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나온 대머리 아저씨가 될게."
너는 그렇게 말했다.
"네가 그런 나를 보면서, 저 사람이랑 오래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냥 그런 사람이었구나. 그랬구나. 그렇게 느끼도록. 그 어떤 섹시함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무엇도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딱 그 정도의 사람이 될게."
그러면서 너는 조금 더 교활하게 덧붙였다.
"이건 배 나온 사람을 비하하는 것도, 대머리를 비하하는 것도 아냐. 그 배 나온 대머리 아저씨는, 이제 그 누구한테도 추파를 던질 권리도, 또 그런 의욕도 없지만, 그래도 그의 삶은 꽤 괜찮아. 월급은 따박 따박 들어오고 나름대로 성격은 좋아서, 어린 남자 애들한테 인기는 좋은 그런 아저씨야. 취향 타는 꼰대질을 해서, 누구에게는 귀찮은 존재로 남을지는 몰라도, 열 가지 말들 중에서 한 가지 정도는 도움이 되는 그런 아저씨니까. 그리고, 따박 따박 들어오는 그 월급으로, 사실은 말보다 그가 사주는 고기가 좋아서 인기가 좋을 그런 아저씨야.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섹시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지만, 나름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 방법은 알게 된. 딱 그 정도의 평판 좋은 그런 아저씨야."
그때에는 너의 말이 꽤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면 그냥 늙어가겠다는 말이었다. 그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누군가에게 더 매력적이어 보이고자 운동을 할 이유가 없어지는 순간이 있다. 인기보다도 자식의 성적이 더 중요해지는 그런 순간. 그러다 건강이라도 챙겨 보겠다고, 이리저리 산이라도 다녀보다가, 관절이 삐걱거리고 나서부터는 가벼운 산책만이 유일하게 남은 선택인 그런 삶. 그리고 너는 그때부터 이미 이마가 많이 넓어지고 있었으니까.
그래. 지나고 보면 그냥 늙어가겠다는 그런 말에 불과했다. 우리가 서글서글하게 인사를 나누고 그 길로 저 가야 할 곳을 향해 곧장 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머리가 벗어져서도 아니고, 배가 나와서도 아니고, 머리가 세어 버려서도 아니고, 주름이 늘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시간이 흘러 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그 시절 강하게 약동하던 씨앗같던 마음을 억누를 수 있을 정도로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이다. 회포를 풀어야 할 욕망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이 긴 세월을 지나오며 어쩔 수 없이 알아 버렸기 때문이고, 또 각자 의리를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이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순간의 약속이 특별했다기엔, 그것은 첫사랑의 이별도 아니었고, 또 마지막 이별도 아니었으며, 수많은 약속과 이별의 흥망성쇠로 살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그 순간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기엔, 우리의 기억 속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기억속 관계와 추억들이 항의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지 그때 그 순간, 네가 말의 기교를 부렸던 이유는, 어서 빨리 늙어 그런 순간이 오기를 바란다는 말도 아니었고, 그저 조금이라도 더 오래 기억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너는 언제나 번지르르한 말로 그 말의 내용보다도 그 말의 모양을 통해 너를 내세웠었으니까. 그 시도는 여지것 내게 호소할 정도로 꽤나 성공적이었고, 그러나 이제 정말로 우리는 그 말대로 늙어버렸기 때문에, 그 시도는 이제 와 제 의미대로 되었음에도 실패했다.
"맘대로 해. 어차피 노력하지 않아도, 너는 꼭 그렇게 될 거야."
그래서 나는 그렇게 쏘아붙였던가.
그리고 정말로 늙어간다는 것은 그런 말 하나의 성공과 실패에 연연할 필요도 없이, 그리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안에서도 치열하게 번민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다 또 스스로 용서하고 비워내려던 시간 안에서, 어쩌면 나는 마냥 늙어 버리기만 한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 늙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순간은 분명히 있었고, 젊은 날의 불안과 떨림도 어느덧 사라졌다. 좋은 일이다, 우리는 이제 그 혜택 안에서 그저 늙어버렸다고 말한다.
나는 지금의 네가 아니라, 그때 그 순간의 너와 논쟁을 하고 싶다.
"봤지? 내 말이 맞지? 내가 이렇게 늙어 버린다고 했잖아."
너는 그렇게 말했을까. 그런다면, 지금의 나도 조금은 더 할 말이 있었을 텐데.
"미안하지만, 나는 배 나온 대머리 아저씨를 보면서, 저사람과 헤어지길 잘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단다."
늙어 버린 대가로 쏘아붙이기는 커녕, 나는 인자하게 말하며 너를 더 골려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나는 이제는 논쟁할 그런 의욕조차 잃은 채, 결코 없다고 할 수는 없는 작은 마음의 미동을 진정시켜며 천천히 시간을 누릴 뿐이었다. 너조차도 모든 것이 이리 되리라는 것은 아마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은행으로 가는 길. 따뜻한 봄날. 나는 너를 보았고, 그때 그날의 약속을 이행하고 있는 너를 보았다. 모두 완수했다기에는 아직은 여남은 머리와, 힘조차 주지 않고 놓아버려 불룩한 배. 그리고 아이와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서로를 바라보며 목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