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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하 Jul 24. 2019

영화 <박화영 박화영의 생존 전략


영화 <박화영>은 가출한 양아치들의 생태 안에서 스스로 '엄마'의 역할을 자처했던 박화영이라는 소녀의 삶을 그린다. 거기서 박화영은 가출 청소년들에게 집을 제공하고, 라면도 끓여주고, 이것저것을 챙겨준다. 그 안에서 그녀는 얼마간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또 자그마한 권력을 쥔다. 하지만 그 권력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엄마'로서의 역할을 하는 그녀에게서 여러 가지 이득을 취하고, 또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만큼만 그녀를 존중한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월권했다고 느끼는 순간 그녀를 무시하고 있는 속내를 결코 감추지 않는다. 라면을 끓여 달라고 할 때에는 애교를 부리지만, 조금이라도 잔소리를 해대며 기분을 잡치게 하면 짓밟아 버리는 것이다.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박화영의 그러한 모습들을 우리가 얼마간 감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한척하고, 또 속이 넓은 척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 베푼다. 그러나 그 이유는 나보다 강한 사람들 사이에서 적응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아무리 호쾌한척해 봤자, 그들은 나를 그들만큼의 '급'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광대 노릇을 하고, 엄마 노릇을 한다고 해도, 그뿐인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그 정도까지만 나를 인정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박화영의 전략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박화영이 스스로 '엄마'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약자의 살아남기 이면서 동시에 엄마에게 받을 수 없었던 애정을 타인들로부터 충족하기 위해서였던 것은 맞다. 나는 바로 그것이 문제이지, '엄마'가 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 전략을 제대로 된 곳에서 사용하지 못했고, 또 그 전략을 통해서 정말로 엄마가 되고자 했다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그 안에서 그녀는 자신이 왜 그러한 역할을 자처하는지, 그리고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박화영의 '엄마 되기'전략이 스스로를 파괴시킨 이유는, 자신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며,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를 타인들의 감사를 통해서 충족하려 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전후가 뒤바뀐 것이다. 엄마가 됨으로써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힘을 가진 사람만이 엄마가 될 수 있다. 여기서의 '힘'이라는 것은 권력이 아니다. 자기 자신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주체성이다. 그것이 가능할 때에야 허무함 없이 타인들에게 나의 호의를 베풀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허무함에 맞서며, 스스로를 강건하게 다지면서 타인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전략을 통해서 권력이라는 것도 쥐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소모된다.


내 통장에 잔고가 얼마큼 있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고, 나의 베풂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 수 있을 때, 비로소 올바른 의미로의 이타적 행위가 가능하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는 더 구체적인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계산하지 않고 돕는 마음은 중요하지만, 그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든 반드시 이해타산이 필요하다. 그리고 명확한 목적을 가진 이해타산은, 타인을 돕기 위해서 자신이 스스로의 그릇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결국 타인을 돕기 위해서 자신이 더 성장하고 지속 가능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엄마 되기'전략은 사실상 곳곳에서 일어난다. 대부분의 부모는 분명히 자녀를 위해서 헌신하지만, 그 헌신을 위해 우선 밥을 먹고 또 돈을 번다. 투정하고 등골을 빨아먹는 자녀들로부터 부모는 반드시 소모되지만, 자신의 소모되는 부분보다 늘 스스로의 총량을 크게 유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이 온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강한 이유는, 헌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헌신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박화영의 전략이 실패한 이유는, 자신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유지할 수 없었던 이유는 외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전략이 통할 수 없는 세계 내에서도 그 전략을 유지한 것이다. 그 안에서 상실된 자기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그 끔찍한 양아치들의 소굴 안에서 그녀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고, 또 자기 자신을 옳게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살인 죄를 뒤집어쓰고 수감된다. 그러나 '엄마'로서 할 수 있는 극단적인 헌신을 해내고 나서도 그녀의 헌신은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 모든 '엄마 노릇'이후에도 그녀가 측은해 보이는 이유는 '헌신'이라는 것 때문은 아니다. 자신을 꾸리지 못했기 때문이고, 자신의 헌신을 인정받지 못하는 구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출 청소년 중에 하나가 "엄마가 싫어서 가출했는데 어디서 엄마 노릇이야"라고 말할 때, 그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략을 최악의 장소에서 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뿌리 깊은 권력 구조'를 드러내는 하이퍼리얼리즘 영화로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느 무리에서나 권력 구조는 생겨난다. 그러나 그 우두머리가 깡패처럼 애새끼들을 패고 다니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박화영과 같은 '엄마'가 차지하기도 한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을 해내고 존중을 표할 수도 있다. 그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무리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영화가 드러낸 것은 바로 그 '자기 자리 찾기'의 전략을 극단적으로 수행하고 또 극단적으로 실패한 하나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내가 소모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강해져야 한다. 나는 내가 얼마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능력을 함양해야 한다. 나는 지금 내가 놓인 장소에서 어디까지 말할 수 있고 어디까지 베풀 수 있는가? 그것을 명명백백하게 알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헌신을 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엄마'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고, 그 뒤에 존재할 수 있는 배신과 협잡 같은 것들은 별로 위협이 될 것이 못 된다. 자신을 결론적으로 깔보는 장소로부터 떠날 것이다. 이 영화가 무서운 이유는 바로 그러한 기회가 박화영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스스로의 자존감을 찾을 기회도, 또 새로운 인간관계로 이동할만한 기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 밖에 있는 우리는, 쉽사리 그녀의 전략이 애초부터 글러먹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들은 어쨌든 엄마를 필요로 한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위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 결국 엄마도 살아남기 위해서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하고 또 그래야 한다. 그만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 사람에 대한 존중이 마련되는 그런 장소를 우리는 얼마든지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런 지속 가능한 굴레를 찾아서 우리는 세상을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친절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도 강해져야만 한다. 그것은 내가 나를 알고 또 사용할 수 있다는 그런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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