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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Oct 24. 2022

주간 씀 모음 18

투명한 하늘


해방감


아직 불안함이 한 움큼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홀가분했다. 그래, 이를테면 학교를 조퇴하고 나와 한낮의 파란 하늘을 올려다볼 때의 기분. 있어야 할 장소에서 벗어나 누군가에게 혼날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눈앞에 펼쳐진 여유로운 시간은 매혹적이었다. 늘 보던 거리도 그때는 낯설게만 보였다.

잘 생각해보면, 삶 자체가 정상 궤도에서 이탈한 듯한 기분을 느낀 것이리라. ‘정상적인’ 삶, 그리고 그런 삶 속에 있는 모두에게서 멀어진 기분. 그건 분명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가슴을 꿰뚫는 해방감만큼은 나를 비추었다. 무서움을 잊도록, 그리고 다시 한번 설레일 수 있도록.


고의


방 안은 엉망이었다. 모든 것이 의도적으로 제자리에서 벗어나 있었다. 기존의 질서를 무시한 채 새로운 혼돈을 창조하고 있는 그 공간은 너의 고의로 가득 차 있었다.

좋은 일이었다. 나는 최악의 가능성, 즉 방 안이 아무 변화 없이 그대로인 상황을 피한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의로 어질러놓은 방 안에는 너의 뚜렷한 주관과 깊은 감정이 한가득 흘러넘치고 있었으니까. 그 모든 것이 너에게로 다가갈 수 있는 힌트였다.

나는 너의 친절한 고의에 감사했다.



점심시간


점심시간만큼은 이기적으로 살기로 했다.

무언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냥 일터 밖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낼 뿐이며, 지난한 일 이야기를 좀 덜 입에 담을 뿐이다. 그래도 어쩌면, 그 작은 차이가 한 줄기 바람이라도 몰고 와줄지 모를 일이다.



느긋하게


의외였다. 모두가 바쁠 시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이 정신없는 와중에도 홀로 여유로웠다. 우리의 정신을 뒤흔들던 시간조차 그의 곁에서는 느긋하게 기어가는 것 같았다.

“그냥, 날씨가 좋아서.”

내 의문스런 눈초리에 그는 그렇게 답했다. 고개를 드니 그의 말대로 쾌청한 하늘이 보였다. 조각구름 하나가 유유자적 흐르고 있었다.

의심, 걱정, 부당함.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감정을 가슴속에 잘 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저 파랗게 갠 하늘은 그 모든 걸 잊고 싶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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