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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Apr 15. 2022

[짧은 동화] 여자와 기생충 03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여자는 악마에게서 받은 약병을 한시도 손에서 떼어 놓지 못한 채 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스멀스멀 기어 나오던 땅거미가 세상을 집어삼키고, 사람들이 집집마다 밝혀 놓은 희미한 등불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이 내려앉았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조용한 밤이었습니다. 마치 세상 모든 이들이 약병을 손에 쥔 그녀를 응시한 채 숨죽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시간이 된 것을 확인한 여자는 약병을 들고 남자에게 다가섰습니다. 남자는 어둠 속에서도 들꽃만 바라본 채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약병을 내려놓고 뚜껑을 열자 어둠 사이를 비집고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 빛은 얼핏 보았을 때는 눈부신 흰색이었지만 다시 보니 피처럼 짙은 붉은색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퍼져나가는 빛과 함께 약병 안에 담겨 있던 향기도 바깥으로 흘러나왔습니다.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은 독한 향기가 여자를 덮쳤습니다. 휘청거리던 그녀는 가까이에 두었던 의자에 가까스로 걸터앉았습니다. 그리고 독한 약 기운이 옅어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고삐 풀린 약은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어지러운 광경에 눈을 제대로 뜨고 있기도 힘들었습니다. 집안 가득 형형색색의 색깔들이 튀어 다녔기 때문입니다. 어지럽게 뒤섞이고 엉키는 그 색들은 마치 뒷산에 흐드러지게 핀 꽃처럼 보이기도 했고, 개울에 비쳐 일렁거리는 석양빛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여자는 자기 뺨을 때리고 허벅지를 꼬집으며 몽롱한 정신을 일깨우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종잡을 수 없는 색들은 약병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왔습니다.


  이윽고 가능한 모든 색을 뿜어낸 것 같은 약병이 점차 투명해지자 여자는 정신을 부여잡고 가까스로 일어났습니다. 비틀거리는 몸으로 약병을 낚아챈 그녀는 청년이 가르쳐 준 문양을 필사적으로 기억해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약병에 담긴 액체를 부어가며 문양을 그려나갔습니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문양을 그리는 동안 그녀의 뒤로 집 안에 떠돌던 색들이 떨어졌습니다. 떨어진 색들은 바닥에 부딪히며 튀어 올랐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무도회장에서나 들릴 법한 우아한 음악처럼 들렸습니다. 떨어지는 색들이 많아질수록 그 소리는 한데 어우러져 더 크고 웅장한 음악이 되었습니다. 아우성치는 그 소리는 약병에 담긴 마지막 한 방울을 떨어뜨리자마자 여자를 덮쳤습니다. 소용돌이치는 색과 소리의 무도회가 집 안을 가득 메웠습니다.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힘든 그 순간, 여자는 흩날리는 색깔 속에서 남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의 반짝이는 눈 안에는 여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여자는 색들을 헤집으며 손을 뻗었습니다. 흥겨운 음악이 귓가에서 울렸습니다. 손가락 끝에 투박하지만 따듯한 손이 닿았습니다. 그 손은 여자를 가볍게 끌어당겼습니다. 그였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손을 마주 잡고 그대로 끌어안았습니다. 어느새 그의 머리 위에 있던 기생충은 떨어져 나가고 자유로운 영혼이 돌아온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혼자 두어 미안하다는 말을 속삭였습니다.


  여자는 그 말에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게, 남자가 이렇게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함께 기뻐해야 할 때임을 여자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주 잡은 손을 내밀자, 다양한 색들이 와서 둘을 휘감았습니다. 집 안에서 울리는 소리가 무엇보다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손을 이끌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둘의 몸짓에서 우아한 춤이 흘러나왔습니다. 이렇게 멋진 무도회장을 그 누가 가질 수 있었을까요.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눈부신 색들이 어우러졌습니다.


  기생충은 색의 선율 사이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던 와중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에게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다만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그저 넋을 놓고 황홀경에 빠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아름다운 빛깔 사이로 들꽃이 보였습니다. 그는 들꽃과 함께 이 황홀한 체험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몸을 이리저리 굴리며 들꽃을 향해 다가가고자 했지만 소용돌이치는 색들은 쉽게 몸을 놔주지 않았습니다. 기생충은 의지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그저 떠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들꽃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 날아온 것입니다. 들꽃이 몸을 움직여 그에게 다가오는 일은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기생충은 가까이 다가온 들꽃을 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들꽃은 꽃잎으로 그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습니다. 그리고 움직이는 선율 위로 살며시 이끌었습니다.


  온통 선명한 색으로 가득한 집 안에서 넷은 그렇게 함께 소용돌이치며 떠다녔습니다. 아름다운 선율과 우아한 춤은 끊이질 않았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눈앞에서 흘러가는 색을 보며 추억에 잠겼습니다. 뛰놀던 뒷산의 풍경, 더운 여름날 뛰어들곤 했던 차가운 냇물, 술래잡기를 했던 마을 골목길, 두 손을 마주 잡고 사랑의 약속을 했던 결혼식장의 풍경까지. 색을 볼 때마다 손에 잡힐 듯 생생히 떠올랐습니다. 지난날 나누었던 다정한 속삭임이 선율을 타고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도 영원히 춤을 출 수는 없고, 그 어떤 아름다운 음악도 끝은 있는 법입니다. 휘몰아치던 색이 대단원을 향해 나아가듯 용솟음치자, 하늘과 땅이 여러 번 뒤집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맹렬한 회오리 속에서 남자는 여자의 손을 살며시 놓아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은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다정한 말을 속삭이고 있는 남자의 눈을 향해 여자는 마지막까지 힘껏 손을 뻗었지만 그 끝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라앉는 여자의 몸을 따라 기생충이 하늘하늘 내려왔습니다. 그는 작은 꽃잎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들꽃이 매달려 있던 기생충을 꽃잎 한 장과 함께 다정하게 놓아준 것입니다.


  다음 날, 밤중에 기이하게 번쩍이는 빛을 본 마을 사람들이 그녀의 집으로 찾아와 평온한 모습으로 숨을 거둔 남자를 발견했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아름다운 들꽃이 하나 올려져 있었습니다.


  여자는 그 자리에서 바로 체포되어 끌려갔습니다. 악마와의 거래라느니, 마녀의 사악한 주술이라느니 하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올곧은 심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자를 위한 마을 사람들의 증언은 효과가 있었고, 곧 악마나 마녀에 대한 혐의는 벗겨졌습니다. 하지만 남자의 죽음에 대한 모든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여자는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갇히는 형벌을 선고받고, 차디찬 감옥으로 옮겨졌습니다.


  감옥은 시린 달빛조차 외면하는 어둡고 축축한 장소였습니다. 이곳에 들어온 이를 기다리는 것은 우울증과 깊은 절망뿐이었습니다. 오직 밤하늘에 떠 있는 별만이 가끔씩 창살 사이로 변덕스러운 빛을 비춰줄 뿐이었습니다.


  감옥에서 근무하는 간수조차 이 끔찍한 장소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갇힌 감옥 주변을 순찰할 때면 그는 잠시 마음의 안정을 얻었습니다. 그곳만이 이 감옥에서 유일하게 작은 행복이 존재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남자에 관한 이야기와 어떤 꽃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목소리는 이 어둡고 축축한 곳에 어울리는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밝은 태양 아래에서 화사한 꽃이 만발한 들판을 자유롭게 거닐며 나누는 목소리 같았습니다. 감옥에 있는 모두가 그 신기한 목소리를 들으며 마치 자기 일처럼 작은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 감옥에서는 오늘도 여자가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남자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늘 그녀의 곁에 있었으니까요. 아니면 지금은 그녀가 그의 곁에 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기생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품에 소중히 안고 있는 꽃잎을 보며 지금 함께 있는 들꽃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야기는 그렇게 끊이지 않고 영원히 이어지며 감옥에 작은 따스함을 주었습니다.



브릿G에서 연재한 단편 소설입니다.


링크 : https://britg.kr/novel-group/novel-post/?np_id=376620&novel_post_id=15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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