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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딩인가HR인가 Jan 27. 2020

사람과 조직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관점을 변화시키는 방법

이윤추구에서 이웃추구로의 관점 전환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 지난 포스팅에서 조직문화 활동과 리더십 교육으로 변화가 어려운 이유를 경영을 단지 '이윤추구'의 관점으로 보기 때문임을 지적하였습니다. 조직문화 활동과 리더십 교육은 '경영의 목적을 이윤추구에서 이웃추구의 과정으로 전환하는 과정'이죠.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윤추구에서 이웃추구로의 관점 전환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그 실마리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이윤추구에서 이웃추구로 어떻게 관점을 전환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20년, 30년 이윤을 추구하며 조직 안에서 성장했고, 이것으로 조직에서 인정을 받으며 성공의 기쁨을 누린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웃추구로 눈을 바로 돌릴 수 있게 할 수 있을까요?



결국, 사람과 조직을 이해하는 궁극적인 프레임의 변화를 어떻게 가지고 올 것이냐의 문제.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부분이 HR이나 조직문화, 혹은 내부 브랜딩 담당자들이 매일같이 겪고 있는 난제들이죠. 



제가 생각하는 것은 두 가지 방향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양 극단에 존재합니다. 서로 만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이죠. 그런데 조직 안에서는 실행하기가 좀 어려운 방식입니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죠. 어쨌든 제가 생각하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먼저. 고난의 상황을 부여합니다.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전혀 해결할 수 없는 도전적인 과제를 내준다거나 기존에 해보지 않은 역할을 부여합니다. 극단적인 경우 지금의 자리를 내놓게 된다거나 잘못되면 조직에서 나가야 할 수도 있는 아주 난이도가 높은 과제를 부여합니다. 지금까지 해온 성공의 공식과 문법으로는 절대 해결될 수 없는 일, 지금까지 습관처럼 해온 자신의 방식을 고수했다가는 반드시 책임을 지게 되고 급기야 자신의 현재 지위를 위협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하게 합니다. 그 일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기질을, 성격을, 리더십을, 그리고 정의와 가정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이 방식은 마치 암에 걸린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겁니다. 내가 만일 간암 말기에 걸려 앞으로 3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부와 명예가 많다 한들 다 소용없이 느껴질 겁니다. 모래처럼 흩어지는 소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는 경험을 하게 되겠지요. 



두 번째 방식은 이와 반대입니다. 상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사랑’을 부여합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랑, 마치 신의 사랑과 같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아가페적인 사랑을 경험하게 합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사랑을 경험하면 사람은 무너집니다. 드라마나 토크쇼, 혹은 연말 시상식 같은 데서 연예인들이 간혹 ‘엄마 이야기’를 하게 되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엄마에게 영상 편지를 남기며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연예인들의 모습을 보며 주책스럽게도 TV를 보고 있는 나도 눈물을 훔칩니다.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의 마음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늘 애틋하면서 가슴 한켠이 시리죠. 엄마의 사랑은 우리가 아무리 갚으려고 해도 갚을 수 없는 빚과 같습니다. 엄마의 사랑처럼 우리가 감당하기에 벅찬 사랑은 지금 나의 모습을 무너뜨리고 다시 자신을 들여다보며 관계를 곱씹게 됩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방식은 제약과 한계가 존재합니다.


극단적인 고난 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사랑은 지금까지 본인이 걸어온 지난날의 흔적들을 돌아보게 하고 현재 내 주변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게 합니다. 낯선 경험과 상황으로 지금까지의 가정을 무너뜨리고 성찰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이 두 가지 방식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고난은 충격과 상실, 공포와 두려움으로, 사랑은 기쁨과 환희, 감사와 충만함으로 말이지요.



만일, 어떠한 제약이나 법규,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기업은 고객에게 첫 번째 방식처럼 상당한 위협이나 협박을 가해 강제적으로 구매를 유도할지 모릅니다. 이러한 방식에서 고객은 이웃이 아니라 타겟에 불과합니다. 구성원에게는 이윤 추구의 목적 달성을 위해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이 압력을 행사합니다. 이때에 구성원은 이웃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죠. 우리는 지난날 이와 비슷한 방식을 역사적으로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군부독재정권 시절에 말이죠.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의 관계는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사랑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이가 놀다가 그릇을 깨뜨려도, 조금 전에 정리해 놓은 거실을 마구 어질러놓아도 자녀에게 사랑을 주는 부모는 아이를 다그치거나 쉽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아이의 놀이에 동참해주고, 함께 웃어주며, 다시 자리를 정리하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다시 그릇을 깨고, 거실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습니다. 하지만 부모는 개의치 않습니다.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같은 상황에서 같은 선택을 되풀이합니다. 사랑이 많은 부모에게 중요한 것은 깨끗한 공간보다는 아이가 다치지 않는 것이니까요. 기업이 이러한 부모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습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정해진 자원 안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성이 높은 최적의 의사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객의 니즈와 비즈니스 상황은 하루 아침이 다르게 계속해서 변화하고 진화합니다. 그에 따라 빠르게 발맞추어 움직여주어야 하는데 내부 구성원이 따라와 주기를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두 번째 방식도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고, 인내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방식 모두 빠르게 장면을 전환하고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양 끝단의 방식입니다. 두 가지 방식을 활용하면 원하던 변화를 가지고 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변화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답을 ‘사랑’에서 찾습니다. 위에서 말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아가페적인 사랑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만한 정도의 사랑입니다. 세계적인 영성 심리학자 이자 정신과 의사인 스캇펙(M.Scott Peck)은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 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신을 확장시켜 나가려는 의지



스캇펙에 따르면 사랑은 의지의 행동이며, 의도와 행동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즉 사랑은 느낌이나 감정, 욕망이 아니라 ‘선택’을 내포하는 의지라는 겁니다. ‘사랑에 빠진다’는 감정은 자신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붕괴시키는 것이니 이것은 참사랑이 아니고, 진정한 사랑은 서로를 성장시키며 확장을 가져온다고 이야기합니다. 



스캇펙은 사랑과 의존성을 구분합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보살펴준다는 확신이 없으면 완전함을 경험할 수 없는 상태인 ‘의존성’과는 달리 사랑은 서로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지만 함께 살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의존성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지만, 사랑은 ‘독립심’을 길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독립심을 기르기 위해 ‘분별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은 단순히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분별 있게’ 주고, 마찬가지로 분별 있게 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분별 있게 칭찬하고, 분별 있게 비판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과 더불어 분별 있게 논쟁하고, 싸우고, 맞서고, 몰아 대고, 밀고 당기는 것이다. 그것은 리더십이다. 분별 있다는 것은 판단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며, 판단은 본능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심사숙고해야 하며 때로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필요로 한다.




이전 포스팅에서 애자일과 수평적인 조직문화가 지향하는 것이 ‘구성원들을 주체적인 의사결정자가 되도록 돕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체성의 필요조건은 독립심입니다. 독립적으로 고민하고 추진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많은 경험과 전문성이 축적되었을 때에 비로소 주체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은 의존적 존재에서 독립적 존재로 성장시키는 과정입니다. 독립적 존재로 성장시키기 위해 부모에게 현명한 ‘분별’이 필요합니다. 무조건 다해 주지 않고 지켜볼 때도 있고, 필요한 시기를 기다리죠. 의도적으로 실패의 경험을 겪어보게도 합니다. 그 시간들이 아이를 더욱 성장시키고 독립적 존재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말이죠. 이렇게 부모가 가지는 분별의 믿음이 곧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그 사랑에 관여한 사람들의 온전함과 현실을 둘 다 보존하는 유일한 형태의 관계이다 – 에리히프롬



조직 안에서도 구성원들을 독립적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분별 있게’ 주고 ‘분별 있게’ 주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분별력’을 기르는 것과 함께 분별의 가늠이 되는 척도와 기준이 중요해집니다. 사회와 가정에서의 상황은 차치하고, 우리가 일하고 있는 조직 안에서 분별하기 위한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조직 안에서 우리가 현명하게 분별력을 발휘하기 위한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 같이 한번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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