보는 것처럼." 


"그러면, 뭣하러 시간을 되돌리냐? 어차피 모든 것이 다시 반복되고 여기 이 순간으로 고스란히 되돌아올 거라면 말야."


"내가 돌아가서 뭐라도 잘못 건드리면, 다시 여기 이 순간으로 고스란히 못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말해주는 건 고마운데, 별로 재미는 없다."


"근데 여기 이 순간으로 고스란히 돌아오려면, 내가 그때 그 순간으로 어려지는 방식은 어려울 거 같아." 


"나비효과 처럼?" 


"응. 내가 다시 여기로 돌아오려면, 그때 한 말들을 한토씨도 빠짐없이 그대로 말할 수 있어야 하잖아. 근데 나는 그렇게 못할 거 같거든. 예를 들면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라든지."


"뭐야 너 벌서 다 까먹었어?"


"글쎄, 기억난다고 해도, 그때 그 순간을 내가 했던 그대로 읊을 수는 없을 거 같은데."


"못할 건 또 뭐야. 그냥 술만 막 마셔대고 막무가내로 말하면 되는 거 아냐?"


"또 그 얘기 꺼낸다..."


"그때야말로 가장 없었어야 할 순간 아닌가? 네 흑 역사잖아. 바보야."


"아니, 물론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로 지우고 싶긴 한데, 그렇게라도 내 마음을 너한테 실토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여기에 있을 수 있었을까?"


"글쎄, 더 세련되고 멋진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


"그때 우리 애매했던 관계를 끝내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는 없었을 거 같아."


"그건 니생각이고"


"아니, 꽃다발이라도 들고 너를 만나러 약속 장소에 나갔더라면, 너는 그냥 그 자리에서 도망쳐 버리고는, 그냥 친구로 지내자고 말해 버리지 않았을까. 내게는 그렇게 성급하게 말해버리고, 멋쩍게 사과할 기회가 필요했어." 


"그게 두 배로 한심했지. 멋대로 술 먹고 취중진담해 버리고서는, 다음 날 멋쩍게 자기가 한 말을 취소하는 남자라니..."


"그래도 덕분에 하루 더 만날 수 있었던 거잖아? 물론 그 멍청한 짓을 역시 두 번은 반복할 수 없긴 하겠다. 너무 쪽팔리잖아. 그래도 그 순간이 없었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는 없었으리라는 예감이 들어." 


"예감이라는 말은 미래에 대한 말 아냐?" 


"그럴 거라는 짐. 작. 이. 들. 어." 


"그래도 다른 방법이 가능했을지도 몰라." 


"그래 어떻게든 만나야 할 사이였다는 건 참 안심이 되는 생각이지. 그래도 돌아보면 너무나 많은 우연들과 실수들이 있었고, 또 어떤 건 너무나 실수처럼 보였지만, 지나고 보면 꼭 필요한 거였다는 생각이 드는걸... 그리고, 우리가 다시 만나는 것만 중요한 건 아냐.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잖아. 같이 여행을 가고, 밥을 먹고, 여기저기를 쏘다니고, 손을 잡고 걷던 많은 순간들이 있었으니까. 뭐 하나를 바꿔서 그런 순간들이 사라지거나 뒤바뀌는 걸 원치 않아."


"너는 너무 우리 지난 순간들을 미화하는 거 아냐? 그 안에서 죽도록 싸우기도 했고, 또 어떤 곳은 걸어 걸어 찾아갔더니, 휴무로 허탕치기도 했잖아."


"아니, 그건 그 사장님 부친상이었잖아, 정말로 몰랐어."


"그랬지 덕분에 땡 볕에서 걷고 걸었던 그 길을 걸어 돌아갈 수는 없어 택시비만 왕창 나왔고 말이야." 


"그래, 내가 좋은 거만 기억한다 치고, 그럼 너는 나쁜 거만 기억해서 바꾸고 싶다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냐. 진정해. 근데,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말할 때, 그 말이 꼭 진심으로 과거의 선택 하나하나를 바꾸고 싶다는 이야기도 아니라, 그냥 후회가 되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인지도 몰라. 누구나 그런 순간들은 있으니, 거기에서부터 시간여행에 대한 상상이 시작된 거 아닐까? 그런 뒤에도 고집스럽게 모든 순간들을 그대로 두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건 그 다음문제인도 몰라. 후회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후회의 순간들이, 아픈 순간들이 먼저 있었어야만 한다는 거니까."


"그래. 누구에게나 후회의 순간들이 있지, 그럼에도 그 순간들이 있어서 우리가 만날 수 있있잖아. 그래서 나는 후회하지 않고 그냥 그 후회의 순간들을 다시 바라보고 싶은 거야."


"..."


"다시 보고 싶은 장면이 있었어. 더는 기억이 나지 않는 그런 장면 말이야."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떻게 다시 보고 싶다는 거야?"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과 다시 보고 싶다는 말은 꼭 충돌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건, 그때 내가 네게 어떤 말을 했는지가 아니라, 내가 네게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가 아니라, 그래서 네가 어떠한 말로 응답했고 어떠한 말로 내게 반응했는지가 아니라, 그때 그날의 날씨와 그때 그날의 네 향수 냄새와, 그때 그날의 네 표정과, 그때 그날의 내 말투와 표정과, 그에 반응하던 우리의 사소한 농담과 같은 것들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거야."


"참나 너 그런 것도 하나 기억 못 해?"


"이제는 기억해."


"... 무슨 말이야?"


"이제는 다 안다고. 지금 네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지금 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지금 네가 어떤 향수를 뿌렸는지, 그 냄새가 어떤 향이었는지 말야. 다시 보고 싶은 장면이 있었어. 시간을 되돌리고 싶냐고 묻던 그 순간에, 정말로 내가 오늘 이 순간으로 돌아온다면, 그리고 오늘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을까. 아니면, 나는 이 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고집하면서, 결국 우리가 만나야만 했듯이, 이별해야만 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냥 다시 보고 싶었던 이 순간들을, 네 손의 촉감과 머릿결의 일렁임을 다시 되새겨 보고서는, 훌쩍 저 먼 미래로 다시 돌아가버려야 할까."


"재밌네? 그러면 네가 그렇게 말할 때, 나는 이제 뭐라고 대답하게 되는데?"


"그건 말할 수 없어. 내가 이렇게 말함으로써 이제는 또 미래가 달라져 버렸거든."


"너는 방금 전까지는 과거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관찰만 하겠다고 말했잖아."


"그건 과거의 내 생각이고, 이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보지. 그때는 틀리고 지금이 맞다고 생각하나 봐."


"항상 그때가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말하지 않았어?"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것도 맞지. 나한테는 지금 너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그때'거든. 그래서 그때로 온 내 지금이 맞아."


"뭐라는겨."


"그건 이제 더는 중요한 건 아니고, 나는 둘 다 가지려고 해. 지금 너를 이렇게 다시 천천히 바라보면서, 우리 걷는 이 길의 보도블록 하나하나를 관찰하면서,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저물어 가는 하늘에 네 얼굴에 그림자가 어떻게 드리워지는지를 바라보면서, 다시 보고 싶었던 이 모든 장면들을 하나씩 바라보면서. 그럼에도 너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5년 후 미래에서 온 거야. -라고 말하면 어떨까?"


"미안하지만, 이렇게 애를 써도 우리의 미래가 바뀌는 일은 없을 거야. 나는 이런 말장난에도 서서히 익숙해질 거고, 처음 너를 봤을 때처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눈빛도 천천히 잃어갈 것이고, 나는 여전히 네 담배 냄새를 싫어할 거니까. 그래서 지쳐가다가, 미래에서 온 너의 이 시도가 소용이 없었다고 말하면서, 이 순간을 그대로 보고 흘려 버릴 거야. 나는 10년 후 미래에서 왔거든. -라고 말하면 어떨까?"


"하하하. 10년 후 미래의 너는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데?"


"그건 말할 수 없어. 내가 너에게 이렇게 말함으로써 또 미래가 달라져 버렸거든."







그렇게 말하던 너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잊어진 기억들이 그때 그 순간으로 구태여 돌아가지 않아도 저절로 되살아나는 순간들이 있다. 어느 평화로운 오전의 지하철 안에서 낯선 이가 뿌린 익숙한 향수 냄새 하나 때문에. 덜컥하고 떠오르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그때에는 내가 이제 와 다시 시도해보는 수 많은 사랑의 관계들이 너무나 하찮게 느껴져서는.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내면서, 동시에 모든 순간들이 저절로 깨어나는 것만 같은 그런 순간들이 있다. 그런 날, 나의 심정은 이미 과거에 두고 온 순간들로 단번에 날아가 쉬이 여행해 버리고서는 다시 지금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다시 지금이다. 이제와 내가 달려가고 싶은 곳은 지난 날의 그 어떤 순간이 아니라, 이제 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그 사람이 있을 미래다.


-라고 말하면 어떨까?


하며 잠시 걸터앉은 공원 벤치에. 사라져갈 매미 소리. 풀벌레들이 하나씩 깨어나고 있음을 알았고, 우리는 아직도 미래를 모른 채, 대화 하나하나로 미래를 바꿔가면서, 지금을 살아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함으로써 또 미래가 달라져 버렸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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