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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Jun 22. 2021

불혹 아니고 세 혹

흔들리며 쓴다

  남편의 목소리는 남자치고 하이톤이다. 노래로 치면 서태지나 조관우 쪽이다. 연애 때부터 매우 안타깝고 아쉬운 것이 이것이었다. 나는 중저음의 굵은 남자 목소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대학 동기 녀석들도 별생각 없다가 어쩌다 전화통화를 할 일이 있으면 깜짝 놀라곤 한다. '여보세요' 한 마디에, 이 녀석 목소리가 이리도 매력적이었단 말인가, 싶어 혼자 심장을 부여잡고 통화를 겨우 마치곤 했다.

  남편의 목소리가 내가 좋아하는 중저음 톤이라면 죽을 때까지 설레는 마음으로 전화를 하고 받을 텐데, 애석하게도 그런 적이 정말 단 한순간도 없다. 아쉽고도 아쉬워서 폴 킴으로 귀에 윤활유를 바르고 손태진으로 귀에 꿀을 바르며 지낸다. 폴 킴이 '커피 한잔할래요'(커피 아니고 커f휘) 하면, 1일1커피 원칙이고 카페인이고 뭐고 그냥 커피 다섯 잔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세다. 아메리카노를 먹지 않지만 폴 킴이면 에스프레소도 원샷할 수 있다. 그런 목소리를 앞에 두고 뭔들 못하겠는가. 태어나 노래 불러줘서 고맙다고 이어폰을 쓰담쓰담 곤 한다.

  귓가에 아직 폴 킴의 속삭임이 남아있어 행복한 가운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 택배 아저씨가 집에 계시냐고 묻는데, 헉, 이 목소리는! 베이스 바리톤을 하실 분이 왜 택배를 하고 계세요. 또 심장이 선덕선덕 한다. 택배 전화 너머 목소리에 훅훅 혹하는, 내 나이 곧 마흔(不惑)이다.








  공자(孔子)는 마흔에 세상일에 판단이 흐려지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공자에겐 죄송하지만 그에게만 해당되는 말인 것 같다. 공자 정도 성인이어야 마흔에 미혹되지 않지, 사실 마흔은 미혹되기 최적의 조건을 갖춘 나이이다. 세상을 살아와 봐도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고 아니 모르는 건 오히려 더 많아지는 것만 같다. 상처 받을 만큼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돌아서니 또 상처 받을 일들이 좌우 앞뒤 상하 가리지 않고 즐비하다.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20대나 30대 초중반처럼 아끼고 고민하는 때는 아니다. 살 수 있어서, 먹을 수 있어서 더욱 혹한다. 이렇게까지나 혹한다고? 하는 와중에 홈쇼핑의 원피스는 예뻐 보이기만 한다. 하필 오늘까지고 하필 파격 세일 중이고 하필 매진 임박이다!


내가 요즘 혹하는 것이라... 폴 킴과 손태진 말고, 매운 음식이다. 매운 음식에는 평생 유혹에 시달려 오긴 했지만 요즘은 유독 더하다. 불닭 정도 되어야 매운맛이지, 스트레스받는 날엔 신라면에 청양고추 두 개 받고 후추 더, 를 외치며 20대를 보냈다. 남편과 지내면서 진라면 순한 맛에 순하게 길들여지다가, 주말부부 하며 내 안의 매운 본능이 다시 깨어난 것이다. 특히 요즘 운동하느라 먹는 양을 조절하고 있는데, 어쩌다 골라 먹는다는 게 다 '고추 필수 포함' 음식들이다. 이게 아니면 넘어가지를 않는다. 시댁에서 입맛이 없어 대충 먹고 말았는데, 고추장아찌를 꺼내 주신 순간 두 공기를 그것만으로 먹어치웠다. 이 정도면 혹하는 걸 넘어서서 독이 되는 수준이지만, 아직까지 별 탈 없었다고 정신 승리하며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우유를 원샷하곤 한다. 그야말로 '혹독'한 속사정인 것이다.  


   이런 것들을 제쳐두고 가장 혹하는 것은, 역시나 '문장'과 '글'과 '글 쓰는 이들'이다. 글이 멋져 보이도록, 가난한 지적 허영도 어쨌든 '지적'인 것 아니냐며 글의 중간중간 멋들어진 아포리즘을 발라두고 싶은데 꽤 많이 긁어모아둔 명문들은 결혼하고 신혼집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야 급하게라도 다시 문장 수집을 나서볼까, 하면 문학의 벌판은 너무나도 넓어서 벌써부터 지친다.

   글은 어떠한가. 좋은 글, 배우고 싶은 글을 필타하다 보면 한숨이 끊이지를 않는다. 이렇게나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심상은 도대체 어떨까, 하다가 '에라이, 글은 이런 사람들이나 쓰는 거지'하며 돌아누워버린다. 누워서 기껏 본다는 게 브런치이다. 시를 쓰는 이들을 보며 시샘을 팍팍 내다가 머리에서 열도 팍팍 나는 기분이다. 청량한 바람이 부는 데 나혼자 덥다. 브런치 글이나 쓰는 주제 '절필'을 떠올려 본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나 노트북을 두드리는 것이다. 절필하면 누구보다 내가 절단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글 쓰는 이들은 어떻고. 글은 믿어도 사람은 믿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글 쓰시는 분에게 '글이 곧 사람인데요'라고 하려다, 나를 한 번 돌아보고는 알량한 알은체를 영원 속으로 던져 버렸다. 내 글이 곧 나인가. 내 글은 나의 일부분이다. 속이거나 기만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를 다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다. 여전히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문드러지고 가장 추악스러운 부분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이런저런 부분들을 어떻게든 글로 보이고 있다. 글이 곧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의 부분으로서 글이 될 수는 있다. 그런 연유로 글은 그 자체로 핍진하나 사람은 그럴 수 없다.

   이를 알려준 분 역시, 글을 쓰는 분이신 것이다. 눈물이 그렁그렁하시는 분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면 이 정도는 순수해야지, 라는 생각이 매번 들게 하는 분이다. 매일 꾸준히 쓰고 매일 꾸준히 퇴고하시는 분, 글을 다듬으며 인생을 다듬는 분, 글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는 분, 글을 쓰며 매일 괜찮아지신다는 분, 어느 누구도 매력 없는 분이 없다. 글 쓰는 이들은 글 쓰는 행위와 마음 그 자체로 아름답다. 혹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것들에 혹하느라 매일 흔들린다. 혈압측정기를 집에 들여놓아야 할 것만 같다. 심장이 자꾸 빨리 뛰는데, 이게 마흔이라 그런 건가 마흔 주위의 유혹 덩어리들에 끊임없이 미혹되느라 그런 건가 헷갈리는 것이다. 다행히, 나만 이런 건 아닌 것 같다. '마흔을 앓다가 나를 알았다'라는 책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소개해주신 분이 '마흔 앓이 백신 책'이라고 했다. 이 정도면 마흔에는 일단 앓고 가야 한다는 소리다. 영혼의 나이와 몸의 나이의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하는데, 그걸 내가 알아차리게 되는 나이. 그래서 여기저기 쑤시고 영혼의 구석구석에도 찬바람이 들어오는, 그걸 '앓는다'라고 표현해야 하는 나이. 그게 어떤 식이든 '마흔'이라는 인생의 기점이 그런 위치인 듯하다.


   뭐 어떠한가. 앓아눕고 흔들리고 떨리고 미혹되면, 맘껏 앓고 흔들리고 떨리고 미혹되면 된다. 마흔에 그러지 말라고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지 말란 법도 없다. 그저 내가, 마흔을 지나치는 모든 이들이 '어른'이라는 애매한 단어에 묶이느라 어설프게 꼿꼿함을 자처한 것일 뿐이다. 마흔이야말로 내가 스스로 맘껏 흔들려도 되는 나이인 것만 같다. 지금까지는 바깥의 바람에 이리 흔들리고 저리 날렸다면 이제 내 안의 바람을 불러일으켜 흔들릴 수 있는, 흔들려도 되는 나이인 것만 같다.

   특히 문장과 글과 글 쓰는 이들이라면, 맘껏 유혹당하고 미혹되고 싶다. 헤어 나올 생각도 않은 채, 그 안에서 골골대고 말라비틀어지고 싶다. 말라비틀어진 손으로 글을 쓰면 그건 그것대로 황홀할 것이다. 어느 브런치 작가님이 그랬다, 불혹은 '불같이 혹하는 나이'라고. 마음속 왼손 오른손이 박수를 짝짝 쳤다. 바로 그거지. 문장과 글과 쓰는 이들을 영혼의 장작 삼아 본격적으로 불붙여 볼 나이, 불혹이다.  








   나의 불혹은 좀 무거울 것만 같다. 불혹 어쩌고 어디 가서 말이라도 하려 하면, 나한테 달린 혹 세 개를 달고 가야 한다. 그나마 젤 큰 혹은 내 나이 마흔에 학교를 간다. 가장 작은 혹은 기저귀도 안 뗐다. 어디라도 나가려하면 세 혹을 주렁주렁 달고 다녀야 한다. 불혹 때문에 흔들리고 싶어도 세 혹이 들러붙어 바짓가랑이를 잡는 바람에 흔들리지도 못하겠다. 나는 세차게 흔들릴 것인데, 이 아이들이 나의 중심에서 지켜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훗날 혹들이 커서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면 그때 본격적으로 흔들려 볼까. 하늘의 명을 아는 나이(知天命)와 귀가 순해져 모든 말을 걸림 없이 들을 수 있는 나이(耳順)에 홀로 하염없이 흔들리는 꼴을 생각하니 좀 우습기도 하다.(역시 공자의 성인 됨에 그저 놀라고 놀랄 뿐이다)

   하긴, 요즘 60은 가장 힙한 나이라고 하지 않던가. 120까지 살고 싶은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따지고 보면 60은 인생 절반인 셈이다. 마흔이건 예순이건 흔들리면 그저 흔들리면 된다. 인생은 단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는 때가 없다. 그 흔들림과 흐름 안에서 나를 맡기고 나름의 의미를 찾아나가면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흔들림의 세기와 속도에 넘어지고 나뒹굴고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런 나날을 꾹꾹 밟고 가다 보면, 어느덧 뜻하는 대로 행해도 어긋나지 않는(從心) 성품을 지닌 나이에 달해있지 않을까.






   폴 킴을 귀에 꽂고 청양고추 비빔냉면 먹으며 읽은 두 글에 얼굴이 빨개지도록 미혹되었다가, 글이 동참하라며 흔드는 바람에 못 이긴 체 하고 썼다. 나의 불혹을 기다리는 마음을 보태며.


https://brunch.co.kr/@hearthee/70 

 https://brunch.co.kr/@andsomeday/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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