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 모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설한장 Jul 03. 2022

주간 씀 모음 3

운동장


  운동장 아래에 시체가 묻혀 있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유는 없었다. 비슷한 내용의 영화나 신문 기사를 봤다던가 하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교실에 앉아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무더위는 사람의 정신을 흐리게 한다.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이 생각도 무더위 탓일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게 올해는 지난 5월부터 유난히도 더웠으니까. 




상대


  둘이 손을 마주하고 앉아 내 헛된 망상이나 너의 백일몽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떠올리곤 했다. 너와 나의 시선 사이에서 그것은 이미 현실이었다. 내 손이 주인을 잃고 내가 마주보는 곳에 빈 공간만이 남아있는 지금, 우리가 만들었던 마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차갑고 객관적인 현실만이 남았다. 전혀 상관없는 제3자들이 만들어 놓은 현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좋은점


  자기가 좋아하는 일. 즐겁고 순수한 쾌락을 찾을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다는고 하는 건 이기적이라고 생각해. 

  온갖 규칙과 제약을 넘어서 진정으로 즐거워지려면 다른사람을 상처입히지 않으면 안되니까. 산다는 게 그런 거니까. 그러니까 다른사람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다는 건, 다른사람을 상처입힐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는 거야.  자신의 쾌락을 위해 희생된 사람의 슬픔을 직시할 생각이 없다는 거야.

  그런 점에서 난 그를 높게 평가해. 그는 적어도 다른 사람의 상처를 바라볼 줄 알거든. 그리고 그걸 즐길 줄 알거든. 그게 그의 좋은 점이야.




철탑


 어느 흐린 여름날 곧 밀어닥칠 비바람의 냄새를 맡으며 나는 철탑에 오르기로 결정했다.




가려진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횟불로 밝혀진 길을 힘 없이 걸어갔다. 그는 횟불 아래 번득이는 시선들을 느꼈다. 두 손을 채운 족쇄는 무거웠으나 연결된 쇠사슬은 앞장 선 병사가 매섭게 당겨댔다. 

  그가 매달릴 나무기둥이 어둠에도 식별 가능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남자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구름에 가려진 음산한 달빛만이 존재했다. 남자는 발작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탈출시도라기보단 최후의 몸부림에 가까운 그것은 옆에 서 있던 병사가 둔기로 남자의 다리를 가볍게 후려침으로서 막을 내렸다. 남자는 고꾸라졌으나 쇠사슬을 당기는 병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기에 남자는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남자는 나무기둥에 도달할 때 까지 더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남자를 나무기둥에 묶은 밧줄이 단단히 매이자 병사들의 우두머리격인 소녀가 남자 앞에 섰다. 그녀는 두꺼운 책을 펼쳐들고는 남자가 저지른 죄를 하나하나 호명했다. 남자는 이제 이 모든 일이 마치 다른사람 일인 것처럼 느껴졌기에 수 많은 죄명을 들으면서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고발이 끝나자 그제야 소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소녀의 눈이 밤의 어둠보다 더 짙고 새까만 것을 발견했다. 이윽고 소녀는 손짓했고 불이 타올랐다.

  세상을 뒤덮는 진홍빛 불을 뒤로하고 소녀는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간 씀 모음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