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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딩인가HR인가 Feb 10. 2020

조직은 공동체가 될 수 있는가

영화 <기생충>으로 살펴보는 온전한 개인과 조직의 모습 

앞으로의 조직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집단을 이루는 차원을 넘어 특정한 가치를 중심으로 구성원들 사이에 깊은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공동체로 진화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조직은 지금까지 그렇게 발전해왔습니다. 프레데릭 라루가 이야기한 대로 리더의 막강한 권위가 중요시되는 조직에서 구성원들의 온전성이 중요시되는 조직으로 말이지요.  



# 참고 : 프레데릭 라루, 조직의 진화에 대하여 



‘조직이 공동체로 진화될 것이다’라는 이야기에 어떤 분들은 ‘과연 그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공동체는 기업 조직보다는 종교단체나 가족 범주안에서나 가능한 이야기 아닌가?’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업 조직은 진정한 공동체가 되기 어렵다’라는 생각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요?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집단이라는 그동안 숱하게 듣고 당연하게 여겨왔던 가정 때문일까요? 본연의 역할과 의무를 배신하고 결국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기심 때문일까요? 아니면 급변하는 환경에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수 있는 철학과 가치의 부재 때문일까요? 



이 모든 것이 진정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이지만 한 가지 원인만 꼽자면 저는 인간의 ‘분리된 상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 에리히 프롬의 이야기에 함께 귀를 기울여보시죠. 



분리는 정녕 모든 불안의 원천이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인간적 힘을 사용할 능력을 상실한 채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무력하다는 것, 세계를 적극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나의 반응 능력 이상으로 세계가 나를 침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분리는 격렬한 불안의 원천이다.




아카데미 시상식 4관왕의 주인공인 자랑스러운 한국 영화 ‘기생충’은 우리 사회의 분리된 모습을 그립니다. 


부자는 눈부신 햇살이 비추고 넓은 정원이 있는 공간에, 빈자는 하루에 잠깐 동안 겨우 한 움큼의 햇살이 비치는 반지하 공간에 거주하며 서로 완벽하게 분리되어있죠. 영화의 관객들은 거주의 분리뿐만 아니라 폭우로 인해 참담하게 물이 차오른 지하방과 폭우에도 끄떡없는 부잣집 아이의 인디언 텐트를 보며 소유의 분리를,  ‘반지하 냄새’가 ‘지하철에서 나는 냄새’로 불려지는 장면에서는 사회 계급의 분리를 느꼈을 겁니다. 영화는 둘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선을 보여줍니다. (물론 반지하 밑의 지하를 들추며 또 다른 경계를 보여주기도 하죠) 



미국의 교육지도자 파커 J. 파머(Parker J. Parmer)는 온전함을 '완전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짐을 삶의 불가피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분리된 삶은 자신이 드러나지 않도록 감추는 행위를 일삼으며 조직 안에 기생하고 있는 삶임을 지적했습니다. 영혼과 역할이 분리되어 맡은 일에 온 힘을 다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며 진실을 숨긴 채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모습이죠. 영화 기생충에서 그리고 있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흡사 이와 비슷하지 않나요? 거주와 계급의 분리는 차치하더라도, 가장 큰 문제는 ‘존재의 분리’입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서 서로 다르게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 각자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겁니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이 잘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일부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죠. 누군가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아를 분리시키게 됩니다. 영화에서 친구로부터 과외 자리를 부탁받은 사수생은 명문대생이 되었고, 그의 여동생은 유학파 엘리트가 되었으며, 그의 부모는 각각 젠틀하고 교양 있는 기사와 가정부가 되었죠. 그렇게 자신을 버리고 타인이 된 그들은 서서히 불안에 빠집니다. 영화에서는 남의 집에서 뻔뻔하게 파티까지 벌이는 주인공 가족들이 어떤 사건으로 진실을 마주하면서 점차 불안과 위기에 빠지게 되죠. 이와 같이 분리된 삶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삶입니다. 타인에게 종속되어 자신을 잃어버린 분리된 삶의 상태에서는 늘 불안이 함께합니다. 그 불안은 진짜 자신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죠. 분리 상태가 심각해지면 타인이나 사회가 나를 수용해줄 수 있을지와 같은 염려의 차원을 넘어 본인 스스로도 자기 자신을 수용하기 어려운 지경이 됩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분리된 상태로 살아가게 된 원인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갖는 ‘평등’의 의미에서 찾기도 합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등의 의미는 달라졌다. 이 사회에서 평등이라는 말은 자동인형의 평등, 개성을 상실한 인간들의 평등을 말한다. 오늘날 평등은 일체성보다는 오히려 동일성을 의미한다.
…(중략)
모두 동일한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각기 자신의 욕망에 따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현대의 대량 생산이 상품의 규격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사회적 과정은 인간의 표준화를 요구하고 이러한 표준화를 ‘평등’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치 중 하나인 평등이 인간의 자기다움을 상실시킴으로써 분리된 개인과 사회를 생산해냈다는 것이죠. 모든 사람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행동을 하는 인간의 표준화는 어쩌면 평등의 횡포이자 잔행의 부산물일지도 모릅니다.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우리는 순응주의자가 되었지만 스스로 의지를 가진 개인이라는 착각 속에서 삽니다. 




만일 ‘기업 조직은 공동체가 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지금까지 겪어온 조직 안에서는 역할에 따라 나를 분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 아닐까요? 타인이 요구하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기다움을 드러내기보다 버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혹은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동일한 사고와 행동을 요구받고 그것이 나의 의지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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