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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Jun 19. 2022

주간 씀 모음 1

하루 종일


  “노트 좀 빌려주지 않을래?”

  언제나 그렇듯 갑작스레 나타나 당당히 요구하는 너. 나는 그런 너에게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흔쾌히 노트를 건네어 줄 뿐이었다. 그리고 네가 한나절이 다 지나가도록 그 노트를 돌려주러 오지 않았을 때에도 별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잘 쓰고 있겠지. 그게 내 생각이었다. 학교는 노트를 쓸 일이 많다. 그렇기에 너도 문득 노트를 쓰고 싶어진 거겠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네가 내 노트에 필기를 하던 낙서를 하던 혹은 이미 질려서 학교 어딘가에 버렸다고 하더라도 나는 신경 쓰지 않을 셈이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하교 직전에 네가 웃으며 돌려준 노트를 슬쩍 들여다봤을 땐 멈짓 할 수밖에 없었다. 무심히 늘어선 공백들 중에서 네 선택을 받은 네 글자가 빛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심장 소리가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장난이었다. 확실히 너답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장난. 하지만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이미 난 네 장난에 빠져있었으므로. 너는 아침에 내게 노트를 빌려서 어디로 향했을까? 네 발걸음, 시선, 지나치는 사람들. 그리고 네가 들어갈 교실, 도서관, 식당, 테라스. 모두 내가 직접 경험한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너는 복도를 거닐며, 혹은 책상이나 도서관에 앉아 노트를 펼쳤겠지. 무엇을 쓰고 싶었을까? 무엇을 남기려 노력했을까? 그러다 결국은 아무것도 쓰지 못한 노트를 내려다봤을 네 표정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너는 내 노트를 들고 하루 종일 학교를 거닐다 남기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나에게 돌려줄 단 네 글자만을 넣어온 것일 테지.

  나는 당장 펜을 꺼내 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네가 쓴 네 글자 뒤에 있는 공란에, 네가 투명한 형광펜으로 열심히 밑줄 그어놓은 그곳을 채워 넣고 싶었다. 네가 남기고 싶었던 것을 나라도 대신해서 남겨놓을 수 있도록. 아니, 사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사실은 나는 그냥 너를 향해 쓰고 싶었다. 저토록 외로운 네 글자 뒤에 나를 써 주고 싶었다. 그래도 된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잠깐의 충동이 가라앉자 조용히 짐을 챙겼다. 그리고 네가 기다리고 있을 교정으로 향했다. 아직은 괜찮다. 너는 아직 이곳에 있으니까. 저런 노트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무언가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너와 함께 교문으로 향하는 긴 교정을 가로지를 수 있는 이 나날이 끝나기 전까지는. 




비극


  소녀의 몸은 차가운 땅 위에 처참하게 널부러졌다. 악인에게만 허락되는 비극적인 말로였다. 그녀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기 몸을 내려다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럴 수 있다면 지금쯤 기쁨에 잠겨 있었을 텐데.





  내가 물수제비를 능숙하게 보여주자 그녀는 크게 웃음 지었다. 빠질 듯 빠지지 않으며 경쾌하게 물 위를 튕기는 모습이 그렇게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거 받아요.”

  그녀는 보답으로 물로 만든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주었다. 목걸이는 차갑고 축축했지만 호의를 거절하긴 싫어 그대로 두었다. 겉으로 보기엔 햇빛을 반사하는 모습이 썩 아름다웠다.

  “내일 다시 만날 때까지 빼면 안돼요.”

  “내일?”

  내일은 가게에 나가 있어야 하는 날이다. 그렇지만 조금 서두른다면 집에 들어가기 전에 들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그러겠다고 하자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리곤 기다리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물속에 뛰어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일렁이는 물보라를 잠시 바라보았다. 환하게 웃는 모습보다도 더 기억에 남을 것 같은 물보라였다. 




멈춤


  그는 매섭게 닫히는 자동문 앞에서 가까스로 멈추었다. 무기질한 문 너머에서 총성과 고함, 비명소리가 뒤엉켜 들려왔다. 그가 섬칫하며 뒤를 돌아보자 새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가 그의 한쪽 팔을 필사적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

  그는 사과했다. 사과라도 하지 않고서는 공포에 질린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조용히


  새벽은 모든 소리를 지워버렸다. 정적이 내려앉은 도로에 점멸하는 신호등 불빛만이 자리를 지켰다. 그 아래에서 선배는 조용히 서 있었다.

  “와 줘서 고마워.”

  빠르게 다가오는 트럭의 경적소리와 무자비하게 날아가는 몸. 알 수 없는 그 날의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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