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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Aug 21. 2022

주간 씀 모음 9

어느 여름 날의 하늘



날짜


시간에 스며든 약은 감정을 무디고 둔하게 만들었다.

어느새 날짜 세는 것을 잊었다. 그토록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건만, 그래도 하루는 똑같았고 익숙함만 늘어갔다.

가끔은 생각했다. 익숙함은 착각일 뿐이고, 나는 여전히 몸부림치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하고.

그러나 긴 시간 앞에서 그런 상념은 허무하게 흩어져 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여행지


어릴 적 찾아갔었던 여행지의 꿈을 꾸었다.

찬란한 하늘, 흘러가는 구름, 천진난만한 미소가

눈에 새겨져 떠나질 않았다.

그때는 그랬었구나.

마치 다른 사람 일처럼 느껴지는 낯선 감정에

가슴이 뛰었다. 



여름밤


살다 보면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중 대부분은 후회와 고통,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트라우마에 가까운 것이지만, 일부는 아름답다 할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래. 지난 여름밤, 쏟아지는 별빛 아래에서 감미로운 공기를 마시던 그 순간처럼 말이다. 



하루하루


오늘도 하루를 새긴다.

별다를 것 없던 시간이 저물어간다.

그 너머로 아득한 밤하늘이 나를 반긴다.

하루하루 동그란 자국을 남기며 지나가는 별빛 이외에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기대가 또 있을까. 



낯선


산책은 잠깐 죽는 일이라고 에쿠니 가오리는 말했다. 일상에서 벗어난 곳, 익숙한 삶이 잠깐 끊어진 그 지점에서 우리는 잠깐 죽었다 깨어난다. 그렇구나. 일상에 불쑥 들이밀고 찾아온 낯섦은 우리에게 죽음을 선물해주고 있었구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깨달음이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올려다본 하늘은 하늘색과 주황색, 파스텔톤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낯선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나는 분명 잠깐 죽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나 하늘 사진을 한 장 남기고 발을 옮겼다. 짧은 죽음이 갈라놓은 과거의 나는 뒤에 내려놓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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