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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룡 Mar 27. 2019

자기만의 방

자존감 연습

며칠 전 책을 읽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설『오만과 편견』(1813년)으로 널리 알려진 제인 오스틴이라는 작가에게 작업실이 없었다는 사실. 그녀는 하녀가 빨랫감을 들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거실이나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 창가에서『오만과 편견』의 초고를 썼다고 한다. 

당시의 영국 사회에서는 혼기가 지난 독신 여성이 소설을 창작하는 것을 지나친 일탈로 보았던 것 같다. 그나마 제인 오스틴은 아버지로부터 많은 지지와 격려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어머니의 등짝 스매싱을 피하기 위해 종이 위에 먹지를 대고 편지를 쓰는 척 하면서 다시와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그로부터 100여 년 후,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케임브리지 강연에서 제인 오스틴의 업적에 감사하며, “오늘날 여성들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이 있어야 한다.”라는 의미 있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다시 그로부터 90년이 흘렀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밤, 나는 나의 방에 들어가서 조명을 켜고, 책상에 앉아 책을 뒤적이거나 일기장을 펴본다. 소중한 공간에서 좀 고요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내 마음은 줄곧 분주하거나 온갖 잡생각들이 가득한데, 그러한 소란을 극복하지 못하는 허다한 날에 나는 결국 일기장을 덮고, 이불도 덮고, 내가 섬기는 스마트폰을 켠다. 망. 


자기만의 방이 생겼는데, 왜 나는 망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이 방을 잘 사용할 수 있을까? 


살다보면 조용한 장소에 가서도 집중이 안 될 때가 많다. 내 몸은 조용한 장소에 있지만, 내 마음은 아직 소란한 거실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 속 소란의 거실은 나의 일, 관계, 진로, 내일 스케줄로 가득 차 있는 방이다. 그 방에서 나오지 않는 한 나의 관심사는 시답잖은 투두리스트에 집중된다. 분명히 나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럴수록 내면의 밀도는 떨어지고 자기 효능감은 희미해진다. 그것은 몰입이 아니다. 자기에 골몰한 중얼거림의 끝에는 허무함이나 욕심, 불안이 남는 경우가 더 많다. 특히 삶이 불확실하고 자존감이 떨어지는 순간에는 더더욱.

그럴 때에는 차라리 운동으로 몸을 고단하게 만들거나 따뜻한 물로 정성껏 샤워를 하는 것이 더 낫다. 그도 아니면 일기장을 펴 놓고 속에 있는 생각들을 모두 활자화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쩌면 그 후에 서서히, 진정 자기만의 방이 열릴지도 모른다. 


이마에 땀이 살짝 맺힐 정도로 스쿼트를 한 후, 나는 소설을 쓰는 젊은 제인 오스틴을 떠올려본다. 응접실 창가에 앉아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 21살의 아가씨. 마당을 돌아다니는 오리들의 울음도, 하녀들의 시시콜콜하고 재미있는 수다도, “제인, 여기 와서 감자 좀 깎으렴!”이라고 소리치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그 아가씨의 몰입을 방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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