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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May 05. 2022

지금은 맞고 그때도 맞다

집, 안일_주방: 설거지



  싱크볼도 작고 수도꼭지도 낮고 그릇도 많고 컵도 죽어라 많고 학교에서 유치원에서 어린이집에서 갖고 오는 물통도 세 개고 웍은 두 개고 프라이팬도 두 개고 숟가락 젓가락 국자 포크 집게 뒤집개는 넘쳐나고. 다 싫다. 그냥 다 꼴 보기 싫다. 30분만 사라지고 싶다. 사라졌다가 다시 뿅 돌아와 보니 설거지가 끝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잘 알고 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을. 이 설거지는 오롯이 내 몫이다. 해 줄 사람도 없고 시킬 사람도 없고 조를 사람도 없고 부릴 사람도 없고 부탁할 사람도 없고 부탁하고 싶은 사람도 없다. 지금 하기 싫다고 두면 내일은 더 하기 싫다. 결론은, 지금 해야 한다.

  한숨을 쉬어 보지만 한숨을 쉰다고 설거지 양이 줄거나 그러지 않는다. 한숨 쉬는 마음을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누구 들으라고 더 크게 한숨을 쉬어볼까 싶지만 그런다고 바뀌는 건 없다. 한숨 속에 섞인 스트레스의 농도는 더 짙어지기는 하겠구나. 나와의 싸움에 지고 빨간 고무장갑을 든다. 내 손이 저기 들어가는 순간부터  길고 긴 노동이 이어지겠지. 그만 생각하고 설거지하자.

  엄마, 응가 나와요.

  막내가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말한다. 이건, 설거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구원일까. 무엇이긴, 그냥 내 새끼 시원한 거지. 빨랑 엉덩이 씻겨줘야지. 씻기고 옷을 입힌다. 설거지는 여전히 한그득이다. 지긋지긋하다. 너무나도 지겹다. 너무나도 진실한, 설거지와 응가들 그러니까, 먹고 치우고 자고 씻고 싸는 행위들이 남겨놓은 잔여물들. 됐다.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자. 설거지하자.

  엄마, 이거 안 돼요.

둘째가 태블릿을 들고 온다. 유튜브가 영상이 나오다 멈췄다. 왜, 왜 안 될까. 도대체 왜, 겨우 맘먹고 설거지하려는 시점에 안 돼서 다시 싱크대 앞을 벗어나게 하는 걸까. 난 왜 설거지마저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걸까. 제발, 난 언제쯤 설거지를 안 하는 날이 올까. 너무 큰 욕심일까, 그럼, 난 언제쯤 설거지 집중해서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이제 진짜 설거지하자.

무거워진 마음을 달래려 여자 친구를 검색한다. 여름 비(Summer Rain) 1시간 연속 재생. 이럴 땐 청량한 노래를 귓가에 발라줘야지.  

  엄마, 시끄러워요.

  첫째가 시끄럽단다. 너 게임하는 소리가 더 시끄럽거든. 이것들이 진짜 엄마 설거지하는 데 도움이 안 돼요. 볼륨을 낮춘다. 물소리에 노랫소리가 묻혀 들리지 않지만 어찌할 수 없다. 나는 영원한 패자, 엄마이기 때문이다.



      


  주부들이 가장 싫어하는 집안일 1위가 설거지라는 기사를 보며 혼자 박수까지 쳤다. 나만 이런 게 아니었어. 언제부터 이렇게 설거지가 싫어졌을까. 아이를 낳은 이후부터이다. 이유식을 하며 설거지가 늘어났고 집중해서 십 분 이상 싱크대 앞에 서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싱크대에 서면 아이는 울었고 무언가를 쏟았고 부었고 떨어뜨렸고 깼고 부쉈고 다쳤다. 매일의 일이었고 그 시간은 소리 없이 내 안에 퇴적되었다. 어느샌가 나는 싱크대 근처도 가기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다.

  설거지를 싫어하게 되기 전의 나는, 집안일 가운데 설거지를 가장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싱크대 안에 그릇이 있는 걸 보면 CD플레이어부터 들었다. 식탁 위에 놓고 콘센트에 꽂고 '오늘의 선곡'에 집중했다. 기분에 따라 달랐지만 대부분의 초이스는 디즈니 클래식, SES, 양파, 터보, NSync였다. 음악과 함께면 설거지는 아쉬울 정도로 금방 끝났다. 귓가엔 음악이, 손엔 물의 촉감이, 눈엔 깨끗해져 가는 그릇이, 이 얼마나 아름다운 행위의 연속이란 말인가. 중학생, 고등학생, 성인이 되어서도 가장 즐겨했던 집안일은 설거지였다.

  그랬던 김진샤가 시간이 흘러 지금의 김진샤가 되었다. 매일 싱크대 앞에 서면서 도대체 몇 번을 마음을 다잡는지 모르겠다. 그 과정마저 순탄치 않다. 아이들은 부지런히 엄마를 찾는다. 엄마 설거지 좀 하자, 소리를 꽥 질러도 그 순간뿐이다. 다시 낄낄낄 즐거운 아이들이다. 좋겠다, 천진난만해서. 설거지하다 기저귀 갈고 설거지하다 물 쏟은 거 닦고 설거지하다 우유 따라주고 설거지하다 싸우는 거 말리고 설거지하다 과자 뜯어주는 험난한 시간을 보내고 행주까지 꼭 짜내고 나면 - 평균 약 1시간 30분 정도 시간이 걸린다 - 벌러덩 드러눕게 된다. 폰을 잡기도 싫어지고 그냥 다 싫어진다.      


  설거지 양이 좀 많아지긴 했지만 설거지의 본질은 그대로이다. 먹은 그릇들을 깨끗한 상태로 되돌리는 것. 나 역시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발랄하고 때때로 과해지면 깨방정을 떨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론 생각(또는 공상 혹은 망상)이 많고 단순하고 잘 웃고 착하려 노력하는 사람. 설거지와 나 모두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는데, 어쩌다 설거지에 대해 나는 어찌 이리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던 말인가.

  설거지와 나 사이에 '상황'이 있었다. 그때의 나의 상황에는 설거지만이 단독으로 존재했다. 오롯한 주체였던 나는 설거지'만'을 상대하면 되었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것, 그러니까 노래와 상상 같은 것을 추가하면 더 좋았다. 어느새 그릇들은 뽀득뽀득해졌고 깨끗해졌다. 설거지를 싫어하는 방법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일단 양이 많다. 5인 가족의 식사 후의 처리이다. 사이사이에 아이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줘야 한다. 요구사항, 이라는 한 단어로 축약하기에 엄마의 일은 너무나도 많다. 고무장갑을 끼고 벗을 일이 수두룩 하다. 어느 순간부터 고무장갑을 끼지 않는다. 손끝이 거칠어지는 것보다 당장 고무장갑을 챙겨 끼는 게 더 싫어진 것이다. 아이 셋을 돌보며 설거지하는 매일이란 얼마나 지긋지긋하고 때론 생각지 못하게 참담한 것인지. 아이들 안 아프고 안 다치고 잘 크면 되는 거다 싶다가도, 그렇게 퉁치기에 내 일상이 너무나도 구질구질하고 한편으론 이따위 구질구질에 함몰되는 나 자신이 싫어지는 거다. 그냥 다, 싫은 거다.


  '취미가 업이 될 때'라는 주제의 글을 몇 번 보았다. 그렇지, 취미는 취미로 남아야 하지, 일이 되는 순간 망하는 거지, 하면서 훌훌 넘겼다. 나의 입장이 되고 나니 도저히 훌훌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엄마의 몫'인 상태에서 내 기분 내킬 때만 쏙쏙 하던 설거지에서, 내가 오늘 해놔야 내일의 생활이 영위되는 나의 일 설거지임을 알게 된 순간, 나는 삶은 어쩐지 망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평생 이렇게 설거지하다가 죽는구나. 설거지 양은 줄어들지 몰라도(당장 몇 년은 갈수록 늘어나기만 할 텐데!), 먹고사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구나.

  그러나, (그렇다, 우리에겐 '그러나'가 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때의 설거지가 지금과 같을까. 중학생 시절과 지금이 다른 것처럼 앞으로 상황은 또 달라질 것이다. 그러면서 설거지를 향한 나의 마음 또한 바뀔 것이다. 어쩌면 설거지를 앞두고 행복해하며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설거지의 본질이 바뀌지 않고 나라는 인간 또한 쉽게 바뀌지 않겠지만, 나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은 계속 바뀔 것이니 설거지라는 대상을 향한 나의 마음 바닥 온도 또한 지금과는 달라질 것이다.  

  중학생의 내가 목청껏 'I'm your girl'을 부르며 즐겁게 하던 설거지가 20년이 더 지나 내 일상의 가장 무거운 주제가 될 줄 몰랐듯이, 내 앞날의 언젠가 설거지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 채 생의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식기세척기'로 내 삶에서 설거지의 의미가 희미해질지도 모른다.  

  그때의 설거지도, 지금의 설거지도, 앞으로의 설거지도 다 맞다. 먹고 정리하고 그릇을 깨끗하게 하는 일, 생의 가장 기본적인 일, 설거지는 지금까지 틀린 적이 없었다. 변하는 상황과 환경, 그에 따른 내 마음가짐만 맞게 조정하면 된다.





  앞으로의 내 설거지의 윤곽을 미리 그려본다. 시간이 지나 아이들이 좀 더 크면 월화 저녁 설거지는 첫째, 수목은 둘째, 금토는 셋째, 일요일은 외식(혹은 아빠). 역시, 상황은 변하는 거고 설거지는 틀린 적이 없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버티고 견디면서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많이 보는 것이다. 고무장갑을 자주 벗는 일, 그것뿐이다. 그러니 그만 쓰고 설거지나 하자.




설거지를 끝내는 순간의 횟수만큼 나와 아이들이 자란다



* 제목은 홍상수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차용하였습니다. 영화는 아직 보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안일한 태도를 가지려는 주부가 쓰는 집안일 에세이입니다. 집안일에 대한 글을 쓰며 그 순간만큼은 집과 나 모두에게 쉼을 주려 합니다. 5로 끝나는 날마다 보잘것없지만 피할 수도 없는 집안일을 늘어놓겠습니다. 집안의 일들이 갖는 소중한 의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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