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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Aug 29. 2022

주간 씀 모음 10

아마도, 7월


도심


도심의 야경이 반짝였다. 반쯤 내린 창 밖으로 시원한 밤공기가 들어왔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모습이 백미러에 비쳤다.

“좋다. 역시 서울에서 살아야 하나.”

술기운이 돌았지만 산뜻한 목소리였다.

“어서 올라오라니까.”

“한 번 지방으로 내려가면 다시 서울 오기 힘들다고 그러던데, 정말인가 봐.”

“힘들게 뭐가 있어? 그냥 오면 되지.”

정말? 너, 힘들지 않겠어? 그런 목소리가 들리리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대신 쿡쿡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방심하면 반짝이는 야경이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나는 다시 정면에 집중하며 서서히 핸들을 돌렸다. 불어오는 바람이 우리가 탄 차 안으로 무언가를 데려다줄 것 같은, 그런 밤이었다.



변하지 않는


“달라진 점은 없었나요?”

“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건 일종의 ‘변하지 않는 것’에 속한다고 늘 여겨왔기 때문이다. 마치 가족에게서 풍기는 냄새처럼. 늘 찬장 한쪽에 놓여 있는 할아버지 전용 수저처럼. 아침에 비친 태양빛에 눈이 시린 것처럼.

그런데 이제 와서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란 듯이 들이밀고 오다니.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그에게 끌려다니며 온갖 검사를 받았다. 괴상한 검사에 곤욕을 치르다 보니 진료실에 놓여 있던 작은 의자 생각이 간절했다.

그는 녹초가 된 내 앞에서 검사 결과지를 이리저리 휙휙 넘겼다. 그러더니 말했다.

“이런. 색이 변하셨군요.”

그가 보여준 사진에는 내 몸속에 있는 노란색 돌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아. 저건 원래 검은색이었는데. 확실히 달라졌긴 하구나.

“이건 꺼낼 수밖에 없겠네요.”

그의 선고에 나는 기절할듯한 심정이었다.



단순하게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살기 위한 삶의 지침’은 최근 5년간 베스트셀러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는 책이다. 정신없는 삶에 지친 많은 현대인들로부터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인기에 힘입어 지금은 시리즈가 3편까지 나왔고, 세 권 모두 베스트셀러 서가에 차례로 늘어서 있다. 당신이 그중 어떤 책을 펼치던, 단순한 삶을 위한 자세한 지침을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 볼 수 있는 지침의 수는 세 권을 모두 합쳐 1500개에 이른다. 작가는 시리즈를 계속 집필하여 지침의 수를 5000개까지 늘릴 예정이라고 전했다. 앞으로도 이 책의 인기는 계속될 전망이다.



이대로


늘 앞을 향해 걸었다.

얼굴은 꼿꼿하게 세우고 어깨는 넓게 편 채로.

눈앞에 다가오는 세상을 의연하게 맞이했다.

힘든 시간이 지날수록 실력은 늘었고 경험은 쌓였다.

나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고 늘 진보했다.

과거에는 의미가 없으며 지금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발판일 뿐.

잠은 죽어서나 자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소리쳤다.

그 길의 끝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언젠가, ‘이대로가 좋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날을 위해 나는 걸었다.



갈증


살다 보면 참지 못할 갈증을 느낄 때가 있지? 왜, 생각해봐. 찜통같이 더운 여름날이라던가, 한 시간에 걸친 운동을 막 끝냈을 때라던가, 뜨거운 사우나에서 나와 몸을 식히고 싶을 때라던가. 그럴 때면 시원한 물 생각이 간절해지곤 하지? 나도 마찬가지야. 평소에는 별 문제없지만 가끔 그렇게 타는 듯한 갈증에 빠질 때가 있어. 그럼 별 수 없는 거지 뭐.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런 생리적인 욕구는 참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때가 되면 내가 필요한 건 오직 하나야. 너처럼 밝고 생기가 도는, 내 이상형에 딱 들어맞는 사람의 피 한 방울. 그걸 마시면 타는 듯한 갈증은 사르르 녹아 사라질 거고, 나는 다시 평범하고 일상적인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이제 알겠지? 네가 여기에 그런 꼴로 누워있는 이유를.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그래도 네가 조금은 날 이해해주길 바라. 알고 있어? 우리에게 있어 피를 마시는 행위는 좀 특별해. 네가 이해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아마 사랑을 거절당한 소녀처럼 상처 입을지도 몰라. 그리고 이 갈증의 고통 속에서 서서히 타 죽게 되겠지. 끔찍한 모습일 거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래도 네가 그 모습을 보길 원한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지. 나도 잘못한 게 있으니까.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 선택은 오로지 네 몫으로 해 두고 싶어.

자. 이제 됐지? 나는 이제 갈증이 한계에 다다랐고, 너도 마음을 굳힌 모양이니까.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나는 원망하지 않을 테니까. 이제 시작할게. 음, 손을 조금만 들어줄래? 다리는 조금 아래로 내리고. 고마워. 자, 그럼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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