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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Oct 17. 2022

주간 씀 모음 17

빠르게 찾아오는 저녁


느긋함


가운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적막한 공기가 가라앉았다. TV라고 켤까, 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고요함을 만끽하고 싶었다.

자, 이제 무엇을 할까. 이곳에는 정신을 흐릴 술도 없고, 시간을 죽일 말동무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피로에 절여진 이 몸뚱아리와 먼지가 가라앉은 공기뿐.

좋아. 나는 기분 좋게 몸을 쓰러뜨렸다. 한 없이 느긋한 시간이 나를 기다렸다.



이맘때쯤


“작년 이맘때쯤이었나.”

“응?”

서윤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눈동자 안에 담긴 의미를 파악했다.

“맞아. 작년 이맘때쯤.”

“그렇군.”

그는 웃었다. 서윤은 그 자조적인 웃음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웃음을 만들어내는 둘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바닷바람을 가만히 맞고 있자니 몸이 차게 식어갔다. 발코니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풍경은 객실의 가격만큼이나 값진 것이었지만, 거니는 사람 하나 없이 황량한 모습이었다.

“이제 들어갈까.”

“그래. 춥다.”

방 안의 따듯한 공기를 맞으며 서윤은 내년 이맘때쯤에도 그와 함께 있을지 헤아려 보았다. 어쩐지 먹먹하면서도 허무함 감정이 그녀를 즐겁게 했다.



신기루


달콤한 사과가 언제부터인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사과는 언제나 신기루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사과는 늘 그곳에 있다.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원하지는 않으리라.

두려움은 내 손을 재촉했지만, 결코 사과에 손 끝이 닿는 일은 없었다. 문득 나는 깨달았다. 신기루와 같았던 것은 사과가 아니라 손을 뻗고 있는 내 모습이라고.



솜사탕


솜사탕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솜사탕은 왜 그렇게 반짝이고 달콤해 보일까요. 실제로 먹어보면 너무 달거나, 금방 녹아 끈적거리곤 해서 제대로 끝까지 다 먹은 적이 없는데도 말이에요.

‘솜사탕에는 환상이 깃들어 있구나.’

정말 그럴지도 몰라요. 솜사탕은 놀이공원이나 동화 속 마을 같은 환상의 나라에 잘 어울리는 느낌이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하기 싫은 일만 가득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종종 솜사탕이 떠오를 때가 있어요. 그건 역시, 제 마음이 환상을 바라고 있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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