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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Oct 11. 2022

주간 씀 모음 16

무더운 하루


나를 믿어주지 않는 거야.

속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린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생각보다 큰 목소리에 스스로도 놀랐다. 그러나 그건 숨겨온 본심을 호소하는 목소리라기보다는, 무더운 열기 아래 답답하게 억눌렸던 가슴이 미어터진 듯한 소리에 가까웠다. 누군가 이 마음을 알아달라는 어리광 섞인 표현이었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했겠지. 뿌리 깊은 오해는 이윽고 더 큰 상처를 만들기 마련이다. 우리 가족은 언제나 여유롭고 생글거리는 웃음 속에 있었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정말이지 무더운 하루였다.



일정


느긋하게 걸어가는 아이야, 몸을 일으켜 달려라.

시시각각 새겨지는 일정이 너를 잡지 못하도록.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더 뛰어라.

시간은 모두에게 평등하지만, 기다려주지는 않으니.


눈앞이 새까매질 때까지 달려라.

죽음의 포근한 어둠만이 이 경주를 멈춰 줄 테니.



맥락


떠나간 사람이 남긴 물건. 네가 놓고 간 공책은 그런 의미에서 무척이나 애틋한 것이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맥락 없는 문장들 속에서 나는 길을 잃을 지경이었다.

가령, “누군가 내 책상 위에 꽃병을 올려놓았다. 그 아래로 보랏빛 수국이 꽃잎을 한 장씩 떨구었다.”라는 문장을 보았을 때. 너에게는 꽃병은커녕 책상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건만, 천연덕스럽게 써 놓은 글에서는 생동감마저 느껴졌다. 단어와 단어 사이가 만들어내는 운율이, 그 행간 사이에서 짐작할 수 있는 파문이, 내 마음까지 그대로 흔들었다.

너는 무엇을 바라고 이런 글을 써 놓았을까. 훗날 이 공책을 손에 들 내가 어떤 심경을 겪기를 바랐을까. 불친절한 미스터리는 그렇게 정답을 밝히지 않은 채로 멀어져 가기만 했다.



수집


나는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펜을 들고 흰 공백을 마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물론 다양한 세계의 이야기이다. 어떤 곳에서는 용이 날아다니며 마법을 부리고, 또 어떤 곳에서는 시커먼 은하를 배경으로 우주선이 격돌했다. 나는 햇살이 비치는 아름다운 숲 속에 숨어 있는 투명한 샘물을 알고 있으며, 음침하고 사악한 생물이 가득해 도저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숲도 알고 있다. 사막에 묻혀 있는 신화와 눈 덮인 빙하를 깨는 영웅도 만났고, 감미로운 노래와 함께 흘러드는 악마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곳에 수집된 채 잠들어 있었다. 언젠가 지축이 흔들리고, 무덤을 덮던 모래가 흘러내릴 날이 오면, 오랜 잠에 숨어 있던 모습이 드러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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