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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Jul 29. 2022

수프 카레

홋카이도의 풍경을 품은 음식


  갑자기 수프 카레를 먹어 보았다.


  사실 그렇게 갑자기는 아닐지도 모른다. 가까운 곳에 일본 수프 카레 전문점이 있고, 조만간 꼭 가보자는 이야기를 최근에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프 카레라는 낯선 음식을 처음 경험해보는 나는 갑자기, 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의 당혹스러움을 품고 있었다.

  수프 카레라니, 그건 도대체 어떤 음식일까. 이름 그대로 수프와 카레를 섞은 음식일까. 세상에는 참 다양한 음식이 존재한다지만, 그 중에서 꼭 수프와 카레를 골라서 섞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단 말인가. 그런 음식에서 대체 어떤 맛이 날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그건 자극적이고 매운 맛일까. 아니면 부드럽고 감미로운 맛이 날까. 혹시 이상한 향이 나면 어쩌지. 새로운 음식의 정체를 직접 맞이하기까지 그런 나의 걱정과 설렘은 계속 이어졌다.




  평일 저녁의 가게는 한산했다. 정갈한 냄비에 담긴 요리 사진이 곳곳에서 보였다. 수프 카레인 듯한 그것은 야채와 고기를 한 그릇에 깔끔하게 담에낸 모습이 일본 요리 느낌이 풍겼다. 돈부리나 라멘 가게에 가면 볼 수 있을 듯한 그런 사진이었다.

  잠깐의 기다림이 지난 후 등장한 실제 모습도 사진에서 보았던 그 느낌 그대로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수프 카레 옆에 밥이 담긴 큰 접시를 하나 준다는 것일까.



  걱정과는 다르게 이상하거나 자극적인 향은 나지 않았다. 은은하면서도 맛있고 식욕을 자극하는  향기. 익숙한 카레향이었지만 기분탓인지 조금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야채를 하나 들어올렸다. 작은 브로콜리였다. 용기를 내 한입에 넣자 아삭한 식감과 함께 알싸한 카레의 맛이 가득 배어나왔다. 하지만 매운 카레처럼 자극적인 맛은 아니였다. 깊이가 있고 풍부한 맛이 느껴졌고, 알 수 없는 향신료의 향이 풍미를 더했다. 이런 느낌이구나. 걱정과 설렘이 기쁨으로, 그리고 욕심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가지, 고구마, 삶은 계란, 튀김옷을 입힌 큼직한 닭다리. 어느 것 하나 깊은 향이 배어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흰 쌀밥에 수프 카레를 떠서 같이 먹자 몸속까지 부드러운 향이 전해졌다. 이런 음식을 앞에 두고는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해지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리라. 나는 조금 전까지 품고 있던 걱정을 모두 잊은 것처럼 식욕에 몰두할 수 밖에 없었다.


  먹으면서 이 요리가 홋카이도에서 처음 등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속으로 역시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음식은 아무래도 추운 계절에 어울리는 음식이라고 느끼던 참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 추운 지방에선 흔한 풍경일지도 모른다. 그곳에 작은 오두막이 하나 있어서 사람들은 그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일까. 혹은 길을 잘못 든 여행자일까. 그 사람들 가운데는 모닥불이 타오르고, 위에 있는 냄비에선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들린다. 바깥에서는 매섭게 부는 바람 소리가 가득하지만, 이곳은 그런 바깥과 단절된 공간이다. 조금씩 향기로운 냄새가 퍼진다. 온기가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어 이윽고 스멀스멀 기어오는 한기를 물리친다. 각종 야채와 고기가 들어간 냄비가 끓어오를수록 눈보라는 멀어지고 따스한 향기는 가까워진다. 이윽고, 요리는 사람들의 손에 넘어간다. 뜨거운 국물이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간다. 향기가 온기를 싣고 몸 구석구석으로 퍼진다. 척박한 장소, 혹독한 계절이지만 사람들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피어 오른다.

  먼 나라의 소설을 읽으다 보면 그런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그 시절 글에서 읽은 냄비 속 스튜가 어찌나 따듯하고 맛있어 보였는지. 지금 눈 앞에 있는 수프 카레가 그 시절 떠올렸던 스튜와 같은 모습이었다. 아직 스튜를 실제로 먹어본 적은 없으니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 홀로 상상한 스튜의 맛은 분명 이런 느낌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한결 한가롭고 느긋해진 기분이 몰려왔다. 마치 작은 모닥불 앞에서 타오르는 불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매서운 세상은 저 멀리 멀어지고 따스하고 아늑한 공간만 남은 느낌이었다.

  무더운 열기가 불어왔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었다고 하더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태양 아래에서 눈보라를 떠올리다니, 수프 카레에 한 그릇에 담긴 내 감상은 이렇게 현실과 어긋난 것이었다. 그래도 내 안을 감싸고 퍼지는 음식의 향기는 이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여운을 추운 겨울이면 아마 더 잘 느낄 수 있으리라.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내다 보면 참 새로 기대할 것이 없는 일상이지만, 그래도 올 겨울에는 새로 기대할 것이 하나 생겼다. 그건 분명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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