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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May 15. 2019

사랑의 구실

'가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었더라.'


맞아. 나는 구실을 찾고 있었어. 여기는 세븐 일레븐. 나는 아이스크림 냉장고에 머리를 파묻고 있다. 그제야 정신이 퍼뜩 나는 것이다. 그래 나는 구실을, 아니, 아이스크림을 찾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술을 마시다 보면, 문득 그런 순간이 있다. 술에 깊게 잠길 뻔하다가,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는 순간이다. 그 이성의 밧줄을 놓치는 순간 반드시 실수를 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래, 찾아야 할 것을 찾아서 나는 돌아가야만 한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찾고 있었다. 우유맛. 술에 잔뜩 취한 사람의 속을 달래줄만한 그런 아이스크림. 어디서 봤다. 우유는 지용성이라서 위장을 잘 감싸준다나.


나는 그래서 월드콘과 메로나와 돼지바 사이에서 그 촌스러운 초록 껍데기를 찾고 있다.


그리고 또 어떻게 했더라.


맞아, 조금 더 걸어가면, 너희들 모두가 모여있는 바로 그 술집. 우리의 아지트. 시끌벅적한 그곳에 아이스크림을 가득 담아서 하나씩 돌릴 테다. 그리고 그것은 그저 하나의 구실일 뿐이었고, 사실 내가 수많은 아이스크림들 사이에서 우유 아이스크림을 집었던 이유는 술 취해서 쓰러져 있는 네게 그를 건네고 싶었기 때문이지. 나는 내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하나의 구실이 필요했고, 그 구실은 너를 제외한 다른 모든 아이들을 위한 그 형형 색색의 아이스크림 더미.


계산을 하고 밤공기를 뚫으며 네가 있는 곳으로 간다. 여름밤. 창문이 열려 있는 고깃집에서 들려오는 기름 지져대는 소리와 지방과 단백질이 타는 냄새. 드문 드문 섞여 있는 담배 연기 같은 것들이 그 밤을 불량하게 물들이면서도, 동시에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그냥 그 공기와 공기 사이에 내 담배 하나를 끼워 넣으면 될 거 같아서, 나는 가게 앞에서 불을 붙였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모든 들키고 싶지 않지만 소중한 마음에게는 구실이 필요해.'


보고 싶은 사람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서 있지도 않은 과제를 물어보는 것. 네게 무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먼저는 면박을 주고 조롱하는 것. 그것도 모르는 바보에게 내가 자비를 베풀어 주겠다 - 따위와 같은 것들. 그리고 오늘은 아무도 몰래 빠져나와 내가 베푸는 아이스크림이라는 자비 하나.


모든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구실이라는 것은 나를 슬프고 답답하게 하지만, 그만큼 나를 안전하게 해 준다. 나는 그런 안전함이 좋았다. 모든 이유들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시작하지만, 나의 모든 행동들은 나의 구실에서 시작하고, 나는 그 구실 없이는 무엇도 쉬이 할 수 없다. 구실은 그런 용기 없는 내 마음의 증거이고, 그러나 이 안정되고 즐거운 관계를 지키고 싶다는 나의 변명이다. 그때 즐겁게 떠들며 어디론가 이동하는 그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왜 그렇게 슬펐던 걸까. 그러나 내 입으로조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그런 말. 그것은 혼잣말로조차 나오기 어려운 그런 마음이다. 그러나 나는 구실을 가지고서는 늘 자신감이 넘쳤고, 유쾌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구실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구실은 좋은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수 없이 드나들어 익숙한 술집의 문을 열어젖히고 나는 너와 아이들이 있을 그 테이블로 천천히 걸어간다.


그리고 깨달았지.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제야 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고, 너희들은 바삐 2차를 가고 있었다는 것을 전화를 통해서 들었던 거야.


그때 네가 앉아 있던 자리에 놓여 있던 검은 가방 하나. 내가 그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 가방에는 늘 고양이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열쇠고리는 내가 준 거니까. 네 생일이라는 구실, 그리고 그 구실에 걸맞은 너무 비싸지도 또 너무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 그런 귀엽지만 조악하지 않은 선물.


그런데 그거 알아? 그거 생각보다 꽤 많이 비쌌다?


나는 칠칠치 못한 너를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는다. 그리고는 그 가방을 챙긴다.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 찰나, 화장실 문이 열린다. 그곳에서 네가 나온다. 기대를 포기하자마자 내가 원하던 것이 나올 때의 그 철렁거림. 그때 그 알 수 없는 떨림과 가능성과 같은 것들이 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고, 너는 다시 네가 있던 자리로 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얼른 일어나서 아이들이 이동한 곳으로 가자고 말한다. 대답이 없자 차라리 많이 취했으면 그냥 집에 가라고 못마땅하게 말해본다.


왜 나는 그때 네게 화를 내듯이 말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취한 것이 싫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냥 내게 관심도 없이 술을 마셔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속으로 빌었지. 그냥 일어나지 마라. 그냥 계속 거기에 앉아 있어라. 그러자 너는 정말 마법처럼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나는 네 옆에 앉아서 서주 아이스크림을 네게 내밀었지. - 자 먹어. 먹고 일어나자.


그때 너는 내 멱살을 잡으면서 말한다 - 안 먹어. 나 유당불내증이야. 죽을래 - 그러더니 그냥 네 앞에 있는 잔에 남은 소주를 따르더니 그렇게 마셔 버리는 거야 - 잘 들어. 내가 지금 소주를 마시는 건, 네가 멍청하게 우유 아이스크림을 사 와서 그런 거야. 알겠어? 그러니까 잔말 하지 말고 너도 마셔 - 그리고 너는 내게도 그 술을 한잔 따라 주었지.


노가리가 타닥타닥 구워지는 소리. 맥주가 쏟아져 굳은 듯한 퀴퀴한 냄새. 씹지 않아도 식감을 모를 리 없는 촌스러운 그릇에 담긴 뻥튀기. 갈색 벽지에 어두운 노란 조명, 그 빛이 반사되어 빛나는 술병과 잔에 담겨 일렁이는 그 징그러운 술들. 내 동공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커졌다 작아졌다 초점이 풀리고 서서히 아득해졌다. - 다른 아이스크림도 엄청 많거든 - 나는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네게 그렇게 말해본다. 그러자 너는 - 이미 늦었어. 그렇게 말하며 앞에 따른 소주를 다 비워 버렸지.


존재의 문제. 그때의 나는 존재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왜 너는 없지 않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때 풀린 눈으로 너를 바라보며 그리 생각했다. 왜 나는 없지 않고 있는 걸까. 왜 우유 아이스크림은 하필 그 날 없지 않고 있었던 걸까. 왜 그날 모두가 떠나고 난 그 술집에 너는 없지 않고 있었던 걸까. 왜 나는 모두가 떠나기까지 담배를 피웠던 걸까. 왜 너는 유당불내증이었던 걸까. 왜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떠난 그 술집에서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술을 마셨던 걸까.


그리고 나는 지금 그런 너를 바라보고 있다. 술 범벅이 된 테이블 위에서, 내 산더미처럼 쌓인 아이스크림을 외면하고서, 그저 술을 마시고 있다. 유당불내증이라고 말했던 너는 내가 가져온 아이스크림을 먹는 대신에 기꺼이 술을 마셨고, 그래서 너는 취할 대로 취해서, 그리고 나 역시 취할 대로 취해서. 나는 이제 곧 네게 술에 취했다는 그 구실로 '사실은 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그렇게 말할 것이고, 또 그 술이라는 구실이 부끄러워서 술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조차도 술 때문인 것만 같아서, 이 모든 건 네가 유당불내증이어서 그런 것이라고 - 그리 볼멘소리 중얼댈 것이다. 그리고는 바로 그것이 있지 않고 없었던 모든 이유라며 헛소리를 늘어놓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후에 너는 내게 '알고 있었다'고 그렇게 말할 것이고. 너는 내 손을 잡을 것이고, 내 어깨에 기대서 잠에 들 것이었다. 내 옆에 잠든 너를 보면서, 술은 오늘 제 구실을 다 했다고 믿으며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아주 오래 오래 그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을 것이고, 내일 술에 깨고 난 뒤에 다시 너를 찾아가 제대로 내 마음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어제 이미 모든 마음을 다 말해버렸기 때문이라는 그 구실을 내세워 더 안전하고 자신 있게 내 마음을 토해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연애를 시작할 것이고, 한 동안은 아주 행복할 것이다.


그래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구나- 내가 이 모든 것들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유. 그것은 이미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니까.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아주 오래 전의 꿈을 꾸는 날. 그때 그 순간 모든 풍경들이 되살아나고, 나는 아직도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순간을 실제로 만져낸다. 내 옆에 이렇게 잠들어 있는 너. 우리의 모든 것들은 바로 이렇게 시작했었다. 나는 순전히 지금이 꿈인 것을 알아서, 부디 깨지 않기를 바랐고, 그때에는 순전히 그 순간이 현실인 것을 알아서, 부디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래 그랬었지."


너는 살며시 눈을 뜨며 다 안다는 듯이 내게 그렇게 말한다. 꿈이라는 것을 자각한 순간, 이제 너는 내 추억의 그림을 거슬러 제멋대로 움직이며 말하기 시작한다.


"오랜만이야."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너는 대뜸,


"근데 그거 알아? 나 사실 유당불내증 아니야."


"그래 그것도 사실 머잖아 알게 되었지."


"나도 술 한잔 더 하기 위해서 구실이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술에 취했다는 구실로 네 옆에 기대 있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우유 아이스크림을 사 오지 않았더라면, 너는 그냥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일어났을까?"


"그건 알 수 없지. 물론 아마 다른 구실을 만들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술 취한 그날의 내가 여남은 창의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 하지만 말야 중요한 건, 모든 구실에는 이유가 있고, 모든 구실에는 한계가 있다는 거야."


"그래, 사실 네 가방에 매달린 이 고양이보다 내가 더 주고 싶었던 것은 시계였어. 네가 가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별자리 모양이 그러진."


"그래서 나는 좋았는걸. 모든 구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그때에는 고양이가 적절했고, 그래서 나는 그것을 너와 함께 하는 동안에는 늘 가지고 다녔으니까. 그 술 취한 날에 술이라는 구실에 의해서 그저 해보는 작은 고백과, 네 어깨에 기대 보던 내 볼과 같은 것들. 그 정도면 충분했던 거야. 그 이상은 불가능했던 거고."


나는 그렇게 말하는 너를 보며, 아주 오래 전의 모습으로 나타난 네가 그저 나 듣기 좋은 말만을 떠드는 것은 아닌지를 의심했다. 그래, 이것은 다른 누구의 꿈도 아니고 나의 꿈이니까. 내가 생각에 잠겨서 말을 하지 않을 때면 너는 내 얼굴을 만졌다.


"무슨 생각해. 또 구실이 없어서 이야기를 못하는구나."


"나는 차라리 우리가 헤어질 때 말야. 우리가 차라리 사별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왜냐면, 네가 정말로 죽어서 사라지면,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네가 다른 사람을 만날 것에 질투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가끔 이렇게라도 꿈에서 만날 때면, 지금 어딘가에 존재할 너와 이 꿈에 나온 너를 비교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이렇게 다시 만날 때면, 정말로 저 세상 너머에서 네가 나를 찾아온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 너는 언제나 그렇게 명분을 찾아 헤맸었지. 그런데 말야, 그냥 지금을 즐기면 안 될까? 이유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너는, 결국 가장 중요한 이유를 전혀 몰랐어. 네가 꿈을 꾸는 이유는 네가 꿈을 꾸고 싶기 때문이고 그냥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것은 좋아하기 때문이잖아. 그걸 술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뭐야?"


"맞아. 그래서 더 이렇게 너를 만나고 싶지 않았어. 눈을 뜨면 다른 곳에서 이미 잘 살아가고 있을 너와 이 망상 속의 너를 비교하면서 나는 또 슬퍼져 버릴 거야."


"너는 내가 잘 살 거라고 왜 확신하는 건데?"


"그냥. 그럴 거 같아. 그러길 바라."


"왠지 알아? 너는 나를 저주할만한 구실이 없어서 그래."


"그래. 바람이라도 피우고 나를 떠나지 그랬어."


"그것보다는 네가 나를 잡을 구실을 찾아서 더 오래 함께 하는 게 더 편했을 거야."


그랬다. 아마도 나는 너를 잡을 구실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구실이 없다는 그 구실조차도 사실은 비겁한 것이었다. 아마도 나는 많이 지쳤으니까. 어찌할 도리가 없었으니까. 그것은 구실과 이유의 문제가 아니라, 내 능력의 문제였을 거라는 짐작이 든다.


아니, 정말로 그랬던가? 우리는 어떻게 헤어졌었던가.


"내가 마지막에 많이 잘못했었나?"


"아니, 너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그냥 그랬을 뿐이야. 그렇게 되었을 뿐이야."


너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잔에 술을 더 따랐다.


"우리는 아마 더 오래 사랑했더래도, 점차 구실을 잃어갔을 거야. 우리가 처음 함께 잤던 그 날. 우리는 서로가 부끄러워서, 서로가 음흉해 보이지 않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유를 만들어내야 했어. 기억해? 나는 너를 우리 집에 부르기 위해서, 전구가 나갔다고 말해야 했지. 그래서 너는 내가 늘 혼자 하던 그 허접한 노동을 나를 위해 해줘야 했지."


"맞아. 그랬지."


"그리고 너는 나를 만지기 위해서 촌스럽게 한번 더 사랑한다고 말해야 했고. 그러나 그 모든 구실들이 그저 하루 밤의 욕망으로 들리지 않았던 것은, 그 구실 안에 진정한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거야. 우리가 아마 몇 년 더 사랑했더라면, 그런 구실도 없이, 그냥 너는 더 이상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저 내 집으로 들어와 우리는 사랑인지 욕정인지 모를 그 사랑을 반복했을 거야. 우리는 점점 더 구실 없이 솔직해졌을 것이고, 그 구실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진심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냥 그렇게 비참하지만 더는 헤어질 수 없는 관계를 지속해야 했을 거야. 구실이 없어 헤어졌던 것은 잘했던 것인지도 몰라."


"그래도 내가 남자 구실은 잘하지 않았어?"


"남자들 참 이상해. 지들이 잘하는 줄 알지. 미안하지만 너는 딱 그 구실만 없었어."


"이건 내 꿈 아니야?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말해?"


우리가 했던 모든 말의 기억들은 재구성되어 더는 내 의지로 통제할 수 없었고, 나는 잊고 지내던 우리만의 화법들이 떠올라 참을 수 없이 슬퍼졌다.


곧 동이 틀 터였다. 꿈은 곧 끝이 날 것이다. 내 자의식이 강해질수록, 내게 너무나 익숙해서 돌아가고 싶은 것들이 생각날수록, 나는 꿈에 머무르고 싶어지고, 그만큼 이것이 꿈이라는 것만이 분명해졌다.


"넌 항상 그러더라? 어차피 끝이 있으면 뭐. 그래서 어떡할 건데. 통제할 수 없으면 그냥 받아들여. 그냥 네가 느끼는 대로 살아. 네 구실은 그냥 너야.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하고,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에도 오로지 네 마음을 구실로 삼아서 해."


"나는 늘 그게 어려웠어."


"알아. 그래서 답답했고. 그래서 좋아했어. 그래도 지금을 즐기자. 어차피 내일 아침이 되면 다 잊어버리게 될 거야. 우리 늘 그랬잖아? 기가 막힌 꿈을 꾸었다고 얼른 말하려다가 기가 막히게 까먹어 버리고. 어쩌면 오늘 네가 나를 만난 건 처음이 아닐지도 모르잖아? 그때에도 이 짓을 반복 했을걸?"


그래서 나는 너를 바라보았다. 내가 늘 바라보던 너를 기억하는 건지, 기억해서 너를 바라보는 건지를 고민하다가, 그냥 이리 바라보기로 한다. 앞으로 이 순간 이후로 수없이 더 많이 바뀔 너의 머리 길이와 색깔. 그리고 또 수 없이 많이 바뀔 너의 화장법. 계절에 따라 변하는 유행과 그것에 맞춰 달라지는 옷가지들. 그러나 늘 그 자리에 있던 눈 밑의 점과, 얼굴이 가까워져 오자 내 오른눈을 바라봐야 할지 왼눈을 바라봐야 할지 알 수 없이 흔들리던 동공의 습관 같은 것들.


문득 오늘의 대화를 잊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꿈을 잊어도, 너를 잊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까.


"그러니 지금을 잊어도 좋아."


그렇게 말하고, 기억에 없던 마지막 잔을 비웠다.










4월 1일 아침 햇살. 알람 소리. 너의 기일.


나는 꿈을 잊기는커녕, 꿈속의 내가 오늘의 나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다. 그날 울렸던 불길했던 친구의 전화, 그리고 만우절 농담이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가 전해주던 네 소식. 그러나 만우절이라는 구실로도 내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전할 인간은 없다는 것을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떤 구실로도, 그 어떤 방법으로도 되찾을 수 없는 것을 그렇게 잃었던 날의 기억.


그래. 그랬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잊고 있었던 것은 잠든 나의 꿈. 그래서 나는 차라리 너와 사별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던가. 아무렴. 꿈이 아니라면 내가 그렇게 말할 리 없다. 살아서 헤어질 바에는 차라리 네가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말하기 위한 그 어떤 구실도 나는 발견할 수 있을 리 없을 테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오히려 내가 이제와 할 수 있을 그런 말. 다른 사람을 만나서 행복해도 좋으니 그냥 살아만 주기를. 그래. 나는 그리 말하는 사람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어떤 위로도 되지 못한다.


존재의 문제. 너무나 놀라웠던 그 현상. 왜 너는 없지 않고 있었는가. 나는 그 문제에 깊이 골몰해 보았으나, 온갖 신비와 기쁨 속에서 이유를 찾는 것을 언젠가부터 그만두었다.


그런 뒤에 찾아온 삶의 문제. 왜 너는 있지 않고 없어져 버렸는가. 왜 나는 너의 꿈을 꾸었던가. 나는 그 모든 것들의 구실을 알지 못하겠다. 나는 울적해진 오늘의 꿈을 구실로 하여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도 구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한 이유였다.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그런 이유. 그러나 그 이유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 어떤 구실도 아닌 그저 그리움이라는 마음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고, 그 맥주 눌어붙은 퀴퀴한 냄새나는 술집에서, 그날에도 하필 또 너를 좋아해서 그리고 그 마음을 구실로 내 마음을 말해서, 이 모든 것들이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깨달은 뒤에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모든 것들은 그저 사실이었다.


너를 보러가는 길. 우유 아이스크림을 사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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