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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Apr 10. 2019

네가 영원히 불행해지는 버튼

정신 차려보니 아침이었다. 뻑뻑한 눈을 떴다. 랜즈도 빼지 않은 채 잠에 들었던 것이다.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창문을 통해서 햇살이 들이쳤고, 그 밝은 힘에 초라해져 버린 형광등이 껌벅껌벅거리고 있었다. 안정기를 갈아야 할 때가 지나도 이미 한참 지났는데, 이렇게 밝은 아침이 찾아와 그 빛이 무색해질 때면, 그냥 불을 꺼버리는 것이다. 


머리가 깨질 듯하였고, 그 정신없는 틈을 비집고 엄청난 갈증을 자고 있는 중에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책상에 둔 식어버린 생수를 있는 대로 들이키고 나서도 술에 푹 절여진 것 같은 몸 상태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어제는 내가 지원한 기업의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하루 종일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나는 그게 비참해져서 친구들을 불러 모아 술을 마셨다. 오늘은 내가 비참한 날이니까, 술은 네가 사라. 나는 그렇게 말해 놓고는 안주는 손에도 대지 않은 채 술만 진탕 마셨다. 뭔가 하소연을 엄청나게 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드문 드문 생각나는 이미지. 내 등을 주먹으로 두드리는 친구의 모습이 상기된다. 속이 불편하지 않은 것을 보니 길바닥에 잔뜩 게워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내 몸에게 아주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쳐다보기도 싫은 싱크대에는 설거지 더미가 쌓여 있었고, 입은 들이킨 생수로도 여전히 텁텁하다. 나는 양치를 하고 가글로 입을 헹군다. 양치 한 뒤에 이 짓을 바로 하는 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어제의 내팽개쳐진 그런 하루를 어서 씻어내고 싶었다. 뜨거운 물을 틀어 놓고, 무얼 해 먹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 프라이팬의 기름을 녹여 수세미로 얼른 닦아 낸다. 이불을 개고 어지럽게 벗어 놓은 어제의 흔적들을 세탁기 안에 쳐 박아 버린다. 창문을 연다. 이제는 더 이상 예리하지 않은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목욕탕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선다. 술을 마시고 사우나에 가는 것도 좋지 않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냥 그렇게라도 나를 씻어 내고, 어제의 모든 것을 땀으로 배출하고 싶어 졌다. 나는 가끔 하루를 낭비하고 다시 정리하는 것들이 나를 지키는 것인지, 나로 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러한 일들이 오늘의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때를 강박증적으로 벗겨낸다. 자주 오는 것도 아니다. 벗겨낼 만한 것들은 우선 쌓여야 한다. 나는 쌓이기를 기다리고 그런 뒤에 그것들을 제거한다. 그때그때 옷을 걸지 못하고, 그것이 너무 널브러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야 치운다. 나는 나를 바로 잡을 줄 알지만, 그만큼 먼저 흐트러진다. 이것은 어쩌면 그저 하나의 의식 인지도 모른다. 망가지고 싶지만 너무 많이 망가져서는 안 되고, 반듯해지고 싶지만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지나치게 꼿꼿해지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인간적인 모습을 가장하고, 또 그만큼 완벽한 모습도 연기하는 삶 안에서 내가 얼마나 어떻게 완전하거나 또 불완전한 인간인지 알 수 없다.


순수했던 날들을 떠올려보고 싶은 것이다. 그냥 주말에 아버지를 따라서 능숙하지 않은 솜씨로 혼자 이태리타월을 몸에 대충 문질러 대다가, 또 당신에게 혼이 나서는 살 겉이 벗겨질 정도로 곤혹을 치르고 나서 냉탕에 몸을 던지던 그런 순간들.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습기로 가득 찬 그런 공간에서, 나는 나만의 자유를 느꼈다. 비타민 음료 하나에 기분이 좋아지던 그런 날들. 그렇게 지금은 아직 괜찮은 거라고 속으로 되뇌며 나는 다시 내일을 살 준비를 해보곤 한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데, 공원에 벚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내가 여기에서 오랫동안 자취를 한 이후로 나는 딱히 꽃놀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여기는 숨겨진 벚꽃이 만발하는 명소였다. 이곳에서 지내며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을 데려왔었다. 같은 사람들을 같은 장소에 데려왔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다. 여기는 단지 내가 조금만 걸어가면 찾을 수 있는 그런 곳이었고, 여기는 내가 누군가에게 대접하기 위해 특별히 마련해야 했던 그런 공간이 아니라, 다름 아닌 이미 나의 것이었다. 이렇게 씻고 돌아가는 길에 슈퍼에 들려 비타민 음료를 하나 사서 마시며 산책했다. 나를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을 복습해 보곤 했다. 괜찮다. 용서한다. 그리고 또 미안하다.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나는 내 쌓인 때를 밀듯, 과거를 정돈해서 또 털어 보는 것이다. 


술에 아직도 절어 있는 나에 비해 날은 너무나 화창하고 평온했다. 벚잎 하나가 팔랑팔랑 내 곁으로 떨어지려는 듯했다. 나는 그것을 건드려보고 싶었다. 내 손이 그것에 접근하는 찰나에, 갑자기 그렇게 떨어지던 그 벚잎이라는 것이 허공에 선 채로 뚝 하고 멈췄다. 


그것은 참으로 기묘한 경험이었다. 내가 그것을 건드리자, 그것은 딱 건드린 그만큼만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나는 놀라서 주위를 뒤돌아 본다. 이제는 이곳도 잘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는 그런 곳이었다. 주위가 적막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사람들도 그 벚잎처럼 모두 죽은 듯이 멈춰 서 있었다. 풍선을 함께 들고 팔짱을 낀 커플들도, 유모차를 밀고 가는 저 여자도, 무언가를 정신없이 쪼아 먹던 비둘기도, 천천히 움직이던 구름도 모두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됐어?>


나는 이제 내가 완전히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다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제 진탕 처먹었다고 벌써 잊은 거야? 네가 나를 불렀잖아.>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그것보다 이 상황 자체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사람들은 어떻게 멈춘 것이며, 또 이 목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지. 나는 우선 이 상황을 실험해보고 싶었다. 시간이 멈춘다는 것이 무엇인지 늘 상상해보곤 했다. 시간이 멈추는데 왜 내 주변은 이렇게 밝은 거지? 광자도 멈춰야 하는 것이 아닌지, 공기의 운동도 멈춰서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나는 내 손에 바람을 불어 보았다. 시원했다. 그림자도 나를 따라 움직였다. 


 <재밌어? 시간이 멈춘 게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 멈춘 거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그래 내가 끼고 있던 시계의 초침은 여전히 째깍째깍 운동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물어야겠지>


그래, 적어도 이 짓을 하고 있는 어떤 존재가 있다면, 그 뜻이 있을 것이었다. 


 <어제 네가 나를 불렀잖아. 악마라도 부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거 기억 안 나?>


갑자기 생각났다. 나는 내가 취업도 안 되고 이렇게 사는 이유가 다 네 탓이라고 말했었다. 분명히 네가 어디선가 나를 저주하고 있으니, 내가 이렇게 일이 풀리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 네가 그 사람을 그렇게 원망하고서는 내게 뭐라고 말했더라?>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완전히 너를 잊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는 유치하게 행복을 빌어주겠다는 그런 개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며, 또 네가 하나도 그립지 않고, 네가 어떻게 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래서 나는 악마가 내게 찾아와 이 버튼 하나를 눌러 너를 영원히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누를 것이다.


 <그래, 그리고 내가 이제 그 버튼을 들고 네게 찾아온 거야. 네게 복수의 기회를 주는 거지.>


그때 내 안에서는 어떤 두려움보다는 수치스러움이 밀려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인 양 모두 털어 버리기 위해서 술을 진탕 마시고 마셨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려 하는 것이다. 난잡하고 어지러운 어제를 잊으려 설거지를 하고 또 청소를 한다. 죽은 피부를 밀어내고 깨끗한 그런 사람으로 행세하기 위해 몸을 뜨거운 물에 담근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것은 여전히 원망하고 집착하는 내 자신이다. 그것은 상기시키고 싶지 않았던 나 자신이고, 또 분명히 덮으려 해도 존재하는 나 자신이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내뱉은 그런 말이 이제는 책임을 요구하며 내 앞에 찾아왔던 것이다. 


 <아니, 그것은 반성이라는 것조차 아니지. 너는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면서 또 자기 자신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제거하려고 하는 거야. 하지만, 내 앞에서는 통하지 않아. 네가 한 말들을 네 스스로 수치스러워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옹호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 곤란해. 쉽게 없었던 일로 하지 말고, 또 쉽게 부끄러운 일로 치부하려 들지 않는 게 차라리 오늘 네가 이 기회를 얻게 된 데에 대한 올바른 태도일 거야. 중요한 것은 네가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가 아니라, 네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야. 너는 부주의하고 술에 취해서 그렇게 이야기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술에 취했다고 한들, 도대체 왜 그 원망이라는 것이 아직도 네 안에 있느냐 하는 거야.>


그건, 아마도 어디서 네가 이미 취업해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일까. 그래,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열등감 때문이다. 나는 아직 무엇도 되지 못한 무능한 인간이라는 생각 때문에 너를 끌어내리려고 한 거야. 


 <좋은 접근이야.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왜? 왜 하필 그 사람이지? 주변에 너를 짜증 나게 하는 인간들은 늘 많았잖아? 물론 너는 네가 좋은 인간인 양 가장하기 위해서 늘 그것을 숨겼지만 말이야. 원한다면 오늘 네가 망가뜨려버릴 수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어. 그러나 네가 하필 그 사람을 떠올렸던 그 이유 말이야.>


어쩌면, 내가 아직도 너를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야. 


 <아니, 너는 절대로 단지 그 이유로 그런 말을 했던 것이 아냐. 나는 지금 그 사람을 더 불행하게 만들어야만 했던 그 이유를 알고 또 네가 그 짓을 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온 거지, 시시 껍질 하게 철 지난 사랑이라는 것을 되새김질하려고 찾아온 게 아니거든. 천천히 생각해. 아무도 네가 고민하는 데에 너를 방해하지 않아.>


나는 이게 나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정말 시간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내가 정답을 너무 빨리 찾아내면, 이 게임도 끝이 나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이맘때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늘어났다. 나는 내심 추억이 물들어 있는 이 곳을 빼앗기는 것 같아서 싫었던 것이다. 모두가 멈춰 선 이 공간 안에서 이 곳은 다시 내 것이 되었다. 나는 작은 동산이 있는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작은 자갈이 깔려 있는 이 산책로는 벚나무로 늘어서 있다. 경사도 적당해 걷기 좋았다. 모든 것들이 멈춰 있는 지금은 마치 하나의 사진처럼, 흩날리던 모든 것들이 그대로 멈춰서 있었다. 그 끝에서는 돌아온 경로가 그대로 보이는 전망대가 하나 있다. 내가 처음 너를 이곳으로 데려왔을 때, 아직도 좋아하던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너는 내게 말했었다. 


 "있잖아 내일 비 온데. 잘 됐지"


씩 웃으며 묘하게 악마 같은 그러나 천진했던  표정을 지었던 그 모습이 나는 싫지 않았다. 너의 논리는 뚜렷했다. 


 "내일 왔으면 벚꽃들도 더 일찍 졌을 거 아니야. 그 마지막 날 우리가 여기 있는 모든 풍경을 누렸던 마지막 사람이 되는 거잖아. 그래서 나는 소풍날이 맑은 것보다, 그다음 날이 흐린 것을 알았을 때 종종 더 기뻤던 거 같아. 우리는 근래 최고의 하루를 누렸던 사람이 되는 거니까." 


그때 나는 그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내일이 맑다면, 우리는 내일 또 여기를 다시 오면 되는 거잖아. 그리고 또 그다음 날이 맑다면 다시 또 여기를 오고 또 영원히 맑다면 또 영원히 여기를 오면 되는 거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다음 날에는 무서울 정도의 폭우가 내렸다. 그렇게 봄의 길목은 그렇게 사라졌고, 우리가 다시 벚꽃을 보러 이곳을 찾는 일은 없었다.


나는 어쩌면 불안했다. 우리가 만약에 헤어진다면, 네가 내 가장 끔찍한 모습을 보고 헤어진다면, 너는 우리의 좋았던 날만을 기억하고, 그리고 이제 비가 오는 날 소풍을 멈춰야 한다고 너무 쉽게 생각할 것만 같았다. 어쩌면 우리가 헤어지고 난 나의 날이 우리가 그렇게 함께 걸었던 그 산책 끝난 날의 폭우처럼 불행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라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는 나를 떠났고, 실제로 나는 불행해졌다. 비참해지고 나를 방치하고, 술을 마시고, 무력감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화창했던 그다음 날의 폭우 같은 날들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것들 모두가 너의 바람일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어제 미리 그곳을 다녀와서 다행이야. 너는 내게 그렇게 말했고, 나는 나의 작은 방 안에서 창문을 열고 모든 것들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천둥과 번개를 지켜보았다. 처마도 지키지 못한 빗물들이 내 필 위에 떨어졌고, 사실 나는 그날도 너를 보고 싶었다. 나는 우리의 소풍 끝나는 다음 날에도 여전히 그다음 날이 맑기를 바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너의 그 앞길도 늘 화창하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러지 않았던 거잖아 맞지?>


그래, 내게 마지막으로 네게 했던 말.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 불행하고,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만 행복할게 - 그 말은 혹시 네가 지나치게 미안해할 것이라 믿었기에 했던 말이 아니라, 네가 지나치게 나를 저주할까 봐 했던 그런 측은한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만 나를 방치했고, 무너지지 않을 정도만 나를 관리했던 것이다. 힘이 들 때에는 운동을 하고, 집이 더러워지면 모든 것을 쓸고 닦았다. 그러나 먼저 힘이 들었고 또 더러워지고, 외로워지고, 그러다 그리워하고, 나는 네 맑은 날에 대한 소망을 천천히 지워갔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너를 미워하게 되었다. 미워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는 새 사실은 이제 네가 나라는 사람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까 봐, 더 이상 생각조차 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사실은 나였다. 네가 불행하기를 바라던 것은 나였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망가졌다. 나는 친구들 앞에서 자신 있게 네가 영원히 불행해지는 버튼이 있다면 그것을 누르겠다고 말했고, 나는 이제 그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 너는 지금 그 어떤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고도, 직접적으로 찬 물을 누군가의 인생에 끼얹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일. 그저 누군가의 미래를 너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거야.>


그리나 상황이 바뀌었다. 나는 내게 그런 일이 없을 줄 알고 그렇게 토로했던 것이다. 나는 문득 오기가 생겼다. 내가 술에 취해서 그렇게 소리칠 수 있던 이유가 분명히 있다면, 반대로 우리가 이별하던 날에 그다음 날도 영원히 화창하기를 바라던 그런 날들도 있었다. 거기에도 분명히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런 이유라면, 네 빈약한 자존심 때문이겠지.>


하지만, 나는 분명히 오늘 그 버튼을 누른다면, 후회할 것이 틀림없다. 


<누르지 않아도 후회할 텐데? 어제 네가 스스로를 그렇게 후회했듯이.>


그래, 하지만 후회라는 것이 이유가 되지 않는 이유는 이미 후회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사실은 나는 많은 것들을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내가 내일도 맑기를 바랐던 그런 이유를 네게 말하지 않았던 망설임과, 내가 먼저 보고 싶다고 말하며 그 비가 쏟아지던 날 오늘도 보고 싶다며 찾아가지 않았던 그 날 아침. 점점 지쳐가던 나날과,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신에 짜증을 부리고 무관심한 척 하루하루를 대신하던 그 미숙한 마음 같은 것들. 고맙다고 말하는 대신에 내가 네게 해준 것들을 생각하며 억울해하던 그 자존심들. 


내가 네 행복을 빌어주었던 이유는 사실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이기 때문에 기꺼이 술에 취해서, 정말로 내 말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나서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자신 있게 지껄인 것이다.


나는 버튼을 누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후회할지도 모른다. 비참한 나의 작은 자존심 하나를 유지하기 위해서 너보다 행복하고 멋지게 살기를 소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누르지 않기로 다짐하고 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뒤에 뒤이을 후회는 내가 다시 이 순간으로 돌아가, 그 버튼을 되누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지난날을 생각하며 너를 그리워한다는 그런 이야기이고,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그 순간에 대한 몸부림을 기꺼이 책임 저야만 할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후회하지 않으리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후회할지도 모를 그런 미래의 나를 괘념하지 않겠다는 그런 말이다. 


후회는 어느 순간엔가는 반드시 멈춰야 한다. 


나는 그냥 이 삶 안에서 잔인하지 않을 정도로 저주하고, 위선적이지 않을 정도로 행복을 빌어주는 그런 인간이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이 온건한 말조차도 언젠가 환별로 바뀌고 또 후회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나는 분명히 그런 버튼 하나를 기꺼이 누르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또 내게 속삭였다. 


<내가 이 제안을 너에게만 했다고 생각해? 그 사람은 내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생각해봤어?>


너는 그 버튼을 누를 자격이 있다. 사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네가 조금은 나를 저주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럴만한 인간이라고도 생각했고, 어쩌면 그것은 나를 조금은 더 오래 기억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 봤지, 내가 너를 더 오래 위해줬지. 내가 더 많이 사랑한 거지. 그렇지 -라고.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이미 후회가 너무 많다. 네가 눌렀다고 한들, 그리고 누르지 않았다고 한들, 어느 순간엔가 내가 알던 그런 너였다면 어쨌든 어느 방식으로든 후회할 것이고, 또 그 후회조차 잊어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 대한 사랑의 증거도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그 무엇도 증명하지 않는다. 단지 미래를 영원히 결정하는 그러한 필연적인 선택조차도 종종 우발적으로 이루어지고 내 마음은 또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으니까.


다만, 처음이자 마지막인지 모를 이 모든 순간이 멈춘 바로 이 순간. 그 누구도 나를 방해할 수 없는 그런 이 순간. 날은 너무나도 화창했고 또 불어오는 바람이 좋아서. 오늘은 그저 이 하나의 선택으로 조금은 스스로를 멋있는 사람으로 포장할 수 있어서, 그렇게 그 작고 초라한 자부심으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부유한 채 머무르는 벚잎과, 그것들을 잡으려 여기저기로 뛰어다니던 너를 바라보던 나. 그때에 모든 것들은 지금 이 멈추어버린 순간보다도 더 천천하고 아름답게 흘러갔다. 이 세상에는 마치 나와 너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 누구도 나의 눈길을 빼앗을 수 없었고, 그 무엇도 내 마음을 흔들어 놓지 못했다. 그런 순간을 겪었던 나에게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선택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남들보다 유약했던 그런 사람이었던 것뿐이다. 그조차도 눈이 뜨이지 않을 평범함을 나는 사실 싫어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고, 그 마음을 언제나 꼿꼿하게 유지할 수 있는 나이지 못했던 것뿐이다. 나는 이런 내가 나라는 것을 알았기에, 늘 철저할 수는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실감하고 있었기에, 이루어질 리 없는 푸념을 지껄여대며 속을 게워 놓았고, 또 양치를 하고 그 역겨운 것들을 지워버렸던 것이다.


<그래, 그게 네 선택이라면>


그리고, 세상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다시 살아가기 시작했고 또 사랑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천진하게 뛰어다니고, 구름은 바람에 몸을 맡겨 움직이고, 벚잎들은 다시 한번 피어나기 위해서 먼저는 열렬하게 흩날린다. 미래에 놓일 수많은 후회에도, 기꺼이 오늘은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사랑한다 말하고, 나는 기꺼이 후회했다. 그것은 결코 늘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최종 면접에 합격했다는 전화.


어쩌면 너도 내가 영원히 불행해질 것이라는 그런 버튼을 누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게 나를 여전히 사랑한다는 그런 증거일 수도 없고, 또 너는 그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술에 취한 나의 망상이었던 것 같아서, 나는 그냥 털썩 앉아서 웃어 버렸다. 철물점에 들려 안정기를 하나 사서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봄이었다. 


내일도 맑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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