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딸아이의 질문은 당연했다. 태어나 처음 본, 길에 길게 늘어선 두꺼운 쇠. ‘그래, 맞아, 기찻길이야’, 엄마의 대답에 아이는 더 묻지 않았다. 실제 기차도 본 적이 없는 아이에게 도심 한가운데 드러누워있는, 기차가 다닌 적이 있는 길이 어떤 의미를 갖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일곱 살의 철길과 내 아이 일곱 살의 철길은 갈라져 있었다.
내 일곱 살의 아침은 철길에서 시작했다. 집에서 나와 바로 보이는 언덕길을 오르면 철길이 있었다. 철길 옆으로 폐광에서 나온 검은 자재들이 쌓여 있었다. 나의 궁금증은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한 채, 아침마다 철길 위를 걸었다.
위험한 것은 없었다, 내 기억에 그 철길로 기차가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두 팔로 중심을 잡으며 이쪽 철길의 끝까지 걸으면 저쪽 철길로 건너가 집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곤 했다. 철길의 끝에는 빨간 녹이 올라 있었다. 기차의 행로와 행방의 비밀이 묻어 있는 철길의 끝은 무던한 뭉툭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과 태어나던 순간, 그 후의 어느 날까지 기차는 이 철로로 ‘검은 황금’을 싣고 내달렸을 것이다. 검은 땅속에서 검은 얼굴을 한, 친구의 아버지들이 캐냈던 그것은 한때 내 유년의 도시와 이 나라를 먹여 살렸다. 그러나 그것은 ‘발전’이라는 흐름에 자리를 내어주면서 기차의 자취마저 사라지게 했다. 땅만큼은 아버지들의 땀과 그들이 캐낸 검은 문명을 기억하기 위해 길 위의 평행선을 지우지 않았다. 철도 위를 내달리며 석탄을 실어날랐을 기차의 운명을 간직한 철도가 내 일곱 살의 언덕에 여전히 뿌리내리고 있다.
집 근처로 돌아오면 반대 방향으로 뻗어있는 철도를 바라보았다. 그 끝이 궁금했으나 차마 가볼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무엇보다 다른 한쪽 끝마저 빨갛게 녹이 물들어 있다면 그건 조금 슬플 것 같았다. 끝내 기차를 품지 못하는 철로의 생을 마주하는 것은 일곱 살에게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 기찻길의 끝에는 녹슬지 않은 기차가 언제든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하며 서 있는 상상을 했다.
상상이 단단해질 무렵 쪼그려 앉아 기찻길에 손을 얹었다. 햇살을 받은 철로는 따뜻했다. 반들반들한 철로는 과거의 영광을 안고 있었다. 멀리 출발점에서 석탄을 가득 실은 기차가 출발하는 듯 진동이 전해졌다. 나의 상상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일곱 살 집 철로 위로 기차가 지나갈 거란 기대는 인생의 저 너머에 던져졌다. 스무 살이 넘어 도시에서 본 철로는 손을 뻗어 만질 수 없는 것이었다. 철로는 내 발보다 훨씬 아래 있었고, 그 철로 위의 기차는 나를 싣고 도시 곳곳으로 데려갔다. 나는 출발지와 도착지만 지정하면 되었다. 철로가 뻗어있는 방향과 그 위를 내달리는 기차보다, 그것에 몸을 실은 스스로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이십 대의 인생은 쉬웠다.
작은 역도 지나치지 못하는 다정함을 지녔던 기차만큼의 속도로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지나왔다. 어느덧 인생의 속도는 고속철의 그것처럼 빨라지기 시작했다. 창밖의 풍경이 스쳐 지나갈 뿐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지 못하는 나날을 보냈다.
결혼을 지나 육아라는 긴 터널을 아직 나오지는 못했지만, 조금 더 탄탄해진 인생의 행로 위에서 지금은 서행하고 있다. 아이와 함께 가려면 천천히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기차는 만화 주인공일 뿐이다. 어떤 장면에서는 기찻길 없이도 가는 기차가 있어서, 아이에게 ‘기차가 다니는 길’이라는 말은 다른 장면을 떠올려야 하는 수고로움을 더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차는 어디 있어요?”
나의 일곱 살에도, 내 아이의 일곱 살에도 기찻길만 남아 있을 뿐 기차는 어디에도 없었다. 발전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세월의 흐름이 하도 세서 육중한 기차마저 쓸어가 버렸다. 내 유년의 기차는 석탄을, 내 아이의 기차는 누군가의 추억을 품고 그렇게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는 기차가 힘들어서 쉬고 있어. 여기 잠깐 앉아 볼래?”
아이의 손을 잡고 앉아 철로를 만져 보았다. 삼십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햇살 머금은 철로는 따뜻했다. 도시 한복판, 늘어선 카페와 상점의 배경이 되어버린 철길이었지만 그것이 간직한 향수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향수의 정체는, 기차와 승객들의 중량을 짊어진 채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행선지까지 책임졌던 역사, 바로 그것이었다.
삶의 방향, 행선지. 철로 끝에서 집으로 오는 내내 기찻길을 걸으며 내 안의 기차와 함께했던 어린 나는 내 인생의 행로는 차마 정하지 못했다. 반드시 철길로만 다녀야 하는 기차와는 달리, 행로가 없었던 탓에 자유라고 착각했던 방황에 청춘의 몸을 실었다.
어린 시절의 마음속 기차가 인생을 다시 궤도 위에 올려놓은 것은, 아이와 함께 하는 순간부터였다. 삶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이 버거웠을 때 아이는 속도를 조절해 주었다. 삶의 방향과 행로를 일정하게 정해주었고 함께 나아가는 것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다. 속도가 느려지자 창밖 풍경을 감상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그 옆에는 항상 아이가 있었다. 그러했기에 아이가 기찻길을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물어온 순간이야말로, 삶의 역설이 덜커덩거리며 정차하는 순간이었다.
“기차가 다시 이 길로 다니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칙칙폭폭.”
일곱 살이라는 역은 기도나 희망이 멈춰서는 곳일까. 내 유년의 철길 끝에서 기차가 출발하는 상상이 아직 살아 있는데, 아이의 철길에서도 기차는 여전히 운행의 희망을 싣고 있었다.
아이와 나 사이에서 갈라진 철길이 하나로 합쳐지고 있다. 따스한 철로 저 끝에서 막 출발한 기차가 전하는 진동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인생이라는 회로(回路) 어디쯤을 지나는 내 마음속 기차도 실은 멈추지 않고 내내 달려온 것만 같았다, 아이와 내가 철길에 손을 얹은 이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