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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Jun 18. 2021

키움의 바탕

사랑

  나는 내 손에 마르지 않는 초록의 가루가 묻어난다고 믿었다. 그리고 진짜 그러했다. 모든 죽어가는 식물들은 나에게로 오면 하나같이 제각각의 초록을 드러냈다. 생기를 내뿜으며, 언제 그렇게 죽어갔느냐는 듯이 살아났다. 나는 살리는 데에, 키우는 데에 소질이 있었다. 적어도 화분과 식물에 대해서만은 그랬다.

  

  화분을 들여다보고 식물을 키우는 것이 좋았다. 그들은 내가 들여다보는 만큼 자랐다. 하루를 들여다보면 하루만큼의 잎이 났다. 깜빡하고 하루 잊으면 그 전과 같은 모습으로 나의 눈길을 기다렸다. 어제는 바빴어, 미안해,라고 쓰다듬으면 톡 튀어나온 연둣빛을 보이며 사과의 마음을 받아주었다. 그러면 나는 그 연두가 고마워서 다시 물을 주었다. 잎이 크고 벌어지는 모습을 진심을 다해 관찰하였다. 식물을 키우고 화분을 가꾸는 일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식물을 키우는 데에 타고난 사람이라고 믿었다.

  고등학생 시절 집의 모든 화분을 관리했다. 대학생이 되어 기숙사에 가면서 새로운 화분을 두 개 샀다. 1년을 푸르게 잘 키웠는데, 기숙사 생활을 마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룸메이트에게 넘겼다. 다른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도 마찬가지로 화분은 함께 했다. 창밖의 풍경도 아름다웠으나, 내 창가의 두 화분이 세상 어느 초록보다 아름답다고 여기며 아꼈다. 아끼는 만큼 화분은 초록을 내보이며 내 마음에 화답했다.

  신혼이 절정이었다. 7개의 화분을 사서 신혼집에 두었다. 내 신혼의 가장 큰 즐거움은 그들을 잘 키우는 것이었다. 내 손에서 샘솟는 초록 가루는 역시나 효과가 좋았다. 너무나도 잘 자라서, 좁은 신혼집을 초록으로 가득 채우는 건 아닐까 두려워질 정도였다. 그 무렵 첫째를 임신했고 이사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화분을 처분해야 했다.





  만 6년을 가득 육아로 채웠다. 나는 점점 비어가면서 그 자리에 아이들이 자라났다. 나를 내어준 자리에 아이들이 들어차 꽉 찼는데도 어쩐지 헛헛한 마음도 함께 자랐다. ‘허무’까지는 아니었으나, 말 못 할 공허가 마음 한편 자리를 넓혀왔다. ‘엄마’만 키우고 ‘나’를 돌아보지 못한 탓이었다.

  아이 셋을 연달아 낳아 키우고 막내까지 어린이집 등원하게 된 요즘, 다시 식물을 키우게 되었다. 마음먹고 키우는 건 아닌데, 때마침 화분 선물이 들어왔다. 화분은 자신이 있으니, 별생각 없이 물을 주고 때맞춰 햇빛을 보게 하고 바람이 통하는 곳에 놓아주었다. 분무된 물을 좋아한다고 해서 자주 분무기도 뿌려 주었다.

  어찌 된 일인지 초록은커녕 갈색이 점점 커지고 있다. 아무리 해도 자라지 못하고 오히려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다른 화분을 더 선물 받았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라기는커녕 내게 올 때의 싱그러움을 잃어가고 있다. 결국 뒤늦게 온 녀석들은 버릴 수밖에 없었다.  

  영문을 알지 못한 채 마음만 쓰이던 어느 날, 아이들을 씻기고 닦아 주다가 무심코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아, 깨달음이 오른쪽 머리를 탁 하고 강하게 내리쳤다. 화분이 조용히 죽어간 이유. 나의 ‘키우는’ 마음은 한결같이 아이들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를 키우고 자라게 하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야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나는 세 아이를 돌보는 데에만 마음을 다하고, 화분은 그저 매뉴얼 대로만 신경을 썼다.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주고, 햇빛은 자주, 가끔 바람이 드는 곳에. 이 지시만 따랐을 뿐, 그들의 초록이 어느 방향을 향하는지, 어제보다는 얼마나 자랐는지, 새로운 잎이 어디서 어떻게 나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무관심했다. 나의 무관심에 보답하듯 그들은 갈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밥만 주고 옷만 입히고 씻기기만 하면 그것은 진정한 양육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과 정성이 드러나야지만 아이들은 그 사랑을 토대로 올바르게 자랄 수 있다. 식물 역시 다르지 않았다.


  모든 생명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오는 '사랑의 관심'을 알아차린다. 밥을 못 먹으면 야위는 것처럼, 사랑을 받지 못하면 영혼 역시 마를 수밖에 없다. 나의 화분들이 조금씩 죽어간 이유였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건조한 수분이 아니라, 그들의 잎에 스며있는 '생명'을 적실 촉촉함이었다. 이 간단한 진리를 깨닫는 데 나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은 물을 주면서, 조금 쓰다듬어 주었다. 물 듬뿍 빨아들이고 좀 더 푸르른 빛을 내어 보렴, 너의 초록을 맘껏 보여줘, 기다리고 있을게, 너의 성장. 나의 진심이 부디 가닿았길 바란다.






  글을 일단락해 두고 난 후 밤에 보니 식물이 연약한, 하지만 꼿꼿한 얼굴을 드러내었다. 나의 쓰다듬는 손길에 응답한 것이다.

 

  이렇게나 정직하고 진솔한 생명을, 나는 그동안 텅 빈 마음으로 대해 왔다. 내일은 오전에 분갈이를 해주러 나갈 것이다. 사랑이 잇닿은 것을 서로가 느꼈다면 주저할 것이 없다. 주저하는 순간마저 그저 아쉬울 뿐이다.



 




  아이들과 화분 하나만 신경을 쓰고 싶은데, 새로운 난감함이 옆구리를 훅 치고 들어왔다. 어린이집에서 아이 주먹만 한 어항을 보내왔다.

  "어머니, 키우기 쉬운 구피예요. 어항만 좀 큰 거 바꾸시고 밥만 잘 주시면 돼요."

  웃으며 받아 나왔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선생님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니거든요, 무언갈 키운다는 것은요. 어항에는 잘 살펴야 겨우 보일 정도로 작은 구피 세 마리가 있었다. 불쌍한 녀석들, 왜 하필 우리 집으로 와서 수일 내 죽을 운명이 된 거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벅찼다. 더 이상 무엇인가 키우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틀을 끝방에 두고 가보지도 않았다. 청소를 하러 들어갔다가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작은 어항의 존재, 그 안에 더 작은 생명들을. 물은 어찌 된 일인지 뿌옇게 변해 있었다. 그럼에도 구피 세 마리는 살아서 작은 어항 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장 마트로 가서 내 주먹보다 큰 어항과 밥과 비타민제, 수돗물 정화제를 사 왔다. '물맞댐'을 검색하고 어항을 옮겨 주고 밥을 주었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 구피 세 마리는 조금 더 자랐다. 어항 물갈이는 두 번을 더 했고, 밥도 매일 두 번씩 주고 있다. 구피 역시 관심에 화답하고 있다. 첫째 아이는 밥을 담당하고 있고, 둘째는 '와, 물고기다' 하며 매일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해한다.

  요즘은 아이들보다 내가 구피에게서 얻는 힐링이 더 크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물멍'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작은 어항이지만 그 안에서 헤엄치며 작은 생(生)을 맘껏 누리는 그들을 보노라면, 일상의 헛된 수고들에 그저 헛헛한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크기 순으로 구피, 팔피, 칠피. 관심 듬뿍 받으며 자라나는 아이들

  

   늘 그렇듯, 진리는 간단하다. 사랑과 진심 어린 보살핌이면 모든 것은 살아날 수 있다. 살아갈 수 있다. 생의 때론 좁고 때론 넓은 길을 걸어갈 힘을 얻을 수 있다. 그 바탕은 역시나, 사랑이다.



Caring created resilience.

보살핌은 회복력을 만들어냅니다.

Kelly McGonigal, 'How to make stress your friend', 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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