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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Jun 24. 2021

20대는 신림, 30대는 지동시장

내가 발디딘 곳을 사랑하는 법



  "아, 그냥 나가면 돼요!"


  왜 짜증을 내고 난리야, 좋게 말해줘도 되겠구만. 뒤 아줌마에게 떠밀리듯이 개찰구를 통과했다. 이게 아닌데, 분명히 노란 지하철표가 '까꿍'하고 얼굴을 내밀면 내가 쏙 뽑아내야 하는데. 하아, 내 첫 지하철 표였는데. 지하철역에서 표를 사고 오는 내내 만지작거렸던 표인데. 지하철 사람들한테 '이거 내 지하철 표예요, 보세요'하며 소심하게 흔들어 보이기도 했던 표인데. 이름이랑 날짜 써두고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었는데, 저 망할 지하철 개찰구 놈이 내 표를 잡아먹어버리고는 도저히 내놓지를 않는다.

개찰구에 잡아먹힌 불쌍한 지하철표

  

  집에 와서 분한 마음을 씩씩거리며 이야기했더니, 엄마가 한껏 웃고는 말한다.

  "야, 그거 환승할 때는 까꿍 하는데, 도착역에서는 안 나와. 니는 서울 이사온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그것도 아직 몰랐나."

  지하철은 내가 목적지에 도착한 걸 어떻게 아는 걸까. 개찰구 놈은 내 표의 속마음을 어떻게 알았기에 환승역에선 표를 토해내고 도착역에선 잡아먹는 건가. 갑자기 모든 지하철역과 지하철과 개찰구가 명석한 두뇌와 밝은 눈을 갖고 내 모든 행선지를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다.

지켜 보고 있다


  20살이 넘어 이사 온 서울은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내 앞길을 막아서고 발목을 잡는 거대한 도시. 낮에는 빌딩들이 햇빛을 받아 서슬 퍼런 혀를 드러내며 내 꿈을 핥았고, 밤이면 검은 한강을 앞세워 꿈의 바닥부터 들어차던, 무겁고 차가운 도시였다.  







  20살은 내게 있어 축제 같은 해였다. 봄에는 캠퍼스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했고 여름은 시청에서 붉은 물결과 함께 했다. 가을이 되자 여의도에서 '불꽃축제'를 한단다. 와, 서울 서울 서울. 20살은 불꽃놀이지, 불꽃놀이하면 20살이지.

  친하게 지내던 전라도 친구와 들뜨는 마음으로 여의도로 향했다. 중학교 때 '슈퍼선데이' 녹화 구경으로 여의도를 아니 정확하게는 KBS를 디뎌본 이후 처음이었다. 오후 5시 해가 떠있는데도 이쪽 한강 저쪽 한강 모두 자리가 없었다. 와, 서울 서울 서울. 내년엔 좀 더 일찍 오자. 야, 내년엔 남자랑 와야지 왜 너랑 또 와. 그래 그럼 남자 하나씩 끼고 오자,라고 친구와 실없이 떠들어대며 구석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조금씩 어두워지고 강바람이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다들 김밥을 꺼내먹고 빵을 꺼내먹고 담요를 꺼내었으나, 홀몸 말고 챙겨 온 게 없는 강원도와 전라도 촌년들은 서로의 온기로 겨우 버텼다. 어둑어둑해진 여의도 하늘이 '그렇게도 준비 없이 어찌 서울에서 버티려 하느냐'라고 꾸짖는 것 같았다.

  한 시간여의 불꽃축제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불꽃이 팡 터지더니 하늘에 '2002'가 새겨졌다. 용이 나타나고 축구공 모양이 생겨났다. 우와, 우와 하다가 화약 연기에 켈록거렸다. 눈이 따가웠으나 그저 좋았다. 20살에 서울에서 불꽃 구경도 하고, '이만하면 출세했다' 이런 생각에 더 아름다운 밤이었다.

출처 서울관광


  이듬 해는 일찌감치 가서 자리 잡았다. 요깃거리와 두툼한 담요를 챙겼다. 야, 왜 또 너랑 왔냐, 인생 꼬였어.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 제발 내년엔 만나지 말아요,라고 친구와 투탁거렸다. 우리 옆자리 커플이 빈 손으로 왔다. '촌것들, 저녁에 고생하겠네' 싶었으나, 불꽃을 앞에 두고 서로 껴안고 있어서 '저런 고생은 돈 주고 사서라도 하겠다' 싶었다.

  그다음 해 불꽃축제 전날, 목동 친척 언니 집에 놀러를 갔다. 내일 불꽃축제 가야 해서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야 한다고 했더니, 서울에서 나고 자라다시피 한 친척 언니가 묻는다.

  "그런 데 왜 가?"

  "언니 안 가 봤어? 진짜 예뻐. 서울 사는 데 그런 것도 안 가보고 뭐했어."


"야, 진짜 서울 사람들은 그런 데 안 가."



  뒤에서 해머가 세게 친 것 같았다. 얼마나 큰 해머인지 뒤돌아보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진짜 서울 사람'. 나는 강원도 깡촌에서 20년 가까이 살다가 서울 이사온지 3년 차인, 가짜 서울 사람이었다. 몸은 서울에 있지만, 어딜 가서 입만 열면 '어디 사투리지, 경상도는 아닌데' 이런 소리를 들었다. 힘들다고 느껴지는 날이면 태백의 높은 산들과 청량한 바람과 시도 때도 없이 내 방으로 들어오던 청설모가 그리워졌었다. 영혼은 태백에 두고 있으면서, 서울 사람이라고 으스대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세 번째 불꽃축제는 사실, 별 기억이 없다. 모든 게 우스워 보였고 하찮아 보였다. 옆에 남자가 없는 건 일찌감치 문제가 되지 못했다. 여의도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촌놈 촌년 같아 보였다. 가짜 서울 사람들이나 이런 데 오는 거지. 그 것이 마지막 불꽃축제였다.

  마침 나의 대학이 한강 가까이에 있었다. 불꽃축제날은 대부분 기말고사 기간 중이었는데, 도서관에서 불꽃이 터지는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징글징글한 불꽃축제, 촌 것들만 바글바글하겠지, 라며 여의도에 모인 사람들과 과거의 나를 동시에 비웃곤 했다.



 




  진짜 서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하철 노선도를 폈다. 서울의 구석구석을 알면 서울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유치한 생각으로 노선도를 씹어먹기 시작했다. 서울의 변방과 환승역들은 다 가봐야 했다. 그러면 진짜 서울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시간만 나면 지하철을 타고 서울 여행을 다녔다. '김포공항'이었지만 행정구역상 서울이었던 것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그 긴 5호선이 다 서울권역 이내라는 것도 대단하게 느껴졌고, 한강 밑으로 달린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당고개까지 가서 보니 어쩐지 서울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이도를 가 봐야 하나 했는데, 오이도는 시흥이란다. 서울 지하철이라고 다 서울인 건 아니구나. 그래서 오이도는 안 갔다.

뭔가 많이 허한, 99년 지하철 노선도


  신촌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 친구를 보러 갈 때마다 신촌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늘 두리번거렸고 헤맸다. 기자 스터디를 하러 뻔질나게 혜화를 들락거렸으나, '민들레영토'로 가는 길에서 정작 민들레는 보지 못했다. 그 시절 내 눈은 오로지 신문만 보고 있었다. 어쩌다 친구들과 여의도에서 캔맥주라도 꺾으면 그땐 진짜 '진짜 서울 사람'이 된 것만 같은 설익은 낭만도 있었다. 여의도와 잠원과 잠실의 한강은, 폭도 색도 배경도 모두 달랐다. 한강은 달라도 여의도와 석촌호수의 벚꽃은 똑같이 아름다웠다. 조금씩 진짜 서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진짜 서울 사람 되기 프로젝트의 절정은, 음식이었다. 작은 수첩에 꼭 가야 하는 음식점들을 적어 두었다. '신당동 떡볶이', '통인시장 기름떡볶이', '마장동 육회', '공덕 족발', '회기동 파전', '신림동 백순대' 정도가 기억이 난다. 하나하나 X표를 치며 방문했다.

  신당동 떡볶이는, 기대가 너무 컸다. 학교 앞 즉석떡볶이가 더 맛있었다. 통인시장 기름떡볶이는 괜찮았다. 친구와 야구를 보다가 소리 지르는 바람에 몇 개 못 먹고 엎었더니 사장님이 좀 더 주셨던 기억이 맛보다 먼저 떠오른다. 육회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마장동은 따로 가지 않았다. 공덕 족발은 맛있었으나, 개인적으론 양재 족발이 더 좋았다. 기름기가 많아 더 고소하다고 해야 하나. 회기동에 있는 학교에서 기자 스터디를 하는 날은 늘 막차를 탔다. 회기동 파전은 기가 막혔다. 같은 꿈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파전만큼 좋았다. 그 옆에 막걸리의 뽀얀 색이, 흔들리는 주황 조명을 받아 짝사랑 비슷한 색으로 물들던 시절이었다.

  문제는 신림동 순대볶음이었다. 백순대래, 우와. 순대를 어떻게 하얗게 볶지. 먹을만해, 라며 나를 끌고 간 친구는 고속터미널에서 나고 자란 아이였다. 혈액형이 'S(서울)형'이라고 해도 될 만큼 뼈속까지 서울 아이였다. 다행히 그 친구와 함께 가서 먹는 방법을 따로 공부해갈 필요는 없었다.

  음. 맛이 없진 않아. 괜찮은 것도 같아. 나쁘지 않아. 순대는 늘 진리지.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이게 서울의 맛인가 싶었다. 맛이 없지 않은데, 뭔가 맹숭맹숭하다. 그래도 '좋아 좋아'를 주술처럼 내뱉으며 먹어댔다. 나에게도 주문이 필요한 때였다. 이걸 먹고 나면 진짜 서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주문.

  그 후로도 자주 신림동 순대타운을 들렀다. 지방에서 친구들이 올 때마다 데리고 갔다. '서울에서만 먹을 수 있는 거야'라며 거들먹거렸다. 저렴하고 부담 없고 서울 사람이라고 우쭐대기 딱 좋은 음식이었다.






  이제 진짜 서울 사람이 된 건가, 하고 보니 10년이 지나 있었다. 이제 겨우 서울 사람이 된 것 같은데, 결혼을 앞세워 서울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서울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목동'하면 즐비한 학원가와 믿기지 않는 집값을 자랑하는 동네였으나, 내가 결혼 뒤에 숨어 벗어난 곳은 목동 옆의 '신정'이었다. 사람들이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양심이 찔려 피가 나도 모른 척하고 '목동이요'라고 뻔뻔하게 대답했다. 어두운 하늘부터 떠오르는 신정동, 그 하늘 아래 가난의 표피를 뒤집어쓴 옥탑방에 부모를 두고 도망처럼 빠져나왔다. 그 죄목인 탓으로, 나는 결혼 후 정착하지 못하고 경기도를 전전하기 시작했다.


  경기도를 배회한 지도 10년이 다 되어간다. 20년을 강원도 산그늘에 보호받으며 자랐다가 10년을 서울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가는 곳마다 서울의 얼굴인지 청춘의 몸뚱인지 모를 것들이 가로막는 기분이 들었다. 서울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불친절한 징검다리, 서울을 건너왔다. 경기도의 동서남북을 여행하듯 지내는 중에 다시 순대볶음을 만난 건, 셋째 임신 중이었다.





"신림동 순대도 먹어 봤는데 나는 이게 더 좋아. 이게 진짜 순대볶음이지.
순대볶음은 수원이 최고야."


  친구의 말이 끝나기 전에, 탱글탱글 싸구려 순대를 입에 넣었다. 그렇지, 나도 그래, 이게 진짜 순대볶음이네. 수원에서 오래 산 친구는 고등학교 때 시험이 끝날 때마다 친구들과 왔다고 한다. 친구의 고교 시절이 스며있는 공간에서, 30대의 후반을 살고 있는 우리는 순대와 쫄면과 우동과 라면 사리를 세월처럼 휘휘 저었다.


  그렇게나 서울 사람이 되고 싶었던 20대의 노력이 우스운 모양을 하고 떠올랐다. 배신하고 싶었던 강원도의 산과 바람도 떠올랐다. 그 세월이 축적된 지금의 몸이 먹는 게 수원 지동시장 순대볶음이라는 사실에 괜히 눈가가 시큰해졌다. 내가 디뎌온 모든 땅이 내뿜는 문화와 먹거리에 왜 그리 열심히 순위와 점수를 매기고 등수를 매긴 건지, 유치함만큼은 내가 1등이었다. 내가 어느 지역에 속해있든 그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좀 더 큰 이름에 속하고 싶어서 쓸데없이 아등바등거렸다.

  친구는 수원이 짱이라는데, 나는 왜 '강원도가 짱이야'라고 말할 것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왜 '신정동이 최고야'라고 할 그 무엇도 생각이 나지 않는단 말인가. 그제야 내 유년의 물닭갈비가 떠올랐고, 신정시장의 부추 가득 순댓국이 떠올랐다. 진짜 강원도 출신, 진짜 서울 사람이 되는 게 어떤 건지 경기도민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는 게 우습고 다행스러웠다.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깨달음이 하필 순대볶음 앞이어서 다행스러웠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이 방황 같은 여행도 끝이 날 것이다. 소위 '정착'을 하게 될 텐데, 가족과 이런저런 시나리오만 쓰고 있을 뿐 명확한 답은 없다. 서울일 수도 있고 지방일 수도 있다. 나와 남편은 서울 사람이지만, 서울에 크게 연연하지는 않는다.

  이곳저곳에서 살아 보니, 모든 곳이 살기 좋은 곳이다. 가는 곳마다 역사적 인물이 팔을 올려 영원을 받들며 서 있고, 동물들이 주인공인 전설이 산기슭마다 누워 있다. 지나온 곳을 떠올리다 보면, '남양주 그 국숫집', '평택 그 보리비빔밥', '광명 두루치기'가 빠지지 않는다. 맛집은 늘 추억과 한 편이다.  

  지명이나 지역과 관계없이 내가 삶의 터전으로 삼는 곳을 사랑하는 방법을 희미하게라도 알아차린 것 같다. 이제는 어딜 간다 해도 '진짜 서울 사람'이 되고 싶어 안달하던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진짜 그곳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게 된 까닭이다. 강원도의 바람을 품고 서울 신림동 전깃줄을 떠올리며 경기 남북부의 맛집 리스트를 내장시킨 채로 발 디딘 곳을 살면 된다. 그 모든 추억과 시간과 문화의 조각이 뭉쳐진 존재가 바로 나이다. 내가 사는 곳으로 나를 대표할 수 없듯, 내 생의 과정을 품은 지역들도 나의 일부가 되어 이따금씩 추억의 문을 두드릴 뿐이다.



  지동시장 순대볶음은 자주 생각나고 그래서 자주 간다. 20대엔 신림에서, 30대엔 지동시장에서 순대를 삼키며 살아왔다. 내 앞에 펼쳐질 40대의 순대는 어디가 좋을까, 내심 기대가 된다. 어디여도 좋다. 순대는 늘 진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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