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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Jul 23. 2019

영화 <앨리스 죽이기> :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희망


다큐멘터리 영화 <앨리스 죽이기>를 시사회 초대를 받고 관람했다. 조기 개봉해주는 평범한 시사회인 줄 알았으나, 기자들로 가득했고, 상영 후 간담회 자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신은미 씨는 현재 입국금지 조치가 되어 있었던 탓으로, 영상통화를 통해서 질의응답을 하게 되었다. 굉장히 이색적인 풍경이었고, 그 과정에서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내게는 굉장히 좋은 경험과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처음 내가 이 영화의 시사회를 제안받았을 때, 나는 이 영화의 관람을 망설였다. 왜냐하면 나는 대북 문제에 있어서 꽤나 뚜렷한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통일이 되어야 하고 또 그 통일이 평화 통일이기를 바란다는 점에서는 진보적인 입장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나는 북한이라는 국가를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지속적인 도발이 실질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이고, 요 근래 들어 우리와 핏대를 세우고 있는 일본조차도 그런 종류의 위험요소가 북한보다 심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그러한 위험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지언정 우리에게는 쌓여 있는 역사적인 감정들이 너무나 복잡하다. 한편으로는 이산가족으로 대변될 수 있는 민족적 차원에서의 그리움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실질적으로 한국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북한에 있다는 바로 그 측면에서 원망도 있다. 그저 과거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나는 이제 가스통을 들고 인공기를 불태우는 노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극단적인 행동은 분명히 역사적으로 있었던 피 튀기는 전쟁의 기억들과 분명히 관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북한과 남한 사이의 문제는 복잡하고, 그 복잡성이 북하는 대하는 데에 있어서 문제를 야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남한 내에서도 너무나 복잡한 갈등과 충돌을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나는 쉽사리 정치적으로 독해될 수 있고, 또 날치기 될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들은 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인 신은미 씨의 잘 알려진 북한에 대한 입장에는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주장이 종북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삼대세습을 찬양했다는 것도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만큼 그녀가 일방적으로 북한을 따뜻한 시선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러한 주장이 좋건 실건 극단적인 보수세력들에게 화자되고 왜곡되는 것은 아닌지가 우려스러웠다. 나는 우리가 북한을 입체적으로 바라봐야 하고, 또 섬세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영화를 구태여 관람했던 이유는, 그녀에게 입국금지 조치가 내려진 것이 부당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그녀가 북토크 콘서트에서 당했던 폭탄 테러 사건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끔찍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설령 다큐멘터리가 그녀의 시선을 투과한 이야기들을 보여줄 수밖에는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시선을 통해 드러난 부당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분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후에,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선 신은미 씨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분명히 얘기할 수 있는데, 그녀의 입장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목적은 그녀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데에 있지 않았다. 영화는 그녀가 자신의 생각들을 드러내면서 겪어야만 했던 아이러니한 상황과, 폭력들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신은미 씨의 어떤 사람이며 또 어떤 주장을 하고자 했던 것인지도 순수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북한에서 겪었던 경험들이 소중했고,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중했던 것이다. 그녀가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순수하게 '북한도 사람 사는 곳'이며, 그 안에서 겪었던 그녀 자신의 경험이 즐겁고 아름다웠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나는 그 안에 어떤 숨은 음모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의도의 순수성이 무조건적인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문제랄 것이 있다면, 그러한 좋은 점들만을 주목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물론이고 대한민국에도 도움이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북한 전체가 지옥불로 묘사되는 것이 틀렸다고 할지언정, 분명히 존재하는 독재 체제하에 벌어지는 인권 유린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인권 유린을 지적하는 것이 단순히 우파나 좌파 모두에게 환영받거나 배척받는 것도 아니다. 어떤 보수주의자는 그러한 유린을 지적하면서 북한이라는 나라가 최악의 국가라는 것을 보여준다면서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유린을 지적하는 것이 보수적인 목소리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어떠한 진보주의자는 그러한 유린을 지적하면서 남한에 평화롭게 흡수 통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통일은 삼대세습의 대물림을 막으면서 동시에 북한의 인민들을 구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신은미 씨의 주장이 왜 정당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주장을 하면서 언론이 그녀를 어떻게 만신창이로 만들고, 또 수많은 보수단체들이 그녀를 잡기 위해서 그녀를 위협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가장 최악이었던 것은, 미성년자에 불과했던 고등학생이 그녀에게 폭탄을 제조해 테러했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사태가 그녀의 주장을 모두 옳은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그녀의 표현의 자유가 박탈되었고,  그 사람의 의견 때문에 그 사람의 존재가 위기에 놓였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신은미 씨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명의 위기와 불안 속에서도 이겨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강해서 버틴 것이 아니라 버텨서 강한 것처럼 보였다. 이 영화는 그렇게 버텨내는 과정 속에서 그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겪고 또 고통받고 있는지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번 사안을 뒤집어서 생각해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고 했을 때 나는 과연 버텨낼 수 있을 것인가?


누군가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무조건 적인 수용만을 하면서 살아가는 허수아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누군가가 틀렸다고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입을 나의 손으로 틀어 막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순한 '표현의 자유'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 힘과 언론에 의해서 한 사람이 호도되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는 듯이 찾아와 윽박지르는 그 상황은, 단순히 자유의 부재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당연히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이 영화는 분명히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레드 콤플렉스"를 겨냥하고 있지만, 나는 사실 그것보다 더 깊은 층위를 지적해야 하고, 또 이 영화가 얼마간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존중은 한 인간에 대한 호오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이제는 식상한 말처럼 회자되지만, 볼테르가 말했던, "당신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말할 권리는 목숨 걸고 지키겠다."라는 말은 권리의 옹호도, 자유의 옹호도 아니다. 권리와 자유 모두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한 사람의 생명과 그 사람의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이 먼저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그 사람의 말이 죽을 만큼 싫어도, 그 사람을 죽이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부재와 더불어 여러 독단적인 정치적 입장들이 그녀 역시 한 명의 사람이라는 것을 망각하도록 한다.


우리가 그것을 망각하는 순간, 정권이 바뀌고 시류가 바뀔 때마다 인간들은 뻥뻥 죽어나갈 것이다. 숙청이 시작된다. 그러한 야만적인 짓을 하지 말자고 만들어 놓은 절차와 원칙들이 있다. 그러한 그러한 절차와 원칙들의 근본은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존중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다시 그 원칙들은 잊히고 있다.


마지막 GV에서 김상규 감독은 그렇게 말했다. "이 영화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보고 소통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는 이 말이 함축하는 것은 영화 속에서 어떤 정치적 방향성이나 이념을 관철시키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있어서는 안되는 일들을 바로잡고, 하나의 의견에 또 다른 의견으로 응수하며 소통하는 그러한 사회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또 상대의 주장에 대해서 천천히 나의 주장을 똑똑히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상대의 입을 틀어막고, 목을 비틀어 죽일 준비를 할 필요가 없다. 천천히 나의 의견을 개진하고, 그것에 대해서 납득이 되기 전까지는 나를 주장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한 인간에 대한 존중과 함께 엮여 나갈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소통할 수 있는 사회가 된 것이다. 나는 이를 깊게 희망한다. 


그러나, 분명히 그럴 수 없는 부분들도 있다. 어떤 것은 정말로 너무 깊게 팬 골이라 메울 수 없는 것도 있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아마도 앞으로도 북한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과격한 입장을 고수하고 또 폭력까지 불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요행이도 내가 조금 더 유연하고 섬세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태도와 그들의 의견을 구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경고를 하면서도, 그들의 의견에 대해서는 슬기롭게 분별하고 나의 생각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이 세상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만 역사가 드러냈던 참담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가장 분명하고도 시급히 쥐어야 할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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