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샤 Sep 29. 2020

지명(地名), 땅의 이름이 갖는 온도  

내가 살아온 곳의 이름들

지명에 관심이 많다. 지명을 보면 '왜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부터 생각하게 된다.  땅의 형세와 기운, 이름의 내력에 관심이 많다. 

결혼하고는 이사를 자주 다니면서, 더 관심을 많이 갖게 된 것 같다. 내가 사는 곳의 이름이 맘에 든다면, 그 이름처럼 되고 싶은, 뭔가 묘한 심리가 있다고 해야 할까. 그 이야기들을 적어보려 한다. 




먼저, 나의 유년 시절의 모든 곳, 태백.

태백(太白)이란 이름을 지금도 매우 사랑한다. '커다란 하양'이라는 뜻이, 태백 그곳의 느낌과 너무 닮았다. 겨울 눈이 오면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그 눈에 뒤덮여 있는 시절은 꽤 오래되었다. 무엇보다, 커다란 하양이라는 그 말의 느낌이 좋다. 태백은 추웠지만, 그 말 뜻은 따뜻한 느낌으로 기억된다.


성인이 된 나의 거주지, 서울 양천. 양천(陽川)이라는 말의 느낌도 좋다. 일단 내가 저 陽 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발음과 한자 자체의 느낌에서 오는 따뜻함. 내가 살았던 동네의 기억은 밝지 않지만, 양천이라는 지명은 좋아했다.

20대에 잠깐 충청도 논산에 지낸 적이 있다. 상월(上月) 면 대명(大明)리. 이름에서 딱 달의 기운에 흠뻑 젖게 된다. 태어나서 가장 큰 보름달을 그곳에서 보았고, 보름달 아래의 논산은 그저 밝았다. 가로등이 없었으나, 필요하지 않은 동네였다. 순전히 이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첫 살림은 남양주 진접이었다. 진접이라는 발음은 별로였고, 남양주는 참 좋아했다. 역시나 陽이 큰 역할을 했다. 도로명 주소가 해밀 예당로였는데, 한자인지 한글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해밀 예당'이라는 발음이 너무 예뻐 꽤나 마음에 들어했다. 내가 추위를 많이 타서, 따뜻한 느낌의 지명을 좋아하나 보다, 했다. 

그런 의미에서 두 번째 거주지였던 광명(光明)도 좋았다. 빛과 밝음, 거기서 느껴지는 따뜻함. 뜨거움의 느낌도 있겠지만, 나에겐 따뜻한 느낌이 컸다. 광명시 소하동에 살았는데, 소하동의 이름은 느낌이 그냥 그랬다. 

세 번째 거주지 성남 신촌. 별 느낌 없다.

참, 우리나라에는 신촌과 금곡이 참 많다. 말 그대로 새로 생긴 동네(新村)나, 좀 괜찮은 산과 산 사이(아니면 정말 금이 나왔을 수도...)는 다 금곡(金谷)이란 이름이 붙은 것 같다. 서울 신촌 성남 신촌, 남양주 진접읍 금곡리에 살았고 성남 옆동네도 금곡동이었다. 사는 곳에서 이래저래 많이 보다 보니 별 감흥이 없는 지명들이 되었다. 

네 번째는 평택 포승읍. 발음이나 한자나 전체적으로 지명이 별 감흥이 없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리고 지금 여기, 이천 오천리. 이천(利川) 오천(午川). 오천은 빛과 물이라는 아주 좋은 뜻이나, 발음에서 오는 각별한 느낌은 없다. 주변에는 관리, 덕평리, 각평리 그런 지명을 가진 땅들이 있다. 

조금 더 나가면 부발읍, 백사면 이런 지명을 만날 수 있다. 백사면은 왠지 막 모래바람이 불 것만 같다. 지명에서 오는 선입견이, 가끔은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 남양주 진접도 발음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부발도 만만찮게 느껴진다. 


내가 이런 주제의 글을 써봐야겠다고 결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지명은 바로 이천 '효양'이다. 꽤 오랫동안 효양(孝陽)인 줄 알았는데 검색해 보니, 효양(孝養)이다. 효로서 기른다, 또는 효를 기른다. 참 바람직한 이미지의 지명이다. 굳이 陽이 아니어도, 그냥 발음이 너무 예쁘고 뜻도 예쁜 듯하여 애정 하는 지명이다. 효양에 사는 사람들은 다 선하고 효심 가득한 사람들일 것만 같다. 효양도서관이 있는데, 늘 밝은 햇살이 들어오는 따뜻한 도서일 게 분명하다.(가보진 않았다.) 효양, 효양 몇 번이나 입으로 발음해 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입에서 왠지 담백한 꽃잎차가 날 듯한 이름이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예쁜 지명이 있었구나 싶었던 곳, 효양. 아이에게 지어줘도 예쁠 것 같은 이름이다. ( 더 낳겠다는 뜻은 절대 결코 아니다.)




개인적으로 특별하게 느껴지는 지명들이 몇 개 있다.  

1. 서울 구로(九老)는 왜 구로일까? 아홉 늙은이가 뭐? 왜? 뭔가 오래된 전설이 있을 것만 같은 지명이다. 막상 지역은, 지하철 탈 때마다 구로 환승역이 냄새가 많이 났던 기억만 남아 있다. 구로 지명의 유래에 대해 단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알아보지는 않았다.

2. 우리나라에서 어쩌면 거의 유일하게?! 한자 지명이 없는 곳, 서울. 어쩌다 서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한양, 한성 등 과거 한자 이름들과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이름의 거대한 도시, 서울.

3.  중국의 북경(北京), 중국의 남경(南京), 그리고 동경(東京)은 일본. 흠... 서경은 없다. 중국의 서안(西安)이 있을 뿐이다. 역사가 모를(또는 역사가 숨긴) 큰 아시아 제국이 존재하여 동서남북에 각각 京을 하나씩 둔 건 아닐까 하는 공상을 해 본다. 그럼 왜, 우리나라는 노룩 패스? 존재감이 미미했던 것인가. 그렇다면, 지명에서마저 서글프고 통탄할 일이다.(공상력이 슬슬 지구를 벗어나려 하고 있다.) 

4. 지금까지 들은 지명 중 문화충격 1위는, 단연코 고등학교 때 라디오에서 들은 '야탑동'. '와! 저런 지명에 사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했는데, 1~2년 후에 그곳에서 사는 친구들을 대학 동기로 만나게 되었다.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야탑. 야탑. '야! 타!'와, 다보탑 석가탑 야탑의 어느 중간일 것만 같은, 그런 애매모호한 느낌적인 느낌의 지명이었다. 그때 라디오 디제이였던 박소현 씨도 '정말 특이한 이름의 동네네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야탑동은 지금도 오고 가다 보면 고등학교 시절의 그 충격을 떠올리게 한다.



다음 나의 거주지는 어디가 될까. 군인가족의 삶은 삶 자체가 여행이라, 어떤 이름을 가진 땅이 나의 다음 일상을 떠받혀줄지 기대되고 기다려진다. 어디가 되었든, 그 땅의 이름을 되뇌고 생각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나의 삶과 글을 살찌울 것이다. 땅은 그렇게, 묵묵히 자신의 이름을 지닌 채 우리 모든 생이 온전히 서있을 수 있게 해 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