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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Apr 15. 2022

[짧은 동화] 여자와 기생충 01

  어느 작은 마을에 어린 소녀와 소년이 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친했던 둘은 아침이 오면 앞다투어 서로를 깨우며 햇살 속을 뛰어다녔고, 오후가 되면 이름 모를 꽃들이 자라난 뒷산에 올라 다람쥐와 토끼를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서로의 집에 들러 살며시 얼굴을 내밀고는 손을 잡고 심부름을 다녔습니다. 어느 따듯한 계절에는 몰래 집을 빠져나가 쏟아지는 별을 보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소녀와 소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붙어 다녔고 마을 어른들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했습니다.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성인이 된 둘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서로에게 청혼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식이 열렸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진심으로 두 사람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제 막 어른이 된 두 사람은 앞으로도 서로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언제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반자가 되리라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맹세하였습니다.


  이제 서로의 집에 찾아갈 필요가 없게 된 둘은 새로운 일상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지녔던 장난스러움과 천진난만함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서로를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만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렇게 다정한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남자는 집 앞에서 한 노인을 만났습니다. 노인은 이웃마을에 사는 상인으로 남자가 사는 마을에서 귀중한 상품을 구입한 뒤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욕심이 지나쳤던 탓인지, 짐이 생각보다 무거워 도저히 들고 갈 수 없었습니다. 남자는 노인의 상황을 듣고는 흔쾌히 도와주기로 하였습니다. 이웃마을까지는 반나절이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리였고, 짐은 노인에게는 무리였지만 젊고 건강한 그에게는 가뿐히 들어 옮길 수 있는 크기였기 때문입니다. 노인은 짐을 번쩍 들어 옮기는 남자에게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말을 하며 길을 안내했습니다.


  작은 숲 속에 난 오솔길을 따라 걷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마을의 전경이 보였습니다. 남자는 마을 안에 있는 상인의 가게까지 무사히 짐을 옮겨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돌아서는 남자의 손을 붙잡고는 반짝이는 금화 한 닢을 쥐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도와준 사람을 빈 손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상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노인이 억지로 손에 쥐어 주는 금화가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감사의 표시임을 깨닫고 받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왕 이웃마을까지 온 김에 여자에게 줄 선물을 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선물을 사 들고 돌아갈 생각을 하자 남자는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마음을 안고 어떤 선물이 좋을지 고민하며 마을을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여자가 기뻐할 만한 선물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찾아 헤매던 남자의 눈에 작은 공터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공터는 마른 흙과 모래만 남겨져 있는 황량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별 볼 일 없는 공터 한 구석에 눈길을 잡아 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건 작은 들꽃이었습니다. 쓸쓸한 공터에서 홀로 피어난 꽃은 이상하리만치 아름다웠습니다. 잎사귀는 싱그러운 아침 이슬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생기가 넘쳤고, 꽃잎은 햇빛을 담아내는 것처럼 반짝였습니다. 살랑거리는 풍경이 밀려와 남자를 감쌌습니다. 어린 시절 그녀와 함께 뛰어놀던 뒷산에서 보곤 했던 풍경이었습니다. 한가득 피어난 꽃들과 그 사이를 누비던 그녀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했습니다. 남자는 들꽃을 두 눈에 새긴 채 마을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금화 한 닢으로 작고 예쁜 화분을 사 와 들꽃을 조심스레 옮겨 담았습니다. 바람을 머금고 춤추는 들꽃의 모습은 작은 화분 안에서도 남자의 마음을 간질였습니다. 벌써 기뻐할 여자의 얼굴이 눈에 선했습니다. 그는 환한 미소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남자는 전혀 깨닫지 못했지만 사실 들꽃 옆에는 작은 기생충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기생충은 이 척박한 곳에서 홀로 자라난 들꽃을 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작은 씨앗에서 피어난 꽃은 뜨거운 태양과 무거운 빗물을 홀로 견디며 아름다운 꽃잎을 피워냈습니다. 그 경이로운 모습에 감명받은 기생충은 들꽃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들꽃도 늘 곁에 있던 기생충이 마음에 들었는지 기생충이 찾아올 때면 잎사귀를 들어 햇빛을 가려주었고, 꽃잎 사이로 숨겨두었던 이슬도 떨어뜨려 주었습니다. 척박하고 쓸쓸한 땅이었지만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남자가 나타나 들꽃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기생충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거대한 남자는 금방이라도 작은 기생충의 몸을 짓밟아버릴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남자의 손에 들린 들꽃을 보자 온 몸을 휩쓴 두려움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그 대신 이제 다시는 들꽃과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끔찍한 생각이 샘솟았습니다. 기생충은 사시나무 떨 듯 떨던 몸을 추슬러 온 힘을 다해 남자에게 내던졌습니다. 비록 남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지만, 기생충은 남자의 바지 밑단에 매달릴 수 있었습니다.


  남자는 바지에 기생충이 매달린 것을 까맣게 모른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여자는 남자가 가져온 뜻밖의 선물을 보고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남자도 오랜만에 장난기 넘쳤던 소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여자는 들꽃이 담긴 화분을 창가에 정성스레 올려놓았습니다. 창문 너머에서는 나른한 오후의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그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낸 들꽃은 밖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들꽃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앉아 오랜만에 어린 시절 이야기로 꽃을 피웠습니다.


  한편 기생충은 눈앞에 닥친 낯선 풍경에 떨고 있었습니다. 들꽃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일념은 마음속에 강하게 남아 있었지만, 들꽃이 담긴 화분은 기생충이 있는 곳에선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들꽃을 다시 눈에 담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여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기생충은 두려움을 떨쳐내려 노력하며 남자의 옷을 타고 기어올랐습니다. 혹시라도 남자가 눈치채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평생을 작은 공터 안에서만 지낸 그에게는 몹시 혹독한 일이었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발을 위로 옮길 때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살짝이라도 남자가 몸을 움직일 때면 떨어지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매달려야 했습니다. 그래도 기생충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척박한 땅에서 홀로 피어난 들꽃의 모습을 계속 떠올리며 용기를 내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신이 알아주신 것인지, 기생충은 무사히 남자의 머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 위에서는 머리카락 사이로 들꽃이 담겨있는 화분이 내려다보였습니다. 기생충은 들꽃의 무사한 모습에 안도하고 그 아름다움에 다시 놀랐습니다. 텅 빈 공터에 홀로 자라난 고귀한 모습도 좋았지만, 따스한 공기 속에서 햇볕을 받으며 빛나는 들꽃의 모습은 말도 못 할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들꽃도 자신을 바라보는 기생충을 깨닫고 꽃잎을 살랑거리며 흔들었습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 다시 소중한 존재를 눈에 담은 기생충은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나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함께 살게 된 넷은 다시 일상을 이어나갔습니다. 하지만 과도한 행복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이 세상에는 종종 있는 일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따스한 네 식구의 일상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브릿G에서 연재한 단편 소설입니다.


링크 : https://britg.kr/novel-group/novel-post/?np_id=376620&novel_post_id=15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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