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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Jun 15. 2022

빙빙 돌아가는

집, 안일_빨래: 세탁기


  아무리 그래도 임신 중인 친구한테 할 말은 아니지 싶었다. 빨래가 돌아가는 세탁기를 보고 있는데, 아이를 그 안에 집어넣고 싶어 진다는 말이 떠오르면서 너무 이해가 되더라. 나는 절대 그런 생각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 두 번의 유산 후 힘들게 얻은 아이였다. 산후우울이 그렇게 심각한 거구나, 하면서 애잔한 눈빛을 보냈다. 나와는 관계없을 일, 그러나 네가 겪어 안타까운 일.





  아이를 낳고 나는 일부러 세탁기 돌아가는 걸 보려고 몇 번 세탁기 앞에 선 적이 있다. 아이보다 나를 세탁기에 넣고 싶었다. 나의 머리, 나의 마음, 그냥 내 모든 걸 다. 저 안에 들어가 저렇게 몇 차례 돌고 떨어지고 물 맞고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나오면 나도 하얗게 변해 있겠지, 내 안에 스며든 걸 저 안에 버리고 올 수 있겠지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처얼썩, 처얼썩 동그라미 안 쉬지 않는 낙차(落差)를 감상했다.

  지금은 '산후우울'이라고 쉽게 말하는 감정이지만, 그때는 그것이 우울 인지도 뭔지도 모르는 시간이었다. 그때의 나에게 감정은 즉 시간이었다. 시간은 감정을 가득 채워 흘렀고 감정은 시간의 구석구석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울적하다, 우울하다, 라는 생각보다 '왜 이러고 살까'라든가 '숨을 쉴 이유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밥을 먹으면서 이딴 밥 왜 먹나 싶었고, 티브이 예능을 보면서 웃다가 왈칵 울었다. 세 마리 가로세로로 줄을 맞추면 팡팡 터지는 게임의 끝판에 이르면 죽어야지 생각하며 열심히 게임을 했다. 게임은 점점 어려워지고 끝판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오늘의 끝판이 500번이었다면 내일은 530번, 이런 식이었다. 내가 열심히 게임하는 것보다 게임 개발자들이 더 열심이었다. 세상에 뭐 하나 이루고 죽고 싶었고 그건 게임 끝판을 깨는 거였는데 그것도 못하고 죽겠구나 싶었다. 죽을 궁리는 하지 않고 죽을 생각만 하는, 비겁하고 나약한 정신이었다.

  그런 나를 죽지 않게 한 것은, 동생과 세탁기였다. 동생은 자주 '누나 탓이 아니야'라고 메시지를 보내 주었다. 누나, 굿윌 헌팅이라는 영화 봤어? 그것도 안 보고 40년 동안 뭐하고 살았냐, 그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와. 잇츠낫유어폴트. 누나, 그건 누나 탓이 아니야. 나는 동물들을 팡팡 터트리며 나에게 말했다. 그건 내 탓이 아니야, 내 탓이 아니야. 살 이유를 찾지 못할 때마다 '내 탓이 아니야'라고 말했다. 마음속으로도, 입 밖으로도 말했다. 내 귀에 들리도록 말했다. 내 탓이 아니야.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으면서도 말했다. 내 탓이 아니야. 빨랫감은 천천히 돌고 빠르게 돌았다. 동그란 원통이 동그랗게 돌면서 빨랫감을 철썩, 철썩 아프게 했다. 철썩, 잇츠낫마이폴트, 처얼썩, 그건 내 탓이 아니야. 아파하던 빨래들은 느린 속도로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세탁이 헹굼으로 바뀌고 헹굼의 숫자가 3에서 2로 다시 1로 바뀌더니 탈수가 시작되었다. 빠른 속도의 원통 안에서 빨랫감들은, 고통 속에서 체념한 듯 보였다. 잇츠낫유어폴트, 같은 주문이 끼어들 새도 없이 탈수는 계속 되었다. 빨래들이 마지막 고통을 참아내고 있을 때, 그 통증을 거치고 있을 때 나는 조금 불안했다. 저들이 저렇게 아픈 것도 자기 탓이 아닐 텐데, 저렇게까지 참아내도 결국은 다시 돌고 돌아 여기로 오게 될 텐데, 이 회전문을 벗어나지 못할 텐데.

  빨래들이 짜내는 물이 내 눈을 통해 나오기 시작한 순간, 세탁기는 눈치도 없이 경쾌한 음으로 빨래를 마쳤다. 세탁기가 울컥울컥 뱉어내는 빨래에서는 방금의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온통 향긋한 내음과 하얗게 시원해진 감촉만 내게 안겼다. 생의 깨달음은 이상한 곳에서 갑자기 터지듯이, 그때의 내게도 그렇게 깨달음이 왔다. 우울이었다. 나 우울해하고 있구나.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가 그런 나를 건져내고 보니 그 검푸른 물의 이름은 '우울'이었다. 거기 빠져 허우적 대는 행위가 '죽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새로 오픈한 마트에서 오만 원 이상 장을 보자 준 피죤이었다. 그 냄새가 나를 건졌다. 비로소 나는 무기력과 죽고 싶은 마음에서 벗어나 그것이 '우울'임을 바라볼 수 있었다. 세탁기 회색 원통이 무심히 나를 바라봤다. 네 탓이 아닌데 왜 죽어,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 그만해.

  그날부터 나는 자주 세탁기를 들여다봤다. 내 우울을 그 안에 같이 넣었다. 나도 들어가서 빨래들처럼 깨끗해지고 싶다고, 향긋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저기 들어가 한 시간이 지나면 나의 감정도 향기롭고 깨끗해지겠지. 나도 새 사람이 되어 나올 수 있겠지. 나의 탓은 아니지만, 누구의 탓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들 수 있겠지.

  세탁기를 바라보다 아이가 잠에서 깨서 울면 달래고 기저귀를 갈고 젖을 물렸다. 수유를 하면서 동물들을 터트렸다. 팡팡. 팡팡 터지는 청량감이 예전만 못했다. 어느새 끝판은 더 멀어져 있었다. 부지런한 게임 개발자들에게 감사했다. 나는 어쩌면 끝판을 깨지 못할 것이고 나의 죽음은 그만큼 미뤄져 있을 테니까. 그렇게 나는 죽음을 내 곁에서 밀어냈고 그 자리에 새하얀 빨랫감을 널었다. 빨래는 누구 탓도 하지 않으며 조용히 바람을 맞았다.






  세탁기는 돌고 돌고 인생도 돌고 돈다. 밤새 보낸 37개의 톡 마지막에 '힘드네'라고 마무리한 동생이었다. '그건 네 탓이 아니야'라고 썼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인생이 그런 거다. 누구라도 잡고 '너 때문에 이렇게'라든가, '내가 지금 죽고 싶어요'라든가 '너무 지쳤어'라는 말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때도 있고 그런 때가 지나가는 때가 있고 비슷한 때가 또 오고 다시 괜찮아지는 때도 온다. 그래서 빙빙 돌아가는 세탁기를 보다 보면 자꾸 '인생' 두 글자가 생각이 나는 거다. 돌고 돌다 보면 괜찮아지니까, 몇 차례 낙차를 견디고 나면 결국에는 좋아지니까.      


  

  동생에게 ‘그건 네 탓이 아니야’라고 쓴 것을, 보내지 않았다. 동생은 이미 알고 있다. 지금은 견디고 지나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그만큼 단단한 사람이다. 대신, 점심 즈음 ‘뭐 먹어’하고 물었다. 비지찌개 먹는다는 동생에게 ‘나우 비지?’했다가 '썩을 개그'라고 욕먹었다. 누구의 탓도 하지 않아야 하는 시간을 건너고 있는 동생에게 피식 웃음 하나 건네는 하찮은 누나이고 싶다. 돌고 돌아와도 같은 자리에서 속없는 농담으로 웃게 하는 누나로 남아있고 싶다. 그 누나를 살린 주문이 ‘네 탓이 아니야’라는 건 끝까지 비밀로 한 채로.


빙빙 돌아가는




*제목은 sokodomo의 '회전목마' 가사 일부를 가져왔습니다.





집에서 안일한 태도를 가지려는 주부가 쓰는 집안일 에세이입니다. 집안일에 대한 글을 쓰며 그 순간만큼은 집과 나 모두에게 쉼을 주려 합니다. 5로 끝나는 날마다 보잘것없지만 피할 수도 없는 집안일을 늘어놓겠습니다. 집안의 일들이 갖는 소중한 의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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