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월드에 마지막으로 글을 쓴 지가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블로그를 17년 여름부터 했으니 그전까지 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15년 5월에 태어난 첫째의 출산 후기를 싸이월드에 썼다는 것이다. 더 분명한 것은, 싸이월드 백업을 하지 못해 내 인생 최고의 명문이라고 생각하는 첫째 출산 후기를 영영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다.(너무나도 극 사실주의로 쓴 글이라 본 사람마다 자신이 출산하는 것처럼 아프다고 했다. 그 글이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첫째와 함께 태어난 나의 글, 먼저 보내 미안해.)
싸이월드는 사실상 올해 7월 폐업하였고, 올해 안에 도메인마저 사라진다고 한다. 완전히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하나의 기업이 사라지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특히 3040이라면 20대 시절을 가득 채운 추억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밤새며 파도 타며 그(?!)의 새로운 다이어리나 사진이 업로드되는 것을 기다렸다. 술 마시고 벌게진 채, 또는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찍은 사랑스러운 흑역사 사진들이 무수했다. 책 리뷰, 영화 리뷰, 세상 똥 철학 철철 넘치던 다이어리와 깨알같이 모은 포도알, 남들에게 선물할 때만 사던 도토리(얼마나 이타적인가!)까지. 나의 20대가 고스란히 녹아있던 그 공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아이 키운다며 게으름 피우다 백업 안 한 탓에 싸이월드의 흔적은 내 머릿속 말고는 찾아볼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친구들과 엠티를 다녀오면, 모든 사진은 싸이월드에 올리고 잘 나온 사진 몇 장은 페이스북에 올렸다. 나름의 이원화가 어느 순간부터 귀찮아졌고, 2013년 청첩장 사진은 죄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것으로 보면 그 이전부터 싸이월드와 '거리두기'를 했던 것 같다. 그 당시, 아니 출산 후기를 쓰던 5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싸이월드가 사라지게 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게다가 이렇게나 빨리.
역시나 나의 온라인 글쓰기 첫 판은, 싸이월드이다. 16화음 폰 사진부터 올린 걸 보면 2000년대 초반부터인 것은 확실하다. 때에 맞춰 BGM도 바꿔야 했고, 메인에 들어갈 장식도 사야 했고(위에 썼다시피 나의 결제 수단은 도토리가 아닌 '포도알'이었다. 도토리, 포도알, 이런 단어들이 내뿜는 그 시대의 냄새가 아직도 내 안에 그득하다.) 적당히 파도 타며 친구들 사진에 댓글 달고 방명록도 열심히 썼다.
2000대 후반부터 페이스북도 함께 했다. 좀 더 간결한 글을 사진 위주로, 그리고 개그 실력 뽐내는(!) 판으로 이용했다. 한 명 한 명 찾아갈 것 없이, 한눈에 모든 업데이트된 게시물을 볼 수 있어 획기적이고 편리했다.싸이월드는 어쩐지 시골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속마음을 털어놓아야 하거나 추억 뿜뿜하고 싶을 땐 싸이월드만 한 것이 없었다. 페이스북의 광고에 스크래치 받고 오면 싸이월드가 '어서 와 힘들었지 우쭈쭈'하는 마음으로 받아 줬다. 결혼도 안 했지만 친정의 느낌이 뭔지 알게 해 준 싸이월드였다.
7-8년 열심히 내 일상을 나열했던 페이스북을 갑자기 탈퇴했다. 모든 게시물 다 삭제하는 것으로. 모르는 외국인의 DM에 친절하게 대답했다. 친구가 된 기분이었으나, 점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의 많은 것을 그에게 털었다. 결국 내 안에서 그를 '사기꾼'으로 판정 내리고, 적어도 페이스북에서는 나를 찾지 못하게 '나'를 지웠다. 동시에 내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의 모든 역사도 지워졌다. 각오는 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아쉬운 사진과 기록들이 수를 셀 수 없다. 페이스북을 수놓았던, 20대의 영혼의 고향 같았던 수많은 미술관과 야구장 사진들이 오로지 내 머릿속에만 있다. 30대 들어 남긴 결혼 관련 사진 자료들과 신혼 초기의 모든 역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임신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가끔 싸이월드를 들렀다. 궁금한 이들의 싸이를 가도 그들의 시간은 과거 어느 한 때에 얼어 있었다. 나는 글이 그리울 때 싸이월드에 끄적였다. 아무도 보는 이 없었으나 괜찮았다. 내가 쓸 곳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됐다 싶었다.
둘째 임신하고 결혼 생활과 육아로 인해 자존감이 곤두박질칠 때, 블로그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글쓰기가 필요했다. 어딘가 풀지 않으면 정말이지 '82년도에 태어난 김지영'처럼 될 것만 같았다. 나의 자아가 많이 부식된 시기였다. 친한 동생이 습관처럼 해오던 말, 언니도 블로그 해 봐요 가 구세주처럼 떠올랐다. 그 후의 나는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블로그를 열었다. 우울이 나를 덮칠 때마다, '죽고 싶지만 블로그는 하고 싶어'의 심정으로 글을 썼다. 글이라기보다 들끓는 활자의 나열이었지만, 그 행위는 죽고 싶은 나의 생명 연장에 큰 역할을 했다.
대망의 브런치가 나에게 온 것은, 셋째 출산하고 8개월 후였다. 문집 모임 선생님이 '시'를 써보길 권했고, 시를 찾아 유랑하다가 브런치에 닿았다. 짧지 않은 재수생의 시간을 견뎌 지금 이렇게 '브런치 이후의 삶'을 살고 있다.
지금의 나의 글쓰기는 블로그와 브런치뿐이다. 디지털 글쓰기로서의 내 삶은 실질적으로 2017년부터이다. 나는 분명 2000년 초반부터 꾸준히 온라인 글쓰기를 해 왔지만, 그 어디에도 흔적조차 없다. 싸이월드의 맹렬한 신도였던 나는, 싸이월드가 이렇게나 초라하게 '역사 속 전설'로 사라지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볼 생각의 생각도 하지 않았다. 상상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그랬던 싸이월드가 없어졌다. 나의 20대와 30대 중반 역사도, 온라인 상에서는 순식간에 없어졌다. 마음 같아선 도메인 삭제되는 날 국민장으로 5일간 장례 치러주고 싶은 기분이다. 싸이월드, 영면에 드시고 우리 기억 속에는 영원히 살아남아 파도가 일렁이게 하소서.
나의 젊은 시절과 그 시절의 글을 담았던, 담고 있는, 담을 공간들
그렇기에 나는 같은 마음으로, 자주 브런치의 '사망'도 생각한다. 브런치는 지금으로선 50년쯤은 충분히 건재할 것 같다. 어쩌면 100년, 영원히 건재할 것이다.(제발 그러길 바란다.) 그러나 싸이월드의 일생처럼, 브런치도 어찌 될지 전혀 알 수 없다.내가 차곡차곡 쌓는 브런치 글들이, 잠을 줄여가며 써내는 모든 창작의 결과물들이 한 줌 재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당장은 아니겠지만(영원히 아니어야 하겠지만), 그럴 날이 올 때를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브런치가 여러 사정으로 아파올 때, 생명 연장의 호흡기를 달아야 할 때(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슬프다), 내가 머리 쥐어짜며 혹은 가슴 아파가며 창작의 산통을 겪으며 낳은 글들이 함께 사라지지 않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 지금은 막연히 생각만이지만, 그래서 방법 따위 생각하지 않고 있지만(브런치 측에서 방법을 제공할 것이다, 물론 그런 날은 오지 않아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러한 생각만이라도 늘 해두려 한다. 싸이월드처럼, 갑작스러운 이별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내 '기록된 인생'의 소멸을 허락하지 않게.
인스타그램 6살 유저이지만, 개인적으로 인스타는 글 쓰는 판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전적으로 '이미지' 기반의 SNS라고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텍스트보다는 '이미지'에 치중하여 사용한다. 페이스북을 삭제하고 SNS 허기져서(내 안에는 관종의 피가 들끓으니까) 시작한 인스타가 다행히 건재해서, 첫째의 돌 이후부터 성장의 기록이 남아 있다.
이렇게 나의 현재 디지털 저장소 정착지는 사진 기반 인스타와 활자 기반 브런치이다. 제발 또 다른 플랫폼을 찾아 유랑하는 일이 더 없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