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오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쓰레기통을 비워도 냄새는 여전했다. 여름이 된다고 매해 이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음식물 썩는 냄새가 거실을 가득 채우고 방 안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에도 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쓰레기통, 음식물 쓰레기 다 비웠는데. 1층이라 그런가. 쓰레기 재활용하는 날도 아닌데. 쓰레기 버리는 곳이 가까워서 그런가. 그런 생각을, 둘째 수유를 하면서 기저귀를 갈면서 안아 재우면서 했었다. 어디서, 어디서, 왜, 왜, 썩은, 냄새가, 토나와, 이런 생각만 했다. 어떻게, 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던 때였다. 물론 핑계는 육아였다.
"너 여기는 안 들여다 보지?"
내가 잘못한 건 아니었다. 누구도 나에게 그걸 말해주지 않았고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 몰랐을 뿐이다. 무지(無知)는 늘 그렇게 순수하다. 몰랐으니 하지 않은 건 하지 못한 건 잘못한 게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무언가 잘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끄러웠다. 부끄러운 건 싫은 느낌이다. 수치(羞恥)는 늘 그렇게 부정(不淨)하다. 그래서 엄마를 보며 엄마를 들먹였다, 나의 잘못은 엄마로부터 온 거라고 항변하기 위해.
"엄마가 안 가르쳐 줬잖아."
"이런 건 안 가르쳐 줘도 빤딱하고 알아야 되는 거지. 주부가 부엌에 서서 이런 것도 안 보고. 냄새가 났을 긴데. 이런 데 안 닦으면 가족이 아프다. 으이그."
그래서, 그렇게 알게 되었다, 냄새의 출처. 그리고, 기가 막혔다. 엄마는 나에게 '결혼하면 수채통도 꼭 씻어야 한다'라고 가르쳐 주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건 안 가르쳐 줘도 알아야 되는 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이 맞는 말이어서 또 기가 막혔다. 조금만 신경 써서 주방을 둘러봤더라면 냄새가 어디서 나는지 알았을 텐데, 머릿속으로만 '어디서, 어디서, 왜, 왜' 이러고 있었다. 나의 코는 무용한가, 무용했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물론 그때의 나에게 좋은 핑계는 있었다. 역시나 육아였다. 육아 우울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저 아이를 키우고 있던 때였다. 아이 둘을 키우는 힘든 일을 하는데, 청소와 밥과 설거지까지 하느라 억울하고 분통 터지던 때였다. 그러나 그렇게 힘든 일을 모두가 해왔고 하고 있어서 어디 말도 못 하고 속으로 속으로 누르던 때였다. 그러니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냄새가 수채통에서 난다는 걸 그때의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그럼에도, 엄마가 열어 보여준 수채통은 나름의 충격이었다. 지금도 그 수채통을 잊을 수가 없다. 더러웠고 더 더러웠고 또 더러웠다. 수채통을 보고 있자니 냄새가 그 정도밖에 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내 집의 상태가 이러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었고 그걸 청소하고 관리해야 하는 주체가 나여야 한다는 사실은 더 싫었다. 그렇게 싫어만 하는 내 앞에서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솔을 들었고 베이킹파우더를 뿌렸다. 밥 해 먹고 설거지 하는 게 다가 아니야. 엄마는 쉽게 쉽게 말하며 쉽게 쉽게 수채통을 닦았다. 쉽게 쉽게 해내는 엄마도 싫어질 지경이었다. 나와 주방과 냄새와 엄마를 싫어하는 동안 수채통이 깨끗해지고 있었다. 수채통이 깨끗해지는 속도로 공기 중의 냄새도 작아지고 있었다.
그날 나는 오후를 바쳐 집안일을 저주했다. 눈에 보이는 집안일도 버거웠다. 아이를 키우며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만 해도 손목이 쑤시고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아팠다. 어디 말해봤자 나만 욕먹을 그런 아픔들이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집안일이라니, 눈으로 보지 않고도 알아채야 하는 집안일이라니, 그런 건 먼지 하나로도 충분히 벅찬데!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저주를 끝까지 밀고 나가 보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집안일이라면, 눈을 감아야 감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냄새와 귀와 촉감에 눈을 달아 주었다. 욕실에 곰팡이가 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스스스스. 옷장에 차오르는 습기가 꽤나 축축했다. 옷걸이에 걸려 있으면 안 되는 옷걸이 옷들, 접혀 있으면 안 되는 접힌 옷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만.
눈을 떴다. 소파 위로 하얗게 내려앉은 먼지들이 시간의 누적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만.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집안일들이 내 마음속에 둥둥 떠다녔다. 하아, 이럴 시간에 널브러진 기저귀라도 쓰레기통에 넣지 그래, 망상 천재 김진샤야. 망상이 끝나자 자책이 시작되었다. 그때의 나는 망상과 자책에 능했다. 망상과 자책을 객관화하여 세 글자로 말하면 '게으름'이었다. 게으름은 다시 나의 감각들을 무뎌지게 했고, 집안에 일어나고 있는 나의 일들을 알아채지 못하게 했다. 악순환이었다.
결혼 전의 나는 2년에 한 번씩 직업을 바꿨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한 직장에서 한 가지 혹은 두 가지 일만 반복하며 같은 얼굴만 보고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지금 한 가지 직업을 십 년째 하고 있다. '주부'이다. 연봉이 오르는지는 알 수 없다. 연봉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집안에 대한 나의 감각 그 예민도가 높아지고 있다. 많은 직업이 그러하듯, 주부도 오五감 아니 육六감을 발휘해야 한다. 미래의 나의 주방, 나의 옷장 안에서 일어날 일들을 예감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삼 년 전까지만 해도 집안일에 있어 나는 내 감각의 변두리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감각의 중심에 서서 감각을 활용하지 못했다. 그랬던 내게 '수채통'이 있었고, 그로 인해 일깨워진 감각은 이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지지 않는 부분까지 알아차린다. 예를 들면 수채통은 자주 닦고 수시로 옷장을 열어 옷걸이 사이사이를 흔들어 주고 신문지를 끼워 넣고 욕실에 곰팡이 젤을 바르고 닦는다. 하지 않으면 그 결과물들은 가시(可視)적인 것이 된다, 곰팡이와 먼지, 찌꺼기 같은.
주부는 그냥 되는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집에 있으면 주부인 줄 알았다. 밥과 설거지와 빨래와 청소를 하면 주부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주부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알아차려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아가고 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감각도 부지런해야 한다. 그래야 집의 중심으로, 가정의 중심으로, 감각의 중심으로 옮겨갈 수 있다. 변두리에서 벗어나는 일, 십년이 걸렸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름이 오고 있다. 수채통을 한 번 더 열어보게 된다.
매일 닦으며, 조금씩 중심으로
집에서 안일한 태도를 가지려는 주부가 쓰는 집안일 에세이입니다. 집안일에 대한 글을 쓰며 그 순간만큼은 집과 나 모두에게 쉼을 주려 합니다. 5로 끝나는 날마다 보잘것없지만 피할 수도 없는 집안일을 늘어놓겠습니다. 집안의 일들이 갖는 소중한 의미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