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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Jan 03. 2023

오대오

안현미, < post-아현동 >



겨울방학은 눈과 밤뿐이었습니다.

다시 적어야겠군요. 그곳의 겨울은 눈과 밤뿐이었습니다. 밤에 잠들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눈은 소리의 천적이었습니다. 눈이 내리는 순간 들리는 단 하나의 소리는, 눈이 내리는 소리였어요. 눈이 내리는 소리, 어떤 소리인지 아세요? 침묵이 침묵하는 소리, 눈이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소리, 나무와 산과 땅이 동시에 같은 포기를 하는 소리. 그런 곳에서 아이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잠드는 것뿐이었습니다. 잠들었다가 깨지 않는 새벽을 보내고 아침에 창밖을 보며 '우와'를 외치는 것. 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아이들은 잠이 들어야 했고 창 밖의 눈의 일정을 꿈속에서 체크해야 했습니다.


그런 겨울을 몇 번 지나면 몇 가지 눈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눈이 내릴 때는 따뜻하다는 것, 눈이 내리고 난 후의 바람이 차갑다는 것, 차가운 바람은 눈을 얼린다는 것, 빙판길은 적설이 낳은 불효자식이라는 것, 눈이 녹는 데에는 더러운 진흙과의 동침이 필요하다는 것, 눈은 순수를 가장한 상스러운 기후라는 것. 이 사실들을 모두 알게 될 즈음



가난에는 가난과 밤뿐이었습니다.

눈은 오지 않지만 바람은 강원도보다 더 추운 도시의 당구장 위 옥탑방. 어린 남동생은 보일러를 돌릴 기름을 사러 주유소를 갔습니다. 도시의 새벽 2시는 차가 많았습니다. 보일러가 돌아가도 도시의 밤은 여전히 따뜻하지 않았습니다. 잠든 동생의 입에서 흰 김이 새어나왔습니다. 강남에 사는 친구는 저보다 학자금 대출이 두 학기나 많았지만 우리는 곧잘 같이 떡볶이를 사 먹고 김밥은 꼭 참치김밥이었습니다. 저는 고속터미널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친구의 학자금이 안쓰러워 500원을 더 내곤 했습니다. 조금 자란 남동생은 고깃집 아르바이트 형들을 데리고 저의 호프집 아르바이트로 2차를 오곤 했습니다. 저 형이 누나가 맘에 든다는 데 다음 달에 군대가. 눈빛도 목소리도 인사도 서글서글하던 아이가 기다리는 것이 제 새침한 반응도 전화번호도 아닌, 군대라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고 서글펐습니다. 그런 서글픔에서 퍼뜩 나를 구해준 것은 시급이었고, 친구들이 유럽여행에서 돌아올 즈음 나는 시급을 모아 다음 학기 생활비를 입금했습니다.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친구들은 파스타를 사주었고 저는 시급과 파스타 가격을 비교하느라 빠르게 삼킬 수 없었습니다. 짝사랑을 사랑으로 발전시키는 데 실패한 어린 남자는 호주에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누나에게는 진짜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는데 5만 원만 빌려줘. 바라보기만 해도 설레던 누나는 '네 힘으로 해결해야지'라며 단호하게 끊었지만 실은 5만 원이 없었습니다. 덕분에 끝까지 고고한 짝사랑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어두운 밤의 더 어두운 방, 이쪽으로 누우면 가난이 검은 낯빛을 하고 눈 맞춤을 요구했습니다. 저쪽으로 돌아누우면 웃풍이 스스스 불어왔습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씌우면 섬유유연제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가난해도 열심히 빨래를 하는 엄마가 싫었습니다. 열심인데 왜 가난한 거야? 왜?

열심이어도 가난한 호적을 떠나



섬에는 외국어와 밤뿐이었습니다.

야시장의 버블티에서는 오토바이 매연 맛이 났습니다. 야래향夜來香을 흥얼거리는 등려군의 얼굴은 빛바랬지만 목소리는 세기를 넘어 청아했습니다. 유난히 말이 빨랐던 친구의 별명은 마라이馬來, 그녀가 말레이시아에서 온 사실보다는 어디서나 '말이 뛰어오는 것만 같은' 존재감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라이와 몇 번 가봐서 익숙했던 야시장, 나에게 해줄 말이 많은 그녀에게 천천히 말해 줘,라고 말하지 못한 그 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어요. 넌 생김새도 말투도 외국인 같지 않아, 하면서도 내내 천천히 발음하고 말을 해주던. 외국어는 욕부터 배워야 잘 배우는 거야 라며 굳이 종이를 꺼내 천천히 온갖 욕을 친절히 써주던 12월의 밤. '추워'가 한국어로 뭐야,라는 질문에 대답했더니 그 후부턴 나만 보면 추어추어를 외쳐대던, 욕과 추위와 버블티와 등려군이 뜨겁게 교제하던 겨울의 밤들.  


카드는 쓰지 않는다는 말을 대신하듯 매번 두툼한 지갑을 먼저 열었지만, 야구에서 코리아가 자기의 모국 섬나라를 이기자 하루동안 연락을 끊던 속 좁은 사내와의 마지막 밤 말했습니다. 우린 사귄 게 아니니 여자친구 생기면 바로 말해, 축하해 줄게. 그의 대답 '너도', 你也是. 중국어회화 1과 10번째 단어였던 '너도'를 연습할 때 룸메이트였던 노어과 언니가 그랬었죠, 발음 예쁘다. 그렇게나 예쁜 말, '너도' 이후 우리는 다음 날 공항까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으니까요. 타이베이에서의 마지막 밤을 채운 외국어, 너도.

그렇게


사랑에는 사랑과 밤뿐이었습니다.

MSN에서, 너를 좋아해,라는 말이 고백이 아닌 장난인 줄 알고 '나도 내가 좋아요'라고 치고 엔터를 누른 시간은 새벽 세시 이십 분. 그래, 자야겠다, 난 너 꿈꿀 테니 너도 네 꿈꿔. 긴 밤의 대화는 장난으로 시작해 진심으로 삐끗했다가 장난으로 끝났습니다. 실은 저도 좋아했어요,라고 쓴 편지를 쓴 것도 밤이었는데 아침에 읽어보니 너무 유치해서 보내지 못했어요. 밤과 마음은 만나면 쉽게 유치해져서 만나서는 안 되는데, 밤은 천성이 여려서 마음의 물렁한 곳만 찾아 자리를 잡습니다. 마음은 밤을 이기지 못해 녹아 흘러 추억의 바다로 모여들어요. 그 광망함은 마치 그간 어둠을 짚고 겨우 헤처 나온 밤의 수와 비슷하여  

낮은 도수의 과일주를 한 손에 쥐고 밤 같은 바닷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옛 연인들은 여전히 과거의 지하철 개찰구처럼 몸에 힘을 주고 밀고 나가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첫 키스에 남아있는 거라곤 '첫 키스'라는 알량한 자존심뿐인 지금, 영원히 잊지 못할 것만 같던 전화번호가 풀지 못한 싸이월드 비밀번호보다 더 강하게 무의식 뒤로 잠겨 있습니다. 굳이 알아내고 싶지도 않은 지금, LH 표기가 선명했던 그의 주공아파트 뒤로 내리기 시작하던 눈의 배경도 마침 밤이었다는 건 선명히 떠오르는군요.  




회고록을 쓰게 되면 제목을 '밤의 비율'로 해야겠습니다. 제 인생의 절반은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밤이었습니다. 밤은 눈과, 밤은 가난과, 밤은 외국어와, 밤은 사랑과 정확히 오대오의 비율로 제 인생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어요. 오명으로 얼룩진 낮들이 인생을 할퀴어도 밤은 세상의 불을 끄고 아이의 배꼽 주위를 주무르는 어미의 손처럼 우리를 낫게 해 줍니다.

밤은 단순한 시간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보고 싶은 이의 얼굴 윤곽을 선명하게 해주는 마사지사이자 제 안의 증오와 분노를 사형시키는 집행자입니다. 감기걸린 영혼에 자주 내려지는 처방전이자 의식의 가나안 땅이고 반가사유상의 손끝이 가리키는, 태초의 극락입니다.


밤은 그렇게

마알간 시의 부모가 되어 정신과 활자에 탯줄을 잇습니다.

그곳에서는 밤이 전부의 비율을 갖겠어요,

무릇 태생의 태생은 밤에 이루어지니.





진샤와 폴폴이 시에 관한 모든, 뭐든 주고받습니다.

나는 왜 여기 서 있냐고 물으면
밤이 대답합니다
밤이 너를 태어나게 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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