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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May 25. 2022

삶은 행주

집, 안일_주방: 행주



  손에 먼저 닿는 게 임자다. 그리고 그건 대부분 물티슈였다. 육아 고행 8년 차, 내 손에 닿은 팔 할은 기저귀이자 물티슈였다. 요즘 배변하는 막내 덕에 기저귀는 사실상 내 남은 생에 거의(그렇다, '거의'다) 손에 쥘 일이 없지만 물티슈는 그렇게 쉽게 단정하지 못하겠다. 

  여전히 여기저기 쓰일 일이 많다. 아이들 옷을 닦고 물이나 음료를 쏟았을 때 바닥을 닦고...... 굳이 일일이 쓰고 싶지 않다. 물티슈가 쓰일 그 장소와 상황들을 굳이 떠올리며 쓰지 않으련다. 지긋지긋하다. 아이들이 듣든 말든, 지겨워 지겨워, 를 쏟아내며 물티슈를 뽑아댄다.(나쁜 엄마다) 휙휙 닦고 휙 버린다. 인정하기 싫지만, 내 육아의 굳건한 동반자 하나를 꼽으라면 많이 생각할 것도 없이 물티슈이다.





  기저귀 가는 횟수가 줄어서인가,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요 며칠 물티슈를 확실히 덜 쓰고 있다. 물티슈를 뽑을 시간에 걸레를 가져오고 행주를 가져오게 된다. 식탁을 닦을 때 특히 그렇다. 전에는 먹은 것을 치우고 대충 물티슈 한 두장으로 식탁을 닦았다. 식탁 위에 물티슈가 있으니 뽑으면 그만 이었다. 슥슥 닦고 휙. 할 것도 많은 데 무슨 행주냐, 휙.

  행주는 그럴 수 없다, 휙, 하고 버릴 수 없다. 행주로 닦으면 좀 더 힘을 주어 닦게 되고 구석까지 닦게 된다. 물티슈보다 깔끔하다. 둘 다 물에 젖은 건데 왜 뭔가 다르지. 답을 찾을 여유는 없었다. 밀린 설거지와 세 아이 씻길 생각에 마음이 바쁘다. 그리고 답은 늘, 갑자기 낯선 방향에서 낯익은 사람으로부터 찾아온다. 친정엄마였다.


  "물티슈로 식탁이나 바닥을 닦으면 얼룩이 져. 자국이 남아. 닦아도 깨끗하지가 않아. 걸레로 행주로 닦아야 돼. 다 쓰임이 따로 있는 거야."

  물티슈를 슥슥 닦고 휙휙 버리는 나를 보고 엄마는 다시 걸레와 행주로 닦았다. 확실히 다르긴 했다. 그건 엄마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옛날 사람의 고리타분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닦으면 물티슈든 행주든 다 거기서 거기야,라고 헐렁하게 생각했다. 그래야 걸레와 행주로 닦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었다. 걸레와 행주로 닦고 다시 빨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미리 차단할 수 있었다. 

  아이가 요구르트를 쏟아 행주로 닦은 김에 빨아 다시 식탁을 닦았다. 물티슈와는 다른 깨끗함이 있었다. 물티슈로 닦고 난 후의 특유의 진득거림도 없었다. 과연 행주는 행주였다. 원래의 쓰임대로 쓰이니 그 진가를 드러냈다. 그 후로는 물티슈로 슥슥 닦고 휙휙 버릴 수가 없게 되었다. 자연스레 쓰레기도 줄었다. 더 일찍 행주로 닦을 걸, 후회가 일었다. 그나마 빠른 후회라 다행인 건가 싶기도 했다. 


  아이들이 커서 자기들끼리 노는, 딱 그만큼의 시간만큼 주방에서의 시간이 늘었다. 행주를 쥐고 있는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언제부터 이 행주를 썼더라, 바꿔야 할 때가 되었나. 초록색 행주, 괜히 낯설었다. 역시나 엄마였다.

  기억 속 엄마의 행주는 늘 희었다. 엄마는 자주 찜통에 행주를 빨았다. 얼룩덜룩한 행주는 거의 없었다. 미련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더러워질 행주, 저렇게 열심히 삶아 뭐하나. 그래도 엄마는 자주 삶았다. 부글부글 넘쳐흐르는 거품 때문에 자주 가스레인지 불이 꺼졌다. 다시 켜고 불을 줄여도 거품은 끓어 넘치고 또 켜고. 그러게 왜 행주를 삶아 가지고. 

  삶은 행주는 보란 듯이 희었다. 식탁 위 김칫국물을 닦기 아까울 정도였다. 행주는 삶아도 행주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깨끗할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을 오래 하던 내가 엄마가 되어 행주를 쥐고 있다. 행주가, 이깟 행주 따위가 젊은 내 엄마를 불러왔다.

  중요한 건 행주를 삶는 행위가 아닌, 행주를 삶는 마음이었다. 가족의 식탁을, 가족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는 주방을, 가족이 먹는 음식을 담는 접시와 그릇을 닦는 행주를 대하는 마음이었다. 행주의 본래의 쓰임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이 없는 나는 행주 자체를 잘 쓰질 않았고 쓰고 나서도 대충 빨았고 그래서 늘 냄새가 났고 더 쓰기가 싫었다. 얼마 전까지 나의 행주는 그렇게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행주로 닦은 식탁이 물티슈로 닦은 것과 다른 것을 보고 나서는 달라졌다. 내 손은 자주 행주를 찾았고 제대로 헹구고 빨아 손 닿는 이곳저곳을 닦는다. 밥솥을 닦고 에어프라이어를 닦고 조리대를 닦고 싱크대 상하부장과 가스레인지 타일을 닦는다. 다시 정성껏 빨아 물기를 꼭 짜낸다. 

  행주가 쓰여야 할 곳에서 제대로 쓰이면서, 나의 손이 조금 더 움직이면서 주방은 달라지고 있다. 아직 행주를 삶을 엄두는 나지 않지만, 행주만이 갖는 가치는 충분히 알아가고 있다.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엄마와 주부가 되어가고 있다. 누군가에게 밤이 선생이었다면, 요즈음의 나에게는 행주가 선생이다.* 






  한때 '삶은?'이란 질문에 '계란'이라는 답이 개그로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삶'이라는 명사와 '삶다'라는 동사의 변용이 가져온 의미 차이를 활용한 개그였다. 

  삶, 이라는 글자의 생김을 본다. 어찌 이럴까 싶어진다. 삶, 이라는 명사가 갖는 묵직함이 '삶다'라는 동사 속에 끓어오르는 기분이다. 그러면 '삶'이 깨끗해지고 자신의 가치를 찾을 것만 같다. 삶아져 깨끗해진 삶이 계란처럼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행주처럼 얼룩진 날들을 닦아줄 것만 같다. 

  '삶은 행주'를 생각해 본다. 행주를 삶는 엄마의 뒷모습을 본다. 나를 키워낸 엄마의 삶을, 아이들을 키우는 나의 삶을 생각해 본다. 그렇게 삶을 생각해 본다. 


  삶이란 나를 움직여 주변을 깨끗하게 하는 것, 낮고 흰 것들에서 진짜 가치를 찾아야 하는 것, 그러기 위해 뜨겁게 끓어오르는 시간이 필요한, 그런 것이 아닐까. 삶은 어쩌면 행주 같은 건 아닐까. 




그 안에 든 흰 마음을 본다




* 황현산 평론가님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 제목 차용


집에서 안일한 태도를 가지려는 주부가 쓰는 집안일 에세이입니다. 집안일에 대한 글을 쓰며 그 순간만큼은 집과 나 모두에게 쉼을 주려 합니다. 5로 끝나는 날마다 보잘것없지만 피할 수도 없는 집안일을 늘어놓겠습니다. 집안의 일들이 갖는 소중한 의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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