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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딩인가HR인가 Jun 14. 2020

당위의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

나의 예민한 성격에 대한 퍽 반가운 근거

종종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불편해질 때가 있다.

때로는 가족들과의 대화 가운데에서도 쉽게 웃으며 넘기지 못하고 신발 안에 작은 모래알이 들어간 것처럼 신경 쓰이고, 나도 모르게 그 말을 계속해서 곱씹으며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상황이 되면 겉으로 보이는 나의 반응이나 태도가 상대방이 생각한 것보다 민감하거나 과하게 보일까 싶어 스스로 마음을 토닥이며 억누르곤 한다. 



그런 영역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니지만 나에겐 스스로 예민하다 싶을 정도로 불편하게 느껴지고, 고집스러워지는 영역. 그러다 때로는 화가 솟고, 폭발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되는 상황. 누군가에게는 사소하지만, 나에겐 사소하지 않은 그 경계선.  


'이 지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마음과 고민을 가지게 된 이후부터 위와 같은 질문을 가지고 왔던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에 한 에세이 책을 통해서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내 마음이 조금 더 예민하게 작동되는 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유독 내가 견디기 힘들어하는 유형이 어떤 사람인지,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듯한데, 내가 상대적으로 민감하게 느끼고 싫어하는 성격이나 습관의 소유자에 대해 생각해봤다. 바로 답이 나왔다. 바로 '당위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일을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프레임으로 본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어떤 시위 장면을 보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자연스러운 반응은 이렇다. 일단 무엇 때문에 시위를 하는지부터 알아보고, 시위 목적에 동의나 반대를 한다. 반대를 하더라도 '아, 저기서 저런 시위가 있는데 나로서는 시위 목적이나 방식이나 모두 동의할 수 없군'에서 그치면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싹 무시하고 밑도 끝도 없이 냉혹한 재판관의 얼굴이 되어 이렇게 외친다. 

"저것들은 모두 감옥에 처넣어야 해!"
<오로지 나를 위해서만 / 김경민>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그리고 직접 대면하지는 않지만 온라인 SNS 상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뱉어내는 이야기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내가 불편함을 느끼고 때로는 무척 피로해지며 심지어 말을 한 당사자에 대해 한심하고 안타깝다고 판단하게 되는 상황은 '당위의 세계'에 살아가며 자신들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는 태도를 마주칠 때이다. 




당위의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폭력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맥락이나 이유, 근거는 따져보지 않은 채 그저 눈에 보이는 현상을 자신만의 잣대로 판단하고 정죄한다. 이미 특정한 사건과 그에 얽혀있는 사람들에 대해 스스로 결론을 내린 그에게 양보와 희생은 커녕, 재고(再考)의 여지도 남아있지 않다. 그의 빈약한 사고는 스스로에게는 완벽한 논리로 허용이 되어 그 논리에 반기를 드는 사람을 되려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어리석은 자나 쑥맥으로 치부한다. 





저자는 문학 작품을 읽는 이유를 '당위의 세계가 갖는 빈약함과 폭력성'에서 그 어떤 것보다 자유롭다고 여기기에 읽는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교육이나 조직문화 업무도 이러한 맥락과 일치한다. 


조직 안에는 분명 당위의 세계가 존재하고,  그 당위의 세계로 인해 조직 뿐만 아니라 조직 안에 존재하는 개인에게 왜곡된 모습이 발견되기도 한다. 많은 경우, 왜곡된 모습의 당위성은 매우 불충분하고 근거도 빈약하다. 하지만 모든 당위의 세계가 그러하듯 당위의 세계 안에 존재하는 구성원들은 실제로 자신이 당위의 세계 안에 거하고 있는지 조차 깨닫지 못하고, 당위의 세계가 조직 안에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생각보다 얼마나 폭력적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조직의 문화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당위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빈약함과 폭력성을 제거해 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그동안 조직 안에서 당연히 여겨졌던 관습을 의심하고 그 관습이 만들어진 배경을 살피며, 불필요한 관습은 없애거나 새로운 관습으로 전환시킨다.  

당위의 세계에서 타인을 향한 다소 날카롭고 폭력적인 태도와 감정은 새로운 세계에서는 스스로를 향한 예민함으로 그 방향이 바뀌어 내 자신이 혹시 당위의 세계에 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해서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좋은 문학 작품일수록 당위가 아닌 현상을 꼼꼼하고 성실하게 들여다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상 너머 혹은 현상의 이면까지 통찰해낸다. 그리고 그 통찰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당위의 세계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어떤 진실과 만나게 된다. 
<오로지 나를 위해서만 / 김경민>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저자의 이야기에 큰 공감이 되었고, 퍽 반가웠으며,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나의 다소 예민한 성격이 실은 당위의 세계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건강한(?)의심병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저자의 말대로, 당위의 세계에서 절대 볼 수 없는 진실- 

그 진실을 만나기 위해.


오늘도 한번 생각하고.

오늘도 한번 끄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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