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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Jun 05. 2020

식인 외계인과 수율 구린 지하철 어느 날

낮 열한시 반. 나는 병원에 들렀다 지하철역으로 간다. 의사는 약한 감기 기운에 과로가 겹친 것 같다고 말했다. 수액이라도 맞으라고 했으나, 나는 그냥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비몽사몽 일어나서 회사에 나갔었다.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눈을 뜨는 그 순간에 알 수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은 무거웠다. 그러나 한창 중요한 시기라서 어쩔 수 없었다. 한 번도 이런 문제로 결근한 적이 없어서 나의 상태를 거짓이라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조금이라도 인사고과에 영향을 미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나는 쓰러졌고, 부장은 나를 집으로 보냈다. 그때 내가 생각했던 것은 "쓰러지는 거라도 보여주고 조퇴해서 다행이다" 였으려나.


약을 타서 집으로 가는 길. 마지막으로 평일 이 시간에 돌아다녀 보았던 적이 언제였던가. 회사원이 된 이후에, 더군다나 모두가 출근한 뒤에 시내를 돌아다닌다는 것은 무척이나 낯설고 이상한 일이다. 나의 시간만이 멈춰있는 기분. 따뜻한 봄바람. 햇살은 무척이나 따사롭고, 바람은 아무리 강하게 불어도 더 이상 날카롭지 않다. 모든 날씨는 내 행복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그저 꿈을 걷고 있는 기분이다. 그리고 내가 꾸는 이 꿈이라는 것은 깨려 애쓸수록 쉽게 벗어낼 수 없는 이상한 허우적거림이다.


인생. 뭘까. 내게 삶은 해야 하는 일들의 연속이었지, 하고 싶은 것들의 연속은 아니었다. 아빠는 내게 계속 공부를 하라고 말했지만, 그런 여건을 만들어주면서 그리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자립하고 싶었다.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 할 여유는 없었다. 그저 잡을 수 있는 것, 그리고 또한 내가 해야만 하는 것. 그것을 하면서 달려왔다. 성취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안에서 작은 성취감.


나는 그것으로도 충분한 걸까. 아니, 어떤 점에서는 이제 그것이라도 없으면 안 되는 순간이 왔다. 그 작은 것들을 잡기 위해서 나는 많이도 버려야 했으니까.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활짝 웃었던가.


<<스크린도어가 열립니다>>


나는 반쯤 잠든 상태에 있다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깼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열차에 올라탄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빈자리를 옆에 아줌마에게 빼앗긴다. 지하철 안은 생각보다 한산했고, 나는 여남은 자리가 있는지를 알기 위해 둘러본다. 그러나 그 지하철은 정확히 그 좌석의 사람들 만큼의 승객만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이 모든 자리에 딱 알맞게 내려앉은 것처럼. 한치에 오차도 없이. 이 열차에서 오직 일어서 있는 나는 마치 한 명의 불청객인 것처럼.


옆 칸으로 가 남은 자리를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돌아다닐 기력이 없었다. 나는 그냥 문에 기대서 창밖을 바라보기로 한다.


'다행이다 그치?'


나는 다시 이 한낮에 비몽사몽으로 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놀라 잠에서 깨고 만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고, 모두 무관심하게 들이치는 햇살을 등으로 받으며 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역시 내 자리는 없었다.


그래. 딱 이랬던 날이 예전에도 있었다. 아직 미래에 대해서 준비하기에 조금은 여유 있던 시절. 그때 우리는 오늘 같은 날 헐레벌떡 지하철에 올랐었다. 우리는 인천 바다를 보기 위해서 지하철에 올랐었다. 숨을 거칠게 쉬는 나를 두고서 너는 얌체처럼 남은 한자리에 철없는 표정으로 냅다 뛰어가 앉아 버린다. 그러면서 눈치 없이 나를 보면서 헤헤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때 너는 짓궂다는 식의 리액션을 바라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그것에 일일이 응할 마음이 없었다. 어쩌면 조금은 네가 나를 신경 써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빴던 거려나. 어쨌건 너는 그런 나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내가 앉은 게 아니라, 내가 맡아 놓은 거야."


그러며 다시 또 눈치 없이 일어난 그 자리에 너는 나보고 앉으라 손짓했지만, 그러는 새 그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네 앞의 아저씨가 냉큼 앉아버렸지. 너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 다가왔어. 그래. 그때 너는 말했어.


"다행이다 그치?"


다리 아파죽겠는데 뭐가 다행이냐는 나에 말에 너는,


"지금 우리가 앉을 곳은 없지만 말이야, 이 정도로 텅텅 비어 있으면 안전해."


"뭐가 안전하다는 거야?"


"몰라?"


"뭘 몰라 내가."


"자 들어봐, 지금 이 지하철은 수율이 매우 떨어지는 지하철이야."


"수율?"


"그래 킹크랩, 대게, 수율.... 몰라?"


"몰라."


"아니 살이 꽉 들어차 있으면 수율 좋다고 하잖아."


"계속해봐."


"우주는 말이야, 아주 넓어."


"듣고 있어."


"우주는 아주 넓은데 그리고 또 무한히 넓은데, 무한히 넓은데도 이 우주에 지적 생명체가 우리밖에 없다면, 이 무한한 공간이 대단히 낭비되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말했대."


"누가?"


"있어 어떤 과학자."


"확실해?"


"아니, 좀 들어봐. 그래서 이 세상 어딘가에는 우리와 같은 지적 생명체가 있을 가능성이, 없을 가능성보다 높다는 거지! 그리고 더 무서운 건, 우리를 잡아먹는 식인 외계인이 있을 가능성도 없을 가능성보다 높을지 몰라."


"개소리 같은데?"


"그래서 말야, 그들이 우리 지구를 침공해서 제 배를 불리려거든, 지하철만큼 손쉽게 우리를 포획하고 먹어치울만한 건 없지 않을까? 마치 킹크랩 다리를 뜯듯이 말이지."


"그래서?"


"근데, 오늘 딱 이 정도면, 우리가 앉을 곳은 없어서 조금은 서운할지 모르겠지만, 엄청 텅텅 비어 있단 말이지. 그래서 내가 식인 외계인이라면, 오징어잡이 배가 한밤중에 불을 켜고 바다에 나가듯, 출근시간이나 퇴근시간을 노릴 거야. 이런 시간은 수율이 너무 안 좋아서 먹을 가치가 없거든."


"다행이네. 식인 외계인한테 안 잡아먹혀서."


"그치? 다행이지? 행운이지? 정말 짱이지?"


그렇게 말하던 너는 눈이 생글생글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네가 한 헛소리들을 재미있게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단지, 그것을 그렇게 말하는 네가 조금은 재미있었다. 내게 삶은 해야 할 일의 연속이었고, 너의 삶은 조금은 흥미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이제 여기 텅텅 빈 공간은 우리 둘 거야. 우리만 일어나 있으니까."


그리 말하던 그 열차 안은 지금처럼 햇살이 들이쳤고, 그 칸을 가득 메운 빛은 정말로 이 모든 공간을 거짓말처럼. 우리 둘만의 것으로 만들었고, 그때 내 삶 안에 작은 휴식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도 있겠다고. 그리 생각했던가.


그리고 바다. 산책. 하늘. 땅. 바람. 그리고 다시 또 네 헛소리. 술. 싸구려 홍게라면. 그러면서 너는 그 식인 외계인 흉내를 내면서 라면 안의 홍게를 집어 올렸다. 수율도 없는 그저 국물을 우리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그 물빠진 대게를 맛있게도 먹어댔지.


"수율 같은 거 신경 안 쓰고 먹는 인간도 있는데, 외계인이 신경 쓰겠니"


내가 그리 말하자 너는 -그러네- 하며 깔깔 웃어댔지. 그것에 나도 그만 따라 웃어버리고 말던 순간들. 내가 잠시 엿보던 그 행복한 삶. 그리고 그 안에 너.


그와 언제까지나 함께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다시 또 내가 해야 할 것을 위해서 멀리멀리. 떠나던 날. 갖가지 기지로 나의 공격을 슥슥 피해 가던 네 앞에서 나는 결국 나의 미래를 볼모로 잡았다.


"너와 함께 한다면 내가 이뤄야 할 것을 이룰 수 없어."


그래. 생각났다. 내가 아파도 출근을 해야만 하는 이유. 내가 더욱 더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이유. 나는 네게 거짓말쟁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뒤에서 터지던 눈물들에게 작은 책임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더 멀리멀리. 내가 해야 할 것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또 오늘의 이 수율 없는 지하철에서. 이렇게 날 좋은 날에. 바람 좋은 날에. 그 누구도 나를 보아주지 않았고. 이토록 텅텅 빈 공간 안에서 나의 자리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나를 위한 공간은 아주 옛날 어느 순간엔가 사라진 것 같아서. 그게 문득 조용하게 쓸쓸해져서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보 같았다. 수율 좋은 지하철이라니. 출근 한 번 해 봐. 사람들은 미어터지는데, 거기에 수율까지 좋아서 외계인한테 잡아먹힌다고? 나는 억울해서 못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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