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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Mar 19. 2020

삶에는 봄이 있어

"이 좋은 날도 다 지나가겠지"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때 너는 그렇게 말했었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조금은 쓸쓸한 눈빛으로. 자상하게 웃으면서.


"마음이 간지러워서 그래. 봄이 왔을 때에는 봄을 즐기자. 나는 이때면 깨달아. 내가 간신히 겨울을 견디고 있었구나. 괜찮은 줄 알았는데, 모든 게 턱하니 풀려서는, 어떻게 그 차가운 날들을 견뎌냈는지 이제는 이해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할 때 너는 잔잔한 자신감으로 하늘을 가리켰고, 하늘은 파랗게 파랗게. 마음은 둥글게 둥글게. 나는 녹아내리는 것 같았고, 왠지 마음은 더욱더 무섭고 슬퍼지는 거야. 그럴 때 있잖아. 너무 행복해서 그 행복이 달아날 것 같아서. 그런 행복에 마음이 한번 익숙해져 버리면 다시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그래보았던 날들이 떠올라서, 오히려 다시 찾아온 봄날이 달갑기는커녕, 채 지나지도 않은 겨울을 차라리 다시 기대해보는 그런 마음 말야.


"괜찮아"


너는 나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말했다.


"삶에는 봄이 있어. 우리가 모든 것을 '삶'이라고 말한다면 말야. 지나가고 사라지는 것은 없어. 모든 것은 그저 있는 거야. 그때 우리는 모든 것을 현재형으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삶에는 봄도 있고 사랑도 있고 행복도 있고, 한 번이라도 그것을 느꼈다면, 그것은 있었고, 있고, 또 앞으로도 있을 거야. 영원히 말이야."


나는 그런 너의 말에 반박을 하고 싶어졌다. 그것은 너의 말이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그 좋은 말이 정말로 좋기는 한 건지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슬픔도 현재형으로 말할 수 있어. 삶에 봄이 있듯, 겨울도 있고, 슬픔도 있고, 불행도 있고, 헤어짐과 작별도 있고, 죽음도 있고, 전쟁도 있어.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그 전쟁은 한번 발발했다는 그 이유만으로 영원히 우리의 역사에 있을 거고 삶이 하나의 역사라면 그 역사 안에는 없는 것이 없어. 그래서 괴로운 것도 있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대로 말이야."


"알아. 그래도, 어쨌든, 어쨌든 말야. 삶에는 봄이 있어."


"그래.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대가로 우리는 겨울도 있고 가을도 있고, 가뭄도 있고 재해도 있는 거잖아."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지금은 말야, 있었고 있고 앞으로도 있을 그 봄이 심지어 여기에도 있잖아. 그리고 이 봄은 여름에 시간을 내어준다고 해도, 한 번이라도 존재했던 이유만으로 앞으로도 네 삶에 있을 거야. 네가 그 어떤 노력을 하고 그 어떤 불행을 만나고 슬픔 안에 빠져 있다고 해도 말이야."


여전히 엉성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사기꾼이다. 


사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말의 내용이 아니라 그 내용을 말하는 사기꾼 자신을 믿게 만듦으로써다. 나를 믿어라. 왜냐하면 나는 믿을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믿을만한 내가 그런 말을 하는데, 허투루 말할 리가 있겠니 - 너는 그렇게 말하는 듯이 보였다. 나를 믿어봐 -라고.


"이제 네 삶에는 나도 있어. 나는 한 번이라도 네 옆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앞으로도 네 삶에 영원히 있을 거야."


"그건 대답이 안 돼.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한 번이라도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거잖아. 헤어진다고 해도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괜히 울고 싶어졌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 그때 너는 내 손을 잡았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말하며 너는 고개를 푹 숙인 내 시야에 얼굴을 집어넣고서 다시 또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계절과는 달리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나는 언제나 그대로 있을 수 있어. 네게 봄을 줄게. 매년 이맘때쯤에 같은 날씨를 줄게. 파란 하늘과, 다시 돌아오는 따뜻한 온도와, 다시금 피어나는 꽃들을 네게 줄게. 불어오는 바람들이 뭉툭해져서 얼굴에 부서지는 그 느낌들을 줄게. 네 삶에 있었고 또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들을 줄게."


그때 너는  마법처럼, 언젠가 사라질 이 모든 것들이 앞으로도 돌아올 것을 약속했고, 거짓말처럼, 아니 거짓말로 이 모든 것들을 네가 만들어버린 것으로, 그러며 너 자신을 내 삶에 확보함으로써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라 설득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너의 말을 하나도 믿지 않았지만, 결국 그 말에 속아 버렸고. 우리는 벚꽃 놀이를 하고 솜사탕을 먹었다.


그리고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기후가 변했다. 세상에는 겨울과 여름만이 남았고, 벚꽃엔딩이라는 노래가 사라진 봄에 대한 유적처럼 느껴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여기 한국은 봄을 잃었단다. 하지만 너는 여전히 태평하게. 우리의 삶에는 여전히 그날의 그 파란 하늘과, 흩날리는 벚꽃과, 따스한 바람과, 그날의 솜사탕과, 그것이 녹아 붙어 끈적해진 손을 네 얼굴에 부비던 순간들까지도. 그것들은 모두 여전히 내 삶 안에는 있었고, 있고, 또 있을 것이었다.


내게 약속한 그 봄을 돌려줘. 매년 주기로 약속한 그 봄을 돌려줘. 나는 여전히 네게 그렇게 핀잔하고, 너는 여전히 내 앞에서 웃었다.


그런 우리의 삶에는 여전히 죽음이 있고, 슬픔이 있고, 불행이 있지만, 그래서 또한 네가 있고, 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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