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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딩인가HR인가 Sep 16. 2019

가족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인터널브랜딩 : 브랜딩스러운 일상적 단상>


“제가 알아서 챙겨 먹을게요.”



"저녁 뭐 해줄까?"라는 어머니(장모님)의 물음에

난 대부분 위와 같이 답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답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너무 무뚝뚝해 보이지 않으면서, 차가워 보이지 않아야 하고 

그러면서도 상냥함과 따뜻함이 말투에서 묻어 나와야 한다. 


만일 너무 무 자르듯 냉정하게 단칼로 자르는듯한 답변으로 느껴지면

자칫 잘못하면 ‘저녁 하나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장모’라고 느끼시진 않을까, 

그것이 염려되어 난 늘 말투에 신경을 쓴다. 


어머니의 배려에 존중하고 감사하면서도 

거절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탓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균형감 있는 부드러운 거절이 이런 상황에서 늘 요구된다. 


그런 말투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에 익숙지 않아서 

아직까지도 어떠한 의지와 계획을 마음속에 담아야 하는 것을 보면

난 아직 프로답지 못한 사위다. 


거울을 보면서 

부족한 말투를 상냥한 표정으로 채우는 연습을 하거나

핸드폰 녹음기를 활용해 

목소리의 톤을 조금 바꾸어보면

조금 더 진정성 있게 보일 수 있으려나. 



가끔 퇴근 후 집에 와서 컵라면을 먹는다. 


MSG의 쫍쪼롬하고 칼칼한 맛과 꼬들꼬들한 면이 씹고 싶을 때도 있지만, 

최근에 내가 저녁 식사로 컵라면을 찾는 이유는

‘가족들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가족들이 사용하는 각자의 시간 사용 습관(패턴)을 나로 하여금 방해받았다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아서’다. 


합가를 하여 장모님과 함께 산지는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장모님을 장모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나는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다.

어머니 역시 나를 ‘최서방’이라고 부르지 않고

늘 이름을 불러주신다.

덕분에 우리는 여느 장모-사위 관계보다 조금 더 가깝게 지내고 있다.  


실제로 함께 쇼핑을 나가거나 외식을 할 때면 

나를 어머니의 친아들로, 

그리고 아내를 어머니의 며느리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꽤 많았다. 

그럴 때 어머니는 

굳이 부정하지 않으시고 

‘우리 아들이랑 저랑 많이 닮았지요?’하시며

빙긋이 웃으신다. 


스스로의 전문성을 가지고 오랫동안 멋진 커리어를 이어오시면서 

남편과 가족을 위해 오랫동안 헌신하신,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으로 보여주신 

어머니를 나는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런데, 

가족으로 함께 살기 위해서는 

존경과는 다른 감정과 관점이 필요했다. 



얼마 전에 ‘신상 식기세척기’를 구입했다.


내가 설거지를 한다고 해도

한사코 본인이 하시겠다며 나를 말리시는 어머님께 

늘 겸연쩍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있었고, 

식기세척기가 그런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내가 만일 식기세척기를 사용했다면

매 식사 때마다 나오는 그릇을 

싱크대 위에 물에 담가 모아놓고 

저녁에 한 번에 식기세척기에 넣어 돌렸을 것이다. 

이것이 식기세척기를 상식적으로 ‘가장 올바르게(?)’

사용하는 패턴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머니는

식기세척기를 잘 사용하지 않으셨다. 

매 끼니때마다 나오는 그릇을

평소처럼 손으로 설거지를 해 정리하곤 하셨다. 


때문에 내가 식기세척기를 사용해서 정리할 것을 가정하고

싱크대 위에 올려놓은 밥공기와 접시들이

고스란히 어느 순간 어머니의 설거지 거리가 되었다. 



주말이면

나는 아침에 일어나 

느긋하게 커피 한잔을 하고

여유롭게 책을 보고 음악을 듣다가

느지막이 ‘아점’을 하고 싶다. 


그런데 어머니는

오전 9시면 아침 식사를 준비하신다. 

부엌에서 어머니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가 들리면

계속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불편함의 정체는 실은 ‘죄책감’이다.

어머니에 비해 상대적으로 게으름을 피운 나에 대한 죄책감,

침대에 드러누워 멀뚱멀뚱 천장을 쳐다보고 눈을 껌벅거리며 

한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작 거린 지 30분이 지났지만 

침대에서 여전히 일어나지 않는 나태한 내 몸뚱아리에 대한 죄책감.  


‘아, 나도 내가 원하는 시간이 있는데, 

좀 있으면 내가 알아서  

토스트도 굽고 커피도 내려서

어머니를 깨워드릴 수 있을 텐데

왜 벌써 일어나셔서, 사람 미안하게 만드실까’ 

하는 못생긴 생각이 절로 든다.



결혼하고 세탁은 늘 나의 몫이었다.

집에서의 세탁일 이라고 해 봤자 

빨래통에 그득 쌓인 옷이나 속옷 가지들을 

세탁기에 쏟아붓고 

정량에 맞추어 

(나는 정량보다 늘 살짝 더 넣는다, 뭔가 그래야 더 옷이 깨끗해질 것 같은 느낌. 이것도 성격 탓인 듯) 

세탁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넣은 후에 

자동세탁 버튼을 누르는 것. 

그리고 세탁기가 친절하게 알람 소리로

자신의 본연의 업무를 마쳤다는 소식을 알려주면

빨래 건조대에 쭉 걸쳐놓는 것. 

그것뿐이다. 


이 일에서 약간의 패턴이 있다면

색상이 있는 세탁물과 흰색 계열의 세탁물을 분리하는 것,

그리고 어느 정도 넉넉하게 세탁물이 쌓이면 세탁기를 돌리는 것, 

일요일 저녁이 되기 전 그다음 한 주를 위해 

속옷과 양말은 넉넉하게 나오게 한다는 것. 


이러한 패턴으로 내가 생각하는 

적정한 세탁의 ‘타이밍’이 생겼다.

그런데 어머니의 타이밍은 나랑은 좀 다른 것 같다.


세탁기에서 꺼낸 빨래들을 

건조대에 널고 계시는 모습을 보면

후다닥 달려가 함께 도와드리지만, 

그럴 때마다 

왠지 모를 죄송한 마음이 자동적으로 올라오는 것을

막을 길은 없다.


이 죄송한 마음의 정체 역시 ‘죄책감’이다. 

사위로서 장모 고생시키고 있다는 죄책감. 

함께 살면서 편하게 모시지는 못할 망정

심하게 말하면 식모처럼 육아를 비롯해 온갖 집안일은 다 시켜놓고 (실제로는 시키지 않았다 할지라도) 

자기는 밖에서 돌아다니며 할 일 다 하는,

그러면서 집안일의 책임은 장모와 아내에게 던져놓는 

무책임하고 자기만 아는 남편이자 사위가 되는 것이 싫었다. 

그러면서도 

아내의 인스타그램이나 어머니의 조금 과장된 칭찬과 입소문 덕분에  

밖에서는 얼마나 스윗하고 자상하고 따뜻한 남편이자 아들 같은 사위라고 알려져 있는가. 

정말 말도 안 된다. 이 얼마나 큰 간극인가! 


순전히 내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내가 세탁일을 손에서 놓은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생각하는 세탁의 타이밍과

어머니가 생각하는 세탁의 타이밍이 다를 뿐. 

세탁에 활용하는 시간 사용의 습관과 패턴이 서로가 다른 거다. 



생각해보면

아내와도 ‘시간을 사용하는 패턴’으로 

결혼 초, 갈등이 있었던 적이 있다. 



나는 아내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침형 인간이다. 

결혼 초에 주말이 되면 아내와 아침에 운동도 하고 조조 영화도 보고 브런치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상상과 기대와는 다르게, 

아내는 주말에 초주검 상태로 정오가 넘는 시간까지 늦잠을 잤다. 

이 때문에 나는 아내에게

‘내가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주말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날아가버리는 것 같다’며

불만을 표출했고, 이것이 사소한 말다툼을 넘어 큰 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서로가 시간을 활용하는 습관이나 패턴을 서로가 

이해하고 인정하고 있어서 결혼 초와 같은 불협화음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아내가 주말에 늦잠을 자는 것이 내 입장에서 다른 방법으로 시간을 활용할 수 있어서

오히려 나쁘지 않은 ‘기회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또한 아내가 내게 가끔은 혼자 있는 시간을 허락해줘서 

기회가 있을 때에는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오기도 한다. 


여하튼 지난 시절, 

결혼 초에 우리 부부가 다투었던 대부분의 경우는

따져보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서로가 가지고 있었던 ‘시간을 사용하는 습관 차이’였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적절한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 

설거지를 하는 시간은 

식사가 끝나고 어느 정도 포만감이 지나간 이후에, 

당분간 그릇이 출몰하지 않아서 두 번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타이밍이 적절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은 

충분히 아침의 여유로움과 상쾌함을 즐기고 난 뒤에 출출함과 허전함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빨래를 돌리고 건조대에 올려놓는 적절한 시간은 

어느 날 문득 치킨이 엄청 땡기는 것처럼 내겐 어떤 느낌이고 본능이었다. 


규칙이라고 하기에는 어쩌면 질서 없고 나태해 보이지만 

내게는 정해진 시간 안에서 충분한 ‘내적 만족감’을 가져다주는 

적절한 시간들이 있다. 

각 활동들이 각기 적절하다고 할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에 진행되었을 때 

가장 큰 총체적인 만족감을 선사해주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고 싶은 자유는 

결혼 이후 출산과 육아라는 단계에 이르면 

이루지 못할 꿈처럼 여겨지고

누군가에게는 매우 이기적인 욕심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온갖 정성으로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조화롭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각자의 일터에서 치열하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람들. 

지금 나와 비슷한 30대 후반-40대 초반의 사람들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고 싶다’고 하여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자유가

전적으로 내던져진 자유임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과 가정에서의 역할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고, 

‘이 역할을 어떻게 하면 더 잘 감당할 수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이 역할을 지속적으로 잘하기 위해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는지’

안 그래도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가지각색의 일들과 함께

눈뜨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도는 고민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이런 진지한 고민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유란 것은 

우리의 역할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의 

‘시간 활용 패턴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닐까.


고맙게도 주 52시간 시대가 되면서

회사에서 유연근무제를 도입해서 

조금 유두리있는 출퇴근이 허용되고 있다. 


덕분에 어느 정도 범위 안에서는

평일에 급한 은행일도 볼 수 있고

아기 데리고 병원도 갈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시간 활용의 개인적인 패턴’을 인정해주는 것은

그동안 엄두를 내지 못했던 

확장된 행동과 실천을 가능하게 한다. 


어쩌면, 

함께 사는 가족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시간 활용에 대한 자유의 부여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각자의 자유를 가족들이 함께 이해하고 존중해주려 한다면

집 안에서도 조금 더 ‘나다워’ 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로 인해 서로가 더욱 확장된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늦은 저녁 집에 돌아와 

살금살금 컵라면을 찾는 모습을

어머니한테 들킬 때면 살짝 민망해진다. 


들키지 않게 컵라면 비닐을 벗기고

뜨거운 물을 부어 

나무젓가락을 들고 빠르게 방으로 피해야(?)했다.


프로처럼 신속하지 못한 탓에

꼭 어머니가 알아채시곤 부엌으로 냉큼 나오셔서 

‘저녁을 챙겨줄까’라고 물으시니 말이다.  

컵라면 비닐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정수기에서 나오는 신호음이 야속해지는 순간이다. 


내가 생각하는 시간 활용의 자유에 대한 생각과 맥락을

어머니께서 알아주신다면 난 당당하게 이렇게 말씀드렸으리라. 


“어머니. 저는 어머니께서 쉬시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의 충전 시간을 제가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알아서 밥 차려먹을게요. 뒷정리하는 것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혹시 조금 출출하신 거면 저와 함께 식사 같이 해요. 저는 OOO해서 먹을 생각인데 괜찮으세요?”


그리고 나선 라면에 밥을 말아먹든

한밤에 삼겹살을 구워 먹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근사한 저녁식사를 하고 

그날 잠자기 전에 식기세척기의 힘을 빌려 깔끔하게 뒷정리를 할 것이다. 

(분명, 저녁 식사 후 바로 치우진 않을 거지만) 


어머니가 내게 미안함을 느끼시는 것도

내가 어머님께 죄송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저녁식사 준비로 어머니께서 

(행여라도) 가지실 수 있는 부담감도 0으로 수렴하길 바란다. 


오직, 

서로가 그 시간을 가장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존중받고 존중해주길 원한다. 



가족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최근에 느끼는 것은

‘시간 활용에 대한 서로의 패턴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강요하거나 제약하지 않는 것 (가정 안에서의 정당한 역할이나 가치를 벗어나지 않는 한)

그 시간에 개입하거나 혹은 개입하지 않았다고 해서 부담감을 가지거나 미안해하지 않는 것. 

대신, 계속해서 서로가 시간을 활용하는 방식을 이야기하고 

서로가 ‘이렇게 해주었으면’하는 시간도 이야기 나누는 것.

가족이 조화롭게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이야기하고, 이해하고, 나누어야 한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시간, 

그리고 아내의 시간을

나는 더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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