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해군, 공군, 미군까지 한꺼번에!
모든 것이 다 미군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미군이 아니었으면, 우리 가족은 그저 평범한(?!) 육군 가족으로 지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육군대학교를 마치고 발령받은 화방사, 군인 가족 4년 차였으나 생소한 건 생소한 거였다. ‘화생방 방호사령부’라는 남편의 설명을 10번 넘게 듣고서야 익숙해진 그 부대는, 남편을 뜬금없이 미 8군으로 출근시켰다. 생각지 못한 새 일터였으나, 가라면 가는 것이 군인의 사명이었다. 이전 숙소였던 광명 52사단 무궁화아파트에서 약간의 고민할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가족 사정으로 서울에 남편 명의의 집이 있다 보니, 화방사 숙소에서 지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몇 번의 고민 끝에 유난히 추운 11월 초 어느 날, 후암 아파트를 방문해 보았다. 용산 미군 부대와 가깝고 공실도 많아 바로 입주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날씨 탓이었는지, 그곳은 무엇 하나 괜찮아 보이는 것이 없었다.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가는 골목길이 가장 큰 불만 요소였다. 당시 초보 운전자였던 내게는, 그 겨울 그 가파른 골목길을 운전하는 것은 당최 상상 불가였다. 아무리 집 앞이 이태원이어도 나갈 수가 없는 이상, 이태원은 그저 문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파트는 오래되었고 공실 집들은 하나같이 사람이 당장 살 수 없는 형태였다. 깨끗한 놀이터에서 놀던 내 아이가 쓰러져가는 모래 놀이터에서 놀 수 있을까, 아니 당장 보낼만한 어린이집이 있기는 한 건가. 2010년대 중반, 서울 한복판에 그런 아파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심란해져 버린 나의 얼굴이 신경 쓰인 남편은, ‘하늘’만 유심히 바라보더니 며칠 후 나를 데리고 성남으로 향했다. 서울공항 앞에 숙소가 있는데, 그 앞 미군기지 셔틀버스를 타고 용산기지까지 출퇴근할 수 있다고 했다. 또 미군기지가 용산에서 평택으로 이전하기까지 6개월가량만 지내면 평택에서 새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도 했다.
이미 후암 아파트를 봐버린 나였기에, 어디여도 좋다고 생각했다. 서울공항 앞의 공군아파트는 외관부터 깔끔하고 좋아 보였다. 지금까지 그런 군인관사는 본 적이 없었다. 혼자 괜히 설레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편은 무심히 그곳을 지나 바로 옆 우정아파트로 들어섰다. 세 동 중 유난히 오래되어 보이는 한 동으로 들어가더니 1층의 집을 보여주었다. 외관과 달리 집은 오히려 아늑한 느낌이었다. 햇살이 길게 들어왔고, 후암 아파트에 가득했던 곰팡이와 그로 인했던 우울감도 없었다. 평수는 작았지만 세 식구가 살기에 충분했다. 집 앞은 초보운전자에게 적합한 대왕판교로가 뻗어있었고, 10분 이내 판교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집을 보고 근처에서 먹었던 콩나물국밥은, 지금까지 먹었던 국밥 중 가장 뜨끈하고 든든하게 기억하고 있다.
2주 후 우리 가족은 그곳으로 이사했고, 남편은 아침저녁마다 자전거를 타고 서울공항 내 미군 셔틀버스 승하차 지점까지 달렸다. 공항이 앞에 있었지만, 이착륙 소리가 주는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없었다. 오히려 여러 전투기와 헬기를 가까이에서 보며 남편을 통해 배울 수 있었고, 공군 가족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렇게 공군의 기운을 받아 둘째를 임신한 채, 겨울과 봄을 무사히 보냈다.
용산기지의 막이 내리고 평택기지의 삶이 시작되었다. 우리 가족의 고민은 다시 시작되었다. 아무리 보아도 평택에 육군 부대가 없어 관사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힌트는 ‘바다’에 있었다. 해군 2함대! 남편은 급히 관사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고, 우리는 그렇게 포승읍 원정리 해군아파트에 입주한 첫 육군 가족이 되었다.
해군아파트에서의 삶은 모든 것이 상상 이상이었다. 집 앞에 도로와 공항뿐이었던 성남 아파트와 달리, 해군아파트 입구와 단지에는 아름다운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가득했다. 9층이었던 집에서는 거실 창 오른쪽으로 바다와 해군 골프장이 보였다. 웬만한 호텔 전망보다도 좋았다. 집이 넓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PX도 성남의 몇 배 커서 쇼핑의 즐거움도 덩달아 커졌다.
엘리베이터와 놀이터에서는, 심심치 않게 진해와 목포 사투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긴 분명 경기도인데, 남도의 바닷가에서 들을 수 있는 목소리들이 종종 들려왔다. 동해에서 왔다는 이들도 간혹 볼 수 있었다. 배를 타고 나가면 기본 2, 3개월은 들어올 수 없는 남편 때문에, 해군 가족들은 공동육아에 매우 익숙했다. 그들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아빠와 배우자를 한동안 못 보는 일상이 내게는 매우 신선했고 놀라웠다. 놀이터에서 만난 엄마들은 곧잘 ‘아빠가 무슨 배 타요?’라고 물어왔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두고, 다른 엄마들은 무슨 함, 무슨 함이라며 대답했다.
엘리베이터와 해군 마트에서 전투복 입은 남편과 함께 있을 때면, 흘끗거리는 시선을 적잖이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나에게는 다 똑같아 보이는 전투복이었지만, 해군과 육군의 전투복은 미세하게 달랐기에 해군과 그 가족은 남편의 전투복이 주는 이질감이 꽤 신선했을 것이다. 지금에야 나도 한 번에 육군과 해군의 전투복을 분별할 수 있지만, 그때는 그들의 눈길이 마냥 의아하기만 했다. 경계나 의심보단, 약간의 놀라움과 호기심 가득했던 해군 가족들의 표정을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다.
여름이면 해군아파트 내 물놀이터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해군 복지 중 으뜸으로 부러웠던 시설이었는데, 슬라이드까지 갖춘 나름 호화 물놀이터였다. 사용 때마다 사용자 기록을 해야 했는데, 무수한 ‘-함 소속’ 중 유일하게 ‘육군 화방사 소속, 미 8군 근무’로 적어야 하는 고충이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기록 담당 수병들에게 매번 간략한 설명을 하고 나서야 이용이 가능했다.
원정 해군아파트에서의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국군의 날 이루어진 ‘블랙이글스’ 축하 비행이었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기념식이 평택 2함대에서 이루어져 행사 준비로 분주했다. 기념식 전 며칠 동안은 전쟁을 의심할 정도로 머리 바로 위에서 나는 전투기 소리에 예민했었다. 그러나 기념식 당일, 태어나 처음으로 본 비행에 한동안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아름답기만 한 전투기 비행을 넋을 잃고 보다가, 어느 순간 그려진 원과 그 안에 채워지는 태극무늬에 나도 몰래 눈물이 흘렀다. ‘내가 군인 가족이구나, 강한 국군이 우리의 바다와 하늘, 내가 딛고 있는 땅을 지키고 있구나.’ 이 감동은, 곁에 있던 해군 가족들과 함께 해 더 크게 다가왔다.
공군의 기운을 받은 아이를, 가을의 한가운데 해군의 터전에서 출산했다. 출산예정일이 비슷해 친하게 지냈던 앞 동의 해군 가족은 위탁 교육을 받고 지금은 남편이 파병 갔다고 얼마 전 연락을 해 왔다. 또 해군아파트에서 떠나오기 전 가까워진 5층 가족은, 우리가 이사하기 전날 저녁 식사를 대접해주었다. 진해 사투리 가득했던 그녀는 나를 볼 때마다 ‘언니, 해군, 육군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대한민국 국군 가족으로 이렇게 만난 게 중요한 거예요’라고 말해 주었다. 지금은 미 해군대학원에 위탁 가 있고, 가끔 미국에서의 생활 사진을 보내주곤 한다.
용산의 DHL, 평택 험프리 기지의 워터파크, 핼러윈과 크리스마스 파티 참석 등 즐겁기만 했던 미군기지 생활을 마무리하고, 지금 이 글은 이천 특수전사령부 관사 아름수리아파트에서 쓰고 있다. 그 사이 우리 가족은 넷에서 다섯이 되었고, 남편은 사령부를 거쳐 707부대의 일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강하 훈련과 대테러 훈련을 비롯한 유명한 특전사 훈련을 거뜬히 소화해 내는 남편과 부대원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특전사 가족임을, 이렇게나 훌륭한 사람들이 나의 이웃임을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어진다. 특전용사들과 그들의 숨은 조력자 가족들이 이렇게 강건하게 존재하는 이상 대한민국의 일상도 무탈하게 이어져 나갈 수 있음을, 적어도 이곳의 사람들만큼은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군인 가족으로서 이만큼 특별한 경험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군인 가족이기에 이만큼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육군으로서 해군과 공군 관사를 체험해 보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삶을 직접적, 간접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육군과 여러 방면을 비교해 보기도 하면서, 한편으론‘대한민국 국군’이라는 자부심만큼은 육해공을 가리지 않고 같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이러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미군’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용산기지 시절 공군과 함께하였고, 평택기지 시절 해군과 함께하였다. 여러 인종의 미군 동료들에게 초대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고,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미군의 역량과 자부심에 놀란 적도 많았다. Go together, 양국의 굳건한 동맹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우리 가족에게 미군 문화를 경험하는 시간뿐 아니라 우리 공군, 해군이 얼마나 강하면서도 정겨운지를 깨닫는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이러한 기억을 토대로, 나는 오늘도 좀 더 특별한 군인 가족으로 거듭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