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 냄비를 보아하니 전골인가 보다. 나 전골 좋아하는데. 밥 생각이 없었는데 자꾸 눈이 간다. 버섯전골인가? 아니면 만두? 날씨도 쌀쌀한데 전골 좋지. 달걀 풀어서 찍어 먹으면 맛있는데. 케이크처럼 달지도 닭발처럼 자극적이지도 않은 담백한 전골이라서 그런지 끌린다. 지금 난 무언가 먹고 싶은 생각도 먹을 준비도 안 됐는데 어떡하지. 밥이 있었나? 아마 없을 텐데. 2인분을 해야겠지? 우선 쌀부터 씻고 식사 준비를 슬슬 해야겠다.
예고 없는 손님이 자연스러워 눈치 채지 못할 때가 있다. 인사만 하는 옆집 사람이 아닌 같이 일만 하는 동료가 아닌 항상 근처에 있던 그 친구라면 말이다. 어쩌면 손님이라는 표현보다 침입자라는 표현이 맞을지 모른다. 그가 허락을 구하지도 내가 허락을 하지도 않았으니. 그렇다고 부담스럽거나 불쾌하지는 않다. 약속 따위 하지 않아도 같이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시니깐 말이다. 그와 일상다반사를 보내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나에게 그에 대해 질문을 한다. 우리의 관계를 의심하며 추궁하다가 어울린다며 뜬금없는 축복을 했다. 참 어리둥절하다. 그저 친한 친구 사이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며 손사랫짓했다. 요즘 둘이서 밥도 먹고 술자리를 빠져나와 편의점을 가곤 했다만. 단둘이 영화를 본 적은 없으니. 물론 그가 별로라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만큼 담백한 사람을 찾긴 힘들지 모른다. 달콤한 말로 꾀는 사람보다 자극적인 행동으로 유혹하는 사람보다 어리숙해도 훨씬 진국이다.
그는 어제와 변함없이 행동하는데 오늘따라 괜히 눈빛이 다른 것 같다. 에이, 친구잖아. 그럴리가 없다. 아니 실은 예전에 그가 했던 행동들에 의미부여를 하기 시작했다. 저번에 혼자 밥 먹는다고 하니 친구들 제쳐두고 나랑 햄버거 먹으러 가고 흰 셔츠를 입은 날 우산이 없다 하자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왔었다. 이거 나를 좋아해서 그런 건가? 그와의 연애를 상상만 해봤다. 우린 성격이 비슷하긴 하다. 뭐, 취향도 얼추 잘 맞는 편이긴 하다.
오늘도 그는 나를 집에 데려다줬다. 취기가 올라서인지 그는 내게 어깨동무를 했다. 이러면 애들이 오해한다고 하자 그럼 더 좋다고 말했다. 잠깐 멈춰 세워 무슨 뜻인지 되물었다. 실수였다. 친구들이 내게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지만, 아직 확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서두른 예감이 적중했다. 밍밍하고 영양가도 없는 백미 같은 날 좋아한단다. 아마 내가 잡곡밥 정도는 되는 줄 아나 보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내가 좋은 사람인 줄 모두가 착각하고 있다. 주변의 환호에 놀라 종종걸음으로 가고 있다. 한시바삐 친구 그 이하를 향해 가고 있다.
나는 사실 취사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씻은 쌀에 물을 맞춰 넣어 놓기만 했을 뿐. 풍겨오는 전골 냄새가 좋다. 하지만 자신이 없다. 연이은 케이크와 닭발에 이미 지쳐버렸다. 그리고 지치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도 그랬다. 무슨 법칙이라도 있는 것 마냥 씻어 놓은 쌀이 불어도 여기서 멈췄다. 부담스러운 기운이 매번 무척 싫었으니까. 내 밥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되지 않을 예정이다.
밥이 필요 없는 전골.
얇은 소고기 300g, 깻잎, 숙주, 각종 버섯, 알배추, 멸치, 다시마, 양파 1/2, 간장 2큰술
1. 멸치, 다시마, 양파를 넣고 육수를 낸 후 간장을 넣어준다.
2. 알배추, 깻잎, 고기, 알배추 순으로 올려 쌓아 둔다.
3. 쌓아 둔 재료를 3등분으로 나눈 후 냄비 가장자리부터 큰 순서대로 차곡차곡 둘러준다.
4. 냄비 가운데는 숙주를 깔고 버섯을 그 위에 올려준다.
5. 준비해둔 육수를 부어 끓여주면 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