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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Oct 04. 2019

맞바람이 부는 날에

바닥에 드러누웠다. 바닥은 차가웠고, 푹 젖은 옷을 사이에 두고 숨을 몰아쉬는 것에 맞춰 등과 옷과 바닥이 차례로 질척 거리며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가쁜 숨은 허공으로 퍼져나가 그 무엇에도 반사되지 못하고 오로지 들숨과 날숨으로 마찰하는 공기만이 소리를 만드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코 위를 스치고 지나는 대단한 바람에 날치기 되어 헛숨조차 내지 못한다. 나는 더 이상 이 바람을 뚫고 나아가지 못하리라는 무기력 안에 푹 잠겨 있다.


"왜 누워 있어?"


그때 당신이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던 듯하다.


"맞바람이 너무 강해요. 더 이상 못 가겠어요."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가 태평하고도 온화하게 말한다.


"그래 그러면 그냥 거기에 그대로 있으면 되잖아."


"지금 그러고 있는 게 안 보여요?"


나는 확 짜증이 나서는, 대답 대신에 반문했다.


"맞아. 그런데 너는 지금 조바심을 내고 있어. 지금 짜증을 내는 게 그 증거지. 왜 너는 너를 좀 더 쉬게 두지를 않니?"


"당신이 내게 실망할 거 같아서요."


"너는 여전히, 나를 매몰찬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구나. 나는 네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때에도 억지 부리라고 한 적은 없어. 갈 수 있을 때에만 가라고 조언했을 뿐이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쉴 때는 쉬어라. 그래 당신은 내게 결코 틀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태평하게 늘어져 있을 때, 침상의 이불을 치워버리고 나를 경멸스럽게 쳐다보던 그 눈빛을 나는 잊은 적이 없다. 도대체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때는 언제고 또 쉬어야 할 때는 언제란 말인가. 그것을 누가 구분해준다는 말인가. 나는 지금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정당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도망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싸우고 있는 것인가.


"그건 네가 정하는 거야."


그래, 당신은 내게 그렇게 말할 것이다.


"네. 그건 제 스스로 정하는 거죠. 맞아요. 그런데 당신은 한 번이라도 내가 스스로 그것을 정하게 놔둔 적이 있었나요? 나는 늘 당신의 눈치를 보며 출발했고, 당신의 눈치를 보면서 멈춰 섰다고요. 당신의 눈치 따위를 신경조차 쓰지 않은 것은 오로지 이렇게 지쳐 쓰러질 때뿐이었어요."


"그래. 그리고 바로 그게 네가 쉬어야 할 시간이라는 거야. 지쳐 쓰러질 때."


"그것도 당신이 정한 기준이 아닌가요?"


"그건 네가 정한 거지. 눈치를 보며 달려도 네가 본 거고, 쓰러져서 더는 못 간 것도 네가 못 간 거야. 그러면 그것 말고도 대안이라도 있니?"


"그러다 내가 넘어지면요? 내가 다치면요?"


"그건 넘어지고 다친 거지 지친 게 아냐. 네가 넘어져도 내가 강제로 일으켜 세운 적이 있니? 네가 다쳤을 때에도 내가 너를 나약하게 생각했을까? 내가? 정말로? 너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니?"


"네 말도 마다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면 제가 아니라고 생각할만한 이유가 뭐가 있는데요?"


그렇게 소리치면서도, 또다시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은 늘 당신의 방식이었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그렇게 말하는 순간 결국 나는 알고 있다. 당신은 내게 여전히 당연한 원칙들을 사실처럼 말할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 잔인한 것은 당연한 말을 차갑게 내뱉는 것이었고, 그것이 무엇보다 예리한 칼날이 되어 나를 후벼팠다는 것을 당신은 모를 것이다.


바람은 더욱 거세어지는 듯했다. 당신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해서인지 바람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여전히 쓸쓸하지만 단호하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더 가지 않아도 좋아."


당신이 말한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더 가지 않아도 좋아.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바람이 불어 그것이 네가 구르는 발보다 더 강하게 너를 몰아세운다면, 온몸이 너를 붙잡는다면 가지 않아도 좋다."


"네. 오늘은 더는 못 갈 거 같아요. 바람이 너무 강해요. 너무 오랜 시간 달려온 것 같아요."


"그런데 말야. 지금 도대체 얼마큼의 바람이 불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니? 그것은 알고 있어야지. 네가 무엇 앞에서 잠시 멈춰서 있는지는 알고 있어야지. 나는 그것을 묻고 있는 거란다."


당신은 늘 내게 정확한 것만을 요구했다. 나는 준비되지 않은 채, 당연히 준비되어야 할 것들을 대답으로 요구 받았다.


"바람이 바람이지, 뭐예요."


나는 볼멘소리로 응답했다. 그러자 당신이 말을 이었다.


"자 눈을 감아봐.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도 너는 이 정도의 바람을 맞은 적이 있어."


땀이 거의 말라가고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바람을 맞이했다. 바람 냄새가 느껴졌다. 바람 냄새? 바람이라는 것이 냄새라는 것이 있었던가. 단지 그것은 무언가를 운반할 뿐이었다. 서러움, 억울함.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보다 당신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그런 마음. 그 마음을 먼저 배웠다. 사랑보다 인정을 먼저 갈구했고, 그것이 사랑인 줄을 알았다. 당신은 말했다. 사랑은 순간이지만 인정은 영원하고, 아름다움은 순간이지만 능력은 영원하다고. 그 안에서 보상으로 주어지던 투박한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손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내가 더 이상 인정을 갈구할 곳이 없었던 뒤에도, 인정이 가리키던 것과 이루어 둔 성취와 능력은 남아, 여전히 나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당신의 손길에 대한 갈증은 어느새 나 자신의 갈증으로 바뀌어 있었고, 나는 내 앞에 부는 바람을 스스로 일으켜 스스로 맞아내며 살아가다 또 지쳐서 쓰러졌다. 그때 나의 조바심에 불안해져서는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도록 한 당신을 원망했다.


"전속력으로 언덕 아래를 밟아 달리는 것 같아요."


"그래? 빨리도 달리는구나. 좋다.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에는, 가만히 있어도 그렇게 달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 몸은 가만히 있는듯하지만, 그때에도 늘 너를 지탱하면서 버티고 있는 거란다. 그때에는 여전히 네가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만을 기억하고 있으면 돼."


힘들 때에는, 가만히 있어도 이미 무언가 하고 있는 것이다. 지쳐서 쓰러진다면 그때가 비로소 멈출 때이다. 그때에는 쉬고 있어도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늘 위로하는 대신에 그렇게 말했다. 그만큼 나의 휴식이 주는 죄책감은 조금은 덜어질 수 있었지만, 그만큼 늘 쉬고 있는 것처럼 느끼지 못했다. 어느새 나는 쉬는 방법을 잊게 되었고, 그저 멈추는 법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내가 묻고 싶었던 것은 진정한 휴식에 대한 소문이 아니었다. 내가 묻고 싶었던 것은 진정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소문이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머무르다 영원히 멈춰버리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요. 멈춰있어도 나아간다는 말을 정말로 믿어 버린다면요? 그래서 적막함이 주는 권태조차 힘든 것이라 믿어버리고서는 완전히 나아갈 힘조차 잃어버린다면요? 바람 앞에 멈춰 있는 것과, 발을 굴러 나아가는 것은 정말로 달라요."


"정말로 다르니?"


"네 달라요."


"그러면 다르다는 것만을 알고 있으면 돼. 그리고 네가 그것을 구분할 수 있으면 돼. 너는 그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니?"


"발을 구를 수록 그만큼 내게 닿는 바람은 강해져요. 내가 하는 것만큼 내게 부딪히는 것은 더 단단해져요."


"그래 그것만을 잊지 않으면 언제든지 네가 원할 때 나아갈 수 있고, 나아가고 있을 때 네가 어떻게 가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너는 그것을 구분하고 있는 거야. 구분할 수 있다면, 언제까지나 네가 너를 속이는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그때, 정말로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멈춰서 쉴 수 있게 될 거란다. 나아가는 것과 멈춰있는 것을 진정으로 구분할 수 있다면, 너는 언제라도 멈출 수 있고 언제라도 살아낼 수 있어."


권태로운 날 저녁에. 나는 정말로 당신의 빈자리를 느낄 수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게 무언가 해줄 말을 가진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이었고, 정말로 늙어간다는 것은 가장 귀 기울이고 싶었던 사람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겹게 되돌려 보았던 그런 말. 이제는 익숙해져서 사실은 내가 어린 누군가에게 상투적으로 대신 전해주던 그런 말.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이 아니었다. 어떤 개소리라도 좋으니 당신을 스스로 지탱해온 그런 말을 당신의 입을 통해서 듣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그 말들은 오직 기억으로만 남았다. 그리고 여기 남은 나는 도전과 좌절을 반복해내며 스스로를 검증해야 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지는 마. 네가 넘어진다면, 네가 다친다면, 사실 나는 그 누구보다 더 아파하고 힘들어할 거란다.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괴로운 것이었기에, 그런 날이 올 새라 나는 무엇이라도 말해야만 했단다."


나는 기꺼이 육성으로 들어보지 못한 그 말을 내 상상으로만 구현해낼 뿐인 걸까. 그러나 나는 도대체 이런 말을 언제 어떻게 들어 상상해낼 수 있었던 걸까. 이 말은 결코 내가 원했기에 지어낸 그런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말은 내가 이제 와 누군가에게 해주고 싶은 그런 말이었던 것이다. 이 말은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 말은 내가 지켜야 할 그런 사람에게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그런 말이고, 이 말은 사실은 내가 당신에게 이제 와 해주고 싶은 그런 말이었다.


바람이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세상은 다시 적막해졌고, 당신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 듯하였다. 적막은 내가 나를 부르는 그런 소리였고, 다시 내 스스로 공기에 부딪혀 바람으로 만들어내야만 한다는 그런 소식이었다. 지면에 바닥이 닿는다는 그 감각. 내가 나를 움직인다는 그 느낌. 내가 발을 구르면 구를 수록 내 앞에 부딪히는 바람도 단단해졌고, 그럴수록 땀은 더욱 빗줄기처럼 흐르는듯했지만, 그럴수록 바람은 그 수분을 날려버렸다. 내가 나아가는 만큼, 딱 그만큼만 풍경은 나의 뒤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만큼 나는 나를 앞서서 나아가고자 했고, 그만큼 나는 나를 따라잡았다. 더 빠르게 모든 것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멈춰 서도 나아가고 있는 것과, 비로소 나아가는 그 두 가지 감각. 나는 그것을 구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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