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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Jun 25. 2022

필요한 불필요

집, 안일_빨래: 트윈워시


  심드렁한 나의 대답에 남편은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그는 내가 엄청 기뻐하며 소리를 꺅꺅 지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있음 좋고'였다. 그런 질문에 대답할 시간에 나는 좀 더 자고 싶었다. 사실 나는 조금 짜증도 났다. 아이 재우고 겨우 잠이 들고 있었는데 전화해서 대뜸 한다는 말이 '요즘 광고 나오는 트윈워시 사줄까'였다. 광고를 보며 '요새 기술 좋아졌네'라고만 생각했지 그걸 갖고 싶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뭔 세탁기를 두 대씩이나... 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한 번 깬 잠은 다시 오지 않았고, 몽롱해진 나는 짜증을 내며 돌아누웠다. 100일이 갓 지난 아이가 옆에서 잉 소리를 냈다.

  트윈워시가 설치가 된 날 나는 사진을 찍어 대학동기단톡방에 올렸다. 남편이 아기 낳느라 수고했다고 사줬어. 읽은 사람 표시 숫자는 자꾸 줄었지만 그 어떤 대꾸도 없었다. 이것들이 부러워서 아무 말도 없구만, 하고 쿨하게 넘어가려 했지만 나는 이내 후회를 했다. 너도 나도 다 애 낳는데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올린 건지. 저녁 즈음에 한 친구가 호응을 해줬다. 저거 좋아 보이던데, 진샤 좋겠네~, 침묵. '고마워'라고 말한 나의 말 끝이 씁쓰름했다. 그 감정이 오래가서인가, 나는 트윈워시 세탁기를 한동안 열어보지도 않았다.


  나에게 그것은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있으면 좋겠지, 싶었지만 필요가 없으니 쓸 일이 없었다. 있어도 좋지 않았다. 괜히 돈만 썼네 싶어 부화도 일었다.(남편은 나아아중에야 포인트가 남아서 산 거라고 말해 주었다) 9킬로 세탁기만으로도 세 식구 세탁은 충분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내가 2층 세탁기를 사서 속만 썩나 싶었다.


- 진샤 그거 잘 쓰고 있어?


대학 동기 하나가 개인 톡을 보내왔다.


- 뭐?
- 그거, 트윈워시.
- 아, 아직 안 써 봤어. 쓸 일이 없네 ㅋㅋ
- 그래? 그거 되게 사고 싶었는데... 빨래 동시에 할 수 있고 급한 빨래 후다닥 그거만 할 수 있고 애들 빨래 얼룩지기 전에 그 빨래만 돌려도 되고. 너 아직 애가 어려서 쓸 일이 많이 없나 보다.
- 그런가 봐.
- 써보고 어떤지 말해줘.
- ㅇㅇ알겠어, 완전 객관적으로 말해줄게 ㅋㅋ
- ㅋㅋㅋ


  ㅋㅋㅋ 속에 어색함과 진심을 숨겼다. 도움이 될만한 말을 더 해주고 싶었지만, 도움은 친구가 나에게 주었다. 불필요한 그걸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준 것이다. 나는 동시에 할 만한 빨래가 없었고 급한 빨래가 없었고 얼룩질만한 아이 옷이 없어서 여전히 트윈워시를 쓸 일이 없었지만, 이제는 적어도 그 세탁기를 어찌 써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대화창을 들여다보다가, 친구의 프로필을 눌렀다. 친구의 아들과 딸이 선글라스를 끼고 브이를 하고 있었다. 무심히 사진을 넘기다 친구의 사진을 보았다. 지금과는 다르게 날씬한 모습이 결혼 전 같았다. 저 모습을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더라... 남자 동기의 결혼식장에서였다.

  신혼이었던 친구는 커다란 명품가방을 들고 왔었다. 어쩌다 친구의 맞은편에 앉은 그때의 나는 솔로였다. 명품가방을 드는 친구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조금은 신기한 눈으로 친구와 가방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결혼하면 다 저렇게 되는 건가 싶었다. 특이한 모양의 커다란 가방은 친구의 옆자리를 조용히 그러나 뻣뻣하게 차지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여자 동기들끼리 따로 카페에 갔다.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아, 이거? 신혼여행 갈 때 남편이 사줬어. 잘 들게 되지는 않더라, 그냥 어쩌다 오늘 같은 날 아니면 들 일이 없어, 필요 없다고 안 사도 된다 했는데도. 맞은편 친구가 말을 잘랐다. 야야, 시집 잘 갔다, 잘 갔어. 우리는 다 같이 웃었다. 그때의 친구는 날씬했다. 지금처럼 아이 둘을 낳고 엄마라는 살 속에 둘러싸인 모습이 아니었다.   

  2년 후의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나는 조금 아니 많이 당혹스러웠다. 필요 없다는 나를 굳이 명품점으로 끌고 들어선 남편이 나름 고심하고 고른 가방 때문이었다. 남자들 눈은 다 똑같은 건가, 남자들 눈엔 저 가방이 예뻐 보이는 건가. 친구의 가방과 똑같은 가방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거 어때요?'라고 순수하게 묻는 남편의 눈을 보고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음... 근데 진짜 필요 없어요, 이런 가방. 친구도 똑같이 대답했을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남편은 나의 웃음을 오해했다. 점원을 부르더니 그 가방을 내려달라고 했고 나에게 메어 보라 들어보라 하더니 포장을 했다. 결혼식 끝나자마자 쓰러지고 응급실에 가고 수혈을 맞고 겨우 정신을 차린 마눌에게 남편은 '신혼 선물!'이라며 개운하게 웃었다. 몇백의 카드 거래는 몇 초만에 끝났다. 그렇게 나도 친구와 같은 가방을 갖게 되었다.  

  멋쩍게 크고 화려한 그 가방은, 나갈 만한 일이나 모임이 없는 신혼의 아낙에게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어쩌다 도서관 책모임에 한 번 들고나갔었는데, 다른 분들이 모두 에코백이나 등에 매는 가방에 책을 넣어 온 것을 본 이후로 나는 다시는 명품가방을 들고나가지 않았다. 동기모임에는 더더욱 다른 가방을 가지고 나갔다.

  나와 똑같은 명품가방을 나처럼 매지 못한 채 아이 둘 키우느라 애쓰는 친구의 사진을 보다가 나는 주섬주섬 일어났다. 아이가 토해서 벗겨둔 옷과 가재 수건 몇 장을 트윈워시에 넣었다. 세탁기는 내 아이의 옷을 먹고 조용히 그리고 담담하게 입을 닫았다. '아기옷'을 선택했다. 내 트윈워시의 첫 시작이었다.


- 아기 옷 돌려봤어. 생각보다 오래 걸려. 그런데 진짜 깨끗하게 빨래가 되네. 물도 드럼보다 많이 안 쓰고. 나는 아직은 좀 더 지나야 쓸 일이 생길 거 같아. 근데 4인 가족인 너는 꽤 쓸 일이 많을 거 같으네. 넌 있으면 좋을 거 같아~
- 그래? 고마워. 솔직히 니가 그렇게 말 안 했어도 그냥 지르려 했어 ㅋㅋ 애 키우는데 지르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ㅋㅋ
- 질러질러 ㅋㅋㅋ 인생 뭐 있나 쭉 가는 거지 ㅋㅋㅋ
- 옹야 고마워


  이 톡을 주고받은 이후로 나는 아이를 둘 더 낳았고 친구는 초등학생 학부모가 되었다. 나는 이사를 네 번을 더 다녔고 친구는 혹독한 다이어트로 40킬로 대 진입을 앞두고 있다. 그새 트윈워시의 쓰임도 많이 늘었다. 남편이 급하게 입어야 하는 셔츠 한 장을 몇 번 빨았고 아이들이 흘린 초콜릿 우유나 실수한 용변이 묻은 옷을 빨았다. 여행을 다녀와 빨래들이 산을 이루면 두 대에 집어넣어 한 번에 빨래를 마쳤다. 불필요는 곧잘 필요가 되었다.

  가방은 여전히 불필요하긴 하다. 어떻게 될지 몰라, 애들 초등학교 입학하면 엄마가 제대로 된 가방 하나씩 들어줘야 되거든, 이라는 친구의 말이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학군 좋은 동네에 사는 친구와는 달리, 우리 아이의 학교는 한 학년 한 반, 전교생 50명이 안 되는 학교이다. 내 아이 친구들의 엄마 아빠는 농사일을 하고 부모 중 한 분은 다른 나라에서 왔다. 명품가방을 꺼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환경이다.  

  그러나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다음 이사 갈 곳은 엄마들이 명품가방만 들고 나오는 곳이 될 수도 있다. 불필요했던 가방이 그때가 되면 자주 필요하게 될 것이다. 시간은 불필요했던 것을 필요하게 만들고, 그와 같은 힘으로 필요했던 것을 불필요 속으로 가라앉힌다. 나와 친구의 트윈워시와 가방처럼, 그렇게.





  신혼의 아낙이 애셋 엄마가 되고 친구가 30킬로그램이 넘는 살을 몸에서 떨쳐내고 조용하기만 하던 트윈워시가 부산을 떨고 먼지 쌓이던 가방이 어깨로 손으로 옮겨 다니게 되는 그 시간 동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단 하나, '감내'였다. 불필요한 것에서 필요를 기다리고 필요한 것이 불필요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그리하여 이 모든 변화가 인생을 채워감을 고요히 알아차리는 감내.

  

  주변의 많은 불필요한 것들을,

  긴 시간을 들여 바라보는 이유이다.



필요한, 불필요




집에서 안일한 태도를 가지려는 주부가 쓰는 집안일 에세이입니다. 집안일에 대한 글을 쓰며 그 순간만큼은 집과 나 모두에게 쉼을 주려 합니다. 5로 끝나는 날마다 보잘것없지만 피할 수도 없는 집안일을 늘어놓겠습니다. 집안의 일들이 갖는 소중한 의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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