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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Apr 15. 2022

[짧은 동화] 여자와 기생충 02

  사건의 발단은 작은 기생충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남자에게 붙어 지내던 기생충이 그만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기생충은 본래 무언가에 기생하는 존재입니다. 그 마음이 전염되기 쉽다는 것은 현자라면 누구나 알 법한 사실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넷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기생충 본인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일입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들꽃을 향한 넘치는 마음은 점점 남자에게 스며들었습니다. 기생충의 잠식이 시작되자, 남자는 조금씩 본연의 마음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머릿속은 온통 화분에 담긴 들꽃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달라지기 시작한 남자의 행동을 눈치챘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긴 시간을 함께해온 둘이었기에 여자는 남자를 믿었습니다. 작은 행동 변화를 별 일 아니라고 넘기며 행복한 나날이 이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여자의 믿음과는 다르게 남자의 행동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갔습니다.


  남자는 더 이상 여자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맑은 새소리가 들리는 아침에도,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도, 밤이 내려앉은 아늑한 침대 위에서도 남자는 여자의 말에 시큰둥하게 반응했습니다. 예전처럼 여자가 몸을 기대도 매정하게 밀어낼 뿐이었습니다. 남자는 말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무뚝뚝하게 변했습니다. 여자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함께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 보아도 남자는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집은 점점 싸늘하게 변해갔습니다. 남자는 잠든 여자의 모습을 더는 지켜보지 않았습니다. 매섭게 바람이 불던 날 함께 덥던 담요도 내팽개쳤습니다. 정성스레 끓여 함께 나누어 마시던 차도 더는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손가락을 베여 피를 흘릴 때조차 남자는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온종일 창가에 놓인 들꽃 앞에 앉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여자를 포함한 세상 모든 일들이 그에게서 잊혀졌습니다.


  한때 행복과 즐거움으로 가득했던 둘의 관계는 이제 차가운 침묵으로 채워졌습니다. 여자는 남자가 매몰차게 대하며 거절할 때마다 마음이 찢기는 것 같았습니다. 행복했던 과거와 함께 뛰놀던 기억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온몸을 짓누를 것 같은 슬픔 속에서도 여자는 남자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남자가 얼마나 따듯하고 좋은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함께 손을 잡고 마을을 거닐던 어린 시절부터 그의 마음은 늘 곁에서 함께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자가 하는 행동은 그의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아님을 여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자를 조심스레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차갑게 달라진 태도와 화분을 바라보고 있는 것 이외에는 좀처럼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여자는 그런 변화의 이유를 도저히 짐작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민하던 여자는 밤에 잠든 남자의 몸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머리카락 사이에 이상한 물체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세히 살펴본 여자는 그것이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는 기생충임을 깨달았습니다.


  놀란 여자는 이 기생충이 바로 남자의 행동을 바꾼 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장 남자에게서 떼어내고 싶었지만, 기생충은 남자의 머리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짐작하기 어려웠습니다. 현명한 여자는 성급히 기생충에 손대지 않고 일단 가만히 놔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마을로 나가 기생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수소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여자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기는 했지만 그런 기생충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기생충 때문에 남자가 그렇게 되었다는 말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떠나고 나자 마을 사람들은 그토록 사이가 좋았던 둘이 저렇게 되어버린 것을 안타까워했지만, 기생충 때문이 아니라 그저 남자의 마음이 변한 것일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여자는 마을을 여러 차례 돌고 몇 번은 이웃마을까지 다녀왔지만, 어느 누구도 기생충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대부분은 기생충의 존재를 믿어주지도 않았고, 그저 남자의 관심에서 멀어진 여자를 불쌍히 여기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는 게야.” 어떤 마을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저 시간이 약이지. 좀 참고 지내다 보면 나아질 걸세.”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모든 것은 그의 머리에 붙어 있는 기생충 때문이에요. 기생충만 해결하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예요.” 그리곤 기생충에 대해 알고 있을 누군가를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또다시 기생충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집을 나서던 그녀 앞에 한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키가 크고 찰랑거리는 파란색 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청년은 딱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이 작은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청년이 성큼성큼 다가와 말을 걸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코 앞까지 다가온 청년은 여자의 기분을 헤아리는 듯 잠시 표정을 살피더니, 이내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자 뒤에 있는 집을 가리키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기생충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오니, 마을 사람들이 이 집을 안내해 주더군요. 혹시 기생충에 대한 지식을 찾고 계신 분이 맞으실까요?”


  청년의 예의 바른 태도에 감명받은 여자는 마찬가지로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그의 말이 맞으며 그 사람이 바로 자신임을 밝혔습니다.


  “아무래도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군요. 다행입니다.”


  청년은 활짝 웃더니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먼저 제 소개를 해야겠군요. 저는 여기서부터 거대한 산맥과 어두운 숲을 두 차례나 거치고, 마치 바다처럼 넓은 강을 네 번이나 건넌 뒤, 온갖 사기꾼과 도적들로 가득한 촌락을 수십 번 헤쳐 나가야 도달할 수 있는 위대한 성도에서 왔습니다. 네, 생각하시는 바로 그곳입니다. 우리나라가 자랑하고 세계인이 감탄을 금치 못하는 우리의 수도 말입니다.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지만, 그 위대한 성도 한가운데에는 하늘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탑이 있습니다. 바로, 이 세상 모든 지식이 모인다는 푸른 상아탑이지요. 제가 일하는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여기서 청년은 다시 한번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습니다. 처음에 한 인사법과 다른 멋들어진 인사법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방금 이야기한 푸른 상아탑에서 행해지는 예법에 맞춘 인사인 것 같았습니다. 인사를 마친 청년은 조금 부끄러운 듯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습니다.


  “그렇게 너무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곳에는 전 세계에서 쟁쟁한 학자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는 합니다만, 저는 아직 배울 것이 많은, 이제 막 지식의 바다에 겨우 발 끝을 담근 별 볼일 없는 학자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어느 정도냐고 물으신다면, 그야 제 이름도 제대로 밝힐 수 없을 정도라고 할까요. 저희 학자들은 어느 정도 지식의 탑에 기여하지 않으면 이름을 밝힐 명예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런 족속들이거든요. 이렇게 정중하게 절 맞이해 주시니 저로서는 온 마음을 다해 제 이름을 밝히는 예의를 갖추고 싶은 참이지만, 학자로서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저를 막고 있음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여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실 그녀는 청년의 입에서 지식과, 학자와, 푸른 상아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시점부터 그것에 온 신경이 쏠려 인사나 이름 같은 건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대단한 곳에서 기생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 먼 곳까지 찾아오다니, 분명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여자의 마음에 조금씩 희망이 샘솟았습니다.


  “성도에서 이 먼 곳까지 와 주시다니,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정말,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제 나름의 역할이 있고, 또 앞으로 푸른 상아탑에서 쌓아 올릴 경험에 기여하기 위해 기꺼이 여기까지 온 거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청년은 잠시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눈동자를 통해 마음속을 이리저리 탐색하려는 것 같은 눈빛이었습니다.


  “그럼 제 소개는 이쯤에서 마치도록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그전에 먼저, 그 기생충을 제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을까요?”


  여자는 낯선 사람을 집에 들이는 것이 처음이라 조금 당황했지만, 그래도 직접 보여주는 편이 이야기가 빠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앞장서서 집 안으로 청년을 안내하였습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역시 예의를 잊지 않고 정중한 태도로 집 안에 들어온 청년은 곧 감탄한 듯 집 안 구석구석에 눈길을 주었습니다.


  “누추한 곳이지만, 편히 계셔주세요.”


  “이건 정말 아름다운 집이군요. 아니,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에서도 이렇게 기분 좋은 온기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집은 드물거든요. 이렇게 좋은 집에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과한 칭찬이세요.”


  “아니, 제 진심입니다. 이 따스한 공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바랄 정도로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저 역시 꼭 그러길 바라요.”


  청년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의 눈길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장소에 멈춰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아침 햇살을 홀로 독차지하고 있는 꽃 한 송이와 그 꽃을 망부석처럼 하염없이 바라보고 앉아 있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남자는 집에 손님이 들어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떤 반응도 없었습니다.


  여자는 청년을 조심스럽게 남자 옆으로 안내했습니다. 남자는 청년이 곁에 가까이 다가서도 두 눈을 꽃에 고정시킨 채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몇 마디 속삭인 뒤, 섬세한 손길로 머리를 이리저리 살폈습니다. 그 손길 사이로 작은 기생충이 모습을 드러내자 청년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눈을 크게 추켜올렸습니다.


  여자는 남자가 어떻게 이런 상태로 변했는지, 그리고 이 기생충을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남자에게는 그 목소리조차 전해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청년은 여자가 하는 말을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이내 문을 가리키며 손짓했습니다.


  “이거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습니다.”


  집을 나서자마자 청년이 말했습니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여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푸른 상아탑에서 지내다 보면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기생충에 대한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죠.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기생충들이 숨어 있으며 그 습성은 또 어찌나 다양한지 들으시면 아마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래요. 분명 그 많은 이야기들 중에 방금 보고 온 기생충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리기가 참 어렵군요. 제 짧은 기억력이 정확하다면 이 기생충은 여간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거든요. 해결 방법이야 있기는 하지만……”


  청년은 해결 방법이 있다는 말에 여자의 눈이 빛나는 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꽤 힘든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나요?”


  여자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어떤 방법이라도 좋아요. 그를 저 기생충에서 벗어나게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거예요.”


  여자는 청년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습니다.


  “부탁입니다. 그 방법을 알려주세요.”


  “그렇게 의지가 확고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저 기생충은… 아, 복잡한 학명 같은 걸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군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기생하는 숙주의 정신에 뿌리내리고 마음속 깊은 곳까지 물들이는 그런 기생충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까지 말인가요……”


  “네. 그게 바로 당신의 남편이 변한 이유입니다. 하루 종일 화분 앞에서 떠나지 않고 꽃만 바라보고 있다고 하셨죠. 그건 아마도 기생충의 희망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 마음이 숙주에게 흘러 들어가 영향을 미치게 된 거죠. 보통 이렇게까지 일체화가 되어서는 서로 분리시키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마치 원래부터 하나인 존재였던 것처럼 마음까지 이어져 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렇군요……”


  여자는 지금까지 있었던 남자의 행동 변화를 떠올리며 방금 청년에게 들은 설명을 토대로 이해해 보았습니다. 물론 그녀는 남자를 믿고 있었지만, 이렇게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설명을 들으니 처음으로 남자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청년이 말을 이었습니다.


  “해결법은 사실 간단합니다. 붙어버린 둘을 떼어주면 되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오랜 시간에 걸쳐 뿌리내린 기생충을 단시간에 떼어버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원래대로라면 기생이 진행된 시간만큼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분리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방금 제가 확인해 본 바로는 그렇게 여유로운 방법은 도저히 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은가요?”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겠네요. 이거 참, 두 분이 성도에서 조금만 더 가까운 곳에 살고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다면 이 지경까지 오기 전에 제가 발견할 수 있었을텐데요! 하지만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아직 우리에겐 쓸 수 있는 방법이 남아 있으니까요. 다만, 조금 거친 방법이라 되리라 생각합니다. 죄송스럽군요.”


  “많이 위험한 방법인가요? 혹시라도 잘못되면……”


  여자는 혹시라도 기생충을 떼어내는 과정에서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아니요, 아니요. 생명에는 아무 영향이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다만, 체력 소모가 크고 이후 회복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괜찮아요. 기생충만 떼어 낼 수 있다면, 그 후에는 제가 옆에서 잘 간호하면 되니까요.”


  “그렇군요. 마음의 준비는 이미 충분히 갖추신 것 같군요. 그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청년은 여자를 남겨둔 채 빠른 걸음으로 마을로 향했습니다. 여자가 떨리는 마음을 견디며 기다리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이 돌아왔습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약병이 들려 있었습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짐이 많다 보니 그 안에서 필요한 것을 찾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라서요.”


  “아니에요.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는걸요.”


  청년은 여자에게 손을 내밀어 약병을 건넸습니다. 투명한 약병 안에는 옅은 붉은빛이 감도는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습니다.


  “기생충과 분리시킬 수 있는 약입니다. 농도가 매우 짙으니 조심하세요. 지금부터 제가 알려드리는 방법을 꼭 기억하고 그대로 따라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분리에 실패할 수도 있는 데다가 여러 부작용이 생길 수 있으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여자는 약병을 소중히 품에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 말씀드릴게요. 일단 그 약은 아무 때나 써도 되는 약이 아닙니다. 아주 특별한 약이기 때문에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요. 그 시간은 계절에 따라 조금 다릅니다만, 지금 같은 시기라면 대략 밤 12시에서 새벽 1시 정도 되겠네요. 잘 들으셨나요? 반드시 정해진 시간까지 기다리셨다가 사용하셔야 합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남자를 기생충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가득했지만 안전하게 약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했으니까요. 청년은 말을 이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약병을 들고 기생충 가까이로 가 주세요.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면 충분합니다. 주변에 자리를 잡았으면 약병의 뚜껑을 열어주세요. 그리고 잠시 그대로 기다리시면 됩니다. 절대 성급하게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매우 강한 약이기 때문에, 담겨 있던 기운이 공기 중으로 빠져나와 어느 정도 희석되어야 하고, 또 그동안 옆에 계신 두 분이 약의 기운에 서서히 익숙해지셔야 하니까요. 중요한 단계이니 충분한 시간을 들여주세요.”


  “네, 그럴게요.”


  “네.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면 약병에서 흘러나오는 향도 점차 약해지고 색도 옅어질 겁니다. 약병을 보셨을 때, 붉은 기운이 거의 다 사라지고 물처럼 투명해졌다면 때가 된 겁니다. 약병을 들고 남편분이 앉아 계신 자리를 중심으로 이 문양을 그리시면 됩니다.”


  청년은 여자에게 작은 종이를 건넸습니다. 종이를 보자 그 안에는 큰 원 안에 삼각형 두 개가 겹쳐서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걸 그려야 한다고요?”


  “네. 맞습니다. 잘 들어주세요. 그 약은 사람이 마시거나 몸에 바르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기생충에 강하게 일체화된 상황에는 그런 약은 통하지 않으니까요. 이 약은 정확하게 이 문양대로 뿌리고 그 안에 있을 때 비로소 효과를 발휘하는 그런 종류의 약입니다. 반드시 이 문양대로 그려야만 약이 올바른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꼭 기억하세요.”


  여자는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약은 생전 처음 들어 보았지만 역시 성도의 푸른 상아탑에서 온 사람이다 보니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는 들어볼 수 없었던 여러 지식을 알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청년은 꼭 알려준 방법대로 사용해야 한다며 반복해서 주의를 주었습니다. 여자는 청년이 알려준 방법을 가슴속에 새기며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습니다.


  “의지가 강한 분이시니 잘 해내리라 믿습니다.”


  청년은 미소와 함께 이 말을 남기며 돌아갔습니다. 여자는 청년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배웅한 뒤, 희망이 담긴 약병을 소중히 품에 안고 집에 들어갔습니다.


  일을 끝마친 청년은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며 마을 밖으로 빠져나왔습니다. 작은 지붕들이 등 뒤로 멀어지고, 널찍한 숲이 눈앞에 펼쳐지자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가까이에 있던 나무에서 새들이 놀라 날아올랐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실로 오랜만이었기 때문입니다. 청년은 의지로 빛나던 여자의 눈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비록 지금은 기생충에 잠식되어 있지만, 그 안에서 손에 잡힐 듯 맑은 영혼이 보이던 남자의 모습도 떠올렸습니다. 이토록 좋은 한 쌍이 또 있을까요. 청년은 그 둘과 만나게 해 준 신에게 감사 인사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물론, 실제로 그리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정체는 신에게서 가장 축복받지 못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사악한 악마였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여자에게 건네 준 작은 혼란의 물방울이 어떤 일을 벌일지 기대하며 키득거렸습니다. 사실 그가 한 일은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악하고 끔찍한 계획을 철저히 세운 것도 아니었고, 무언가 강력한 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절박한 여자에게 작은 도움을 주었을 뿐이었습니다. 여자에게 몇 번이나 강조한 말도 그럴듯한 말을 적당히 늘어놓은 것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한 작은 장난이 만족스러웠습니다. 그 장난으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나건 간에 신이 원래 계획했던 것과는 크게 달라질 테니까요. 악마는 흡족한 마음을 그대로 발걸음에 실으며 사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그의 소리는 무척이나 요란스러웠기에 평온했던 숲은 한동안 소음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브릿G에서 연재한 단편 소설입니다.


링크 : https://britg.kr/novel-group/novel-post/?np_id=376620&novel_post_id=15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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