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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Sep 06. 2022

주간 씀 모음 11

관심사


관심사 하나 하늘에서 톡 떨어진 오후

찾는 이 하나 없는 들판에 놓여


어디로든 굴러가서 닿으면 좋으련만

땅에 물들어 움직일 생각이 없네



배낭


야, 야, 하는 소리가 몇 차례 들리더니 퍽 하고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무겁다고 했잖아!”

그녀가 참지 못하고 휘두른 주먹이 오른쪽 어깨를 정확히 강타했다.

“그러게 질게 뻔한 내기는 하는 게 아니라니까.”

슬쩍 놀리자 주먹이 또 날아왔다. 아프다. 주먹을 보지 못했다면 뾰족한 돌로 내리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대체 안에 뭘 넣어서 다니는 거야?”

“뭐 대단한 건 없어.”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자세히 말해봐야 내 입만 아플 것이 뻔했으니까.

“너 무슨 흉기라도 들고 온 거 아니야? 수상해.”

우리는 둘이서 인적이 드문 산길을 올라가고 있던 참이었다. 내 배낭에 정말 그런 흉흉한 물건이 들어 있다면, 지금은 썩 그럴듯한 스릴러의 한 장면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러나 난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무리 잘 만든 스릴러라도 주인공이 이 모양이면 제대로 될 리가 없으니.

그럼에도 일단 그녀의 말은 맞았다고 인정해두자. 내 배낭에는 정말로 흉기(혹은 그렇게 부를만한 물건)가 가득 들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앞으로 할 일은 그녀가 떠올린 불온한 상상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정말 손해 보는 역할이다. 끝없이 투덜대는 그녀의 목소리만이 내 신세한탄을 거들어 주었다.



각오


스스로 고통을 짊어질 각오를 하는 것은 어렵지만,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최소한 자기 연민이라도 품을 수 있을 테니까.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줄 각오를 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내가 받은 기대와 호의를 거절해야 하는 경우가 제일 심각하다. 이럴 때는 자기 연민도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당신이 가지게 될 것은 볼품없는 자기혐오와 이기적이고 사악한 모습뿐이니까.

그래도 때로는 필요한 일이다.

주어진 기회에 필요한 일을 행하지 못한다면 당신의 삶은 길을 잃고 목줄에 끌려갈 것이다.

그건 그 어떤 경우보다 끔찍한 일이고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남는 시간


저는 여유 있는 삶을 사랑해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그렇진 않아요. 살다 보면 그런 날 있잖아요. 수업이 일찍 끝나거나, 혹은 조퇴를 했다거나 해서 날이 밝을 때 밖으로 나온 날이요. 그럴 때면 쏟아지는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그렇게 설렐 수 없어요. 파란 하늘은 오늘이 아직 많이 남았다고 알려주고요. 매일같이 저를 재촉하던 시곗바늘도 잠시 멈추고, 마치 무한한 시간이 눈앞에 늘어서 있는 것 같아요. 이런 감정을 저는 사랑해요.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저는 최대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요. 어떻게 하면 이 복잡한 삶에 잠시 쉼표를 두고 그런 여유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른들은 철이 없다며 핀잔을 주거나,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하는 친구들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지만요. 저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고 있답니다.

다행히 저희 부모님은 제 의견을 잘 들어주시는 편이에요. 억지로 학원을 보내시지도 않고요. 그래서 저는 어느 정도 제 생각대로 여유로운 시간을 누리며 지내고 있어요.

어제 있었던 일이에요. 저는 학원을 가는 친구를 배웅하고 근처에 있는 서점에 들렀어요. 사고 싶은 책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서점이란 곳이, 책이 정말 많잖아요? 새로 나온 신간이나, 그동안 못 발견했었던 책들을 이리저리 보고 있자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버리고 말았어요. 서둘러 책을 사들고 나오자 밖은 어느새 캄캄한 밤이 되어 있었어요. 오늘의 여유로운 시간은 책과 함께 보냈구나, 하는 생각으로 아쉬움을 달랬어요.

어두운 거리를 지나 집으로 향하자니 평소와 다른 기분이 들었어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밖을 걷는 건 드문 일이었으니까요. 거리 곳곳에는 저와 비슷한 또래의, 익숙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았어요.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다들 뭐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스치자 곧 이곳에 주변 지역에서 유명한 학원가라는 사실이 떠올랐어요.

다들 시간을 힘껏 쏟아부으며 공부하고 있구나. 한눈에 알 수 있었어요. 팔랑이는 시험지, 무거운 책가방, 눈물짓는 눈, 심각한 표정, 재빠른 발걸음. 얼마나 열성적으로 노력을 해야 저런 분위기를 풍길 수 있는 걸까요. 그렇게 생각하자 대단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저처럼 변변치 못한 사람이 끼어든 것 같아 어쩐지 부끄러워졌어요.

덩달아 빨라진 발걸음으로 이 엄청난 곳을 벗어나면서 저는 생각했어요. 제게 있는 여유 있는 시간을 잘 모아뒀다가 그들에게 나눠 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저는 분명 그 시간들을 사랑하지만, 왠지 저보다는 그들에게 더 필요할 것 같았어요. 저처럼 느긋한 사람보다는 저렇게 열성적으로 시간을 쏟을 줄 아는 사람에게 건네주는 편이 세상을 위해 더 좋을 것 같다고나 할까요.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에 빠지는 시간도 저 사람들에겐 가치 있는 시간일 수 있으니까요.

부디 제가 사랑해마지않는 여유로운 시간이 그들에게 가서도 충분히 사랑받기를. 만약 시간을 건네주게 된다면 제가 바랄 것은 그거 하나뿐이에요.




나침반


나침반은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 한이 아무리 손에 쥐고 있어도 바늘은 방향을 잃은 채 뱅글뱅글 돌 뿐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일행들의 얼굴에서 실망과 짜증이 한가득 묻어났다. 미나가 소리쳤다.

“야, 누가 저런 놈 데려가자고 했어?”

“가만히 좀 있어 봐.”

“세 시간째 저러고 있잖아! 너,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나가고 싶긴 한 거야?”

잭은 입을 다물었다. 그나마 한에게 호의적이었던 잭이었지만, 그 역시 이제는 참을 수 없는 짜증에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잭이 물러서자 더 이상 미나의 화풀이를 제지할 사람이 없었다. 한은 연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며 용서를 구해 보았지만 곧 미나의 발차기에 얼굴을 맞아 그마저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딴, 머저리 같은 게, 죽어, 그냥 죽어.”

계속해 쏟아지는 폭력을 한은 그저 웅크린 채 버텼다. 이 정도는 견뎌내야 했다. 반항이라도 했다간 발차기 같이 가벼운 걸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그때, 땅에 떨어진 나침반이 반짝, 하고 빛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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