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흑석역에서 신정역까지 거의 매일 버스를 탔다. 학교를 가고 집을 오는 길은 640번이 책임졌다. 나는 왕복 2시간의 버스에 내 미래를 바쳤다.
버스에서의 대부분의 시간을 신문을 보는 데 바쳤다. 가끔 과제 준비를 위해 교재를 읽었다. 영어를 듣고 쉐도잉하며 외웠다.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로 유명한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 ‘connecting the dots'를 알려준 잡스의 스탠포드 연설, ’Yes, we can'으로 미국인들에게 힘을 준 오바마 연설을 이 버스에서 통으로 외웠다. 정말 가끔, 너무 힘이 든다고 느껴질 땐 노래를 들었다. 그 노래들도 모두 영어나 중국어, 일본어 노래였다. 노래를 듣다가 모르는 단어가 들리면 전자사전을 펼쳤다. 창밖을 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창밖을 바라볼 시간 동안 무언가를 읽고 듣고 받아들여야 했다.
가끔 깜빡 잠이 들 때도 있었다. 서서 신문을 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다리가 풀려 버스 바닥에 그대로 쓰러진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도서관에서 잠만 자고 나온 것처럼 후회가 밀려왔다. 부끄러움보다 잠이 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화가 났다. 버스에서 잔 시간만큼 밤에 잠이 드는 시간을 줄였다. 어떻게든 버스에서의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받아야 했다. 1분 1초가 아까운 시절인데, 버스에서의 왕복 2시간은 내게 하루를 26시간으로 만들어주는 기분이었다.
신문과 교재에 고개를 파묻고 있다가 어디 즈음인지 확인하려 창밖을 볼 때가 있었다. 신길을 지날 때에 보이는 63빌딩에 내 밝은 미래를 심어 두었다. 여의도의 어느 한 언론사에서 바쁘게 일하는 나를 상상했다. 영등포 시장을 지나갈 즈음엔 ‘열심히 공부해서 저런 곳에선 일하지 말아야지’라는 건방지고 한심한 생각을 했다. 목동의 학원가에서 신호를 기다릴 땐, 플랜카드에 적힌 유명대학 입학생 이름들을 새삼 부러워했다. 나보다 어린 저들의 미래는 벌써 정해져 있겠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내려야 하는 정거장에 도착했다.
그랬다. 그 시절 나의 640번 버스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나의 미래는 내가 정하는 것이었기에, 내가 대학 시절에 해둔 것들이 커리어가 되고 능력이 되고 결국 나의 미래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 불안은 늘 열정을 껴안고 있었다. 불안은 나의 등하교 시간을 그냥 두지 않았다.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버스에서의 시간은 학교를 다니는데 있어 필수적이면서 동시에 아까운 시간이었다. 꿈에 대한 절박함과 간절함은 640번 버스를 개인 공부방으로 만들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면서도 자신을 채찍질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그래서 창밖의 꽃과 푸른 하늘과 빗소리와 영등포시장의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상인들을 보지 못하는 내가 있었다.
2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검색해 보니 640번 버스의 노선은 그대로이다. 버스의 풍경들을 철저히 무시한 줄 알았는데, 신기할 정도로 선명하게 떠오른다. 흑석역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순간, 타자마자 자리를 훑고 앉으면서 동시에 신문이나 교재를 펼치던 순간, 귀는 영어 연설을 듣고 입으로는 따라 하며 눈으로는 창밖 횡단 보도의 걸음이 느린 할머니를 보던 순간, 빗방울이 창문에 맺혀 흘러내리는 걸 보며 몇 년 후 나의 모습을 상상하던 순간, 그 상상처럼 되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 커질수록 스스로를 옥죄었던 모든 시간이 무의식에서 앞다투어 튀어나온다. 내 무의식의 방대함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질 정도로 무수한 기억들이 선명한 컬러를 그대로 간직한 채 튀어나온다. 나의 20대 초반, 커다란 열정과 그만큼 커다란 불안을 함께 태운 버스였다. 그래서인지 버스는 늘 만차인 기분이었고 외로울 새가 없었다.
버스에서 불안을 밟고 흔들거리며 서 있던 내가 그리던 미래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는 지금을 살고 있다. 그때와 같은 불안은 없지만, 그때의 불안이 품었던 열정이 그립다. 그 열정으로 뜨겁던 나의 20대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