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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기록 Dec 31. 2020

무단 퇴사 전말서

죄송합니다


무단퇴사 어디까지 해봤니?



친구와 카톡으로 

국민연금 몇 년 넣었냐며 얘기했다.

친구는 성인 인생 20년 중

10년을 비서 인생으로 살고 있다.

나랑 만나면

모시는 대표님 칭찬을 그리 한다.

친구는 외국항공 승무원 N년 하느라

국민연금 납입기간이

10년이 안 된다며

너무 놀고먹은 인생 같다며

하루빨리 백수가 되고 싶어 했다.


국민연금 내역을 쭉 보더니

2달 다닌 잡지사도 있었다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난 3일 다닌 회사도 있더라

속으로 웃어야 했다. 


국민연금,

한 사람의 삶의 궤적이 그대로 남는다.

한 사람의 성인 인생을 보려면

국민연금 납입내역을 보면 된다.


나는 12년 직장생활 중에

잘려도 봤고 무단 퇴사도 해봤다.

2달 일하고 무단 퇴사했을 때

변호사 동생을 둔 사장님은

롸잇나우 회사로 복귀하지 않으면

손해배상 소송을 건다고 문자로 압박했다.



문자를 받은 그날 

당시 백수였던 남편과 함께

판교 계절밥상에 밥을 먹으러 갔다.

밥만으로 힐링이 되지 않아

추가 힐링하러 남양주 두물머리까지 갔다 왔다.


남편은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다 하고

나는 집에서 애 키우는 게 너무 힘들어서

서로 역할을 바꿔서 해보자고 했다.

'일 그만 두고 집에서 애 봐.

내가 나가서 돈 벌어 올게.'

남편에게 호언장담하고 

내가 일을 하러 가게 된거다. 

치열한 삶의 전선에 나가보니

집에서 애 키우는 게 쉽다는 걸 알았다.

적어도 누구 눈치를 보진 않잖아.


직장에 들어가서

'이거 내 능력 밖이다'

생각 들면 후딱 그만두는 것도

나와 회사를 위하는 일이다.


입사 다음날 명함 만들 때

3일 후 회식할 때

내 명함을 동봉해서

거래처에 팸플릿을 돌릴 때도


이게 아닌 데...

이게 아닌 데...


내적 갈등을 겪다가

2달 후 용기 내어

사장님께 그만두겠다고 말했더니

새 직원 뽑고

인수인계만 해주고 나가라고 했다.

아는 것도 없는데 인수인계라니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내 능력 밖의 일이라

때려죽여도 못할 거 같았다.


나는 생산라인과 맞물린

스케줄 관리가 너무 어려웠다.

전임자는 일주일 주문 스케줄이

머릿속에 다 저장이 되어 있어서

백신 개발자보다 대단해 보였다.


나중에는 나에게 그토록

다정다감 했던 생산라인 수장이

이건 초등학생도 하겠다며

대놓고 무시를 했고 싸늘하게 대했다.

심한 자멸감에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꺼떡 하면 고장 나는 프린터에

라벨 만들고 뽑는 것도

부차적인 스트레스였다.


얼굴은 죽상 되고

목소리는 생기를 잃고

한 번은 일부로 목소리에 힘을 실었더니

거래처 사장님이

'오늘은 목소리가 좋네요'

속도 모르는 소리를 했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라고요.


거래처 담당자 중에

연예인같이 잘생긴 훈남이 있었다.

내 12년 직장생활 통틀어

제일 잘생긴 남자였다.

피부가 예술이었지.

걔가 오다를 넣으면

나는 오다를 받는 입장이라

내가 그 훈남을 독차지했지만

감당할 수 없는 업무에

그 훈남과 업무상 통화를 해도

그 훈남이 회사를 방문해도

기쁘지 않았다.


오더를 변경하는 전화가 올 때마다

왜 이러시냐고

이러면 나 너무 힘들다고

그러면 훈남은

라벨 뽑는 거 너무 힘들다며...

서로 전화로 신세한탄을 했다.


그 훈남이 회사에 방문하면

다른 여직원들은

냉장고에 아껴둔 커피음료까지 대령했다.

이 업계에서 저만한 인물 보기 쉽지 않다며

그 훈남이 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 훈남 얘기로 사무실은

후끈 달아올랐다. 


훈남아, 미안하다

너 카톡 사진 다 돌려봤다.

그 총각이 훈남이기도 했지만

말씨도 얼굴처럼 쏘 스위트 했다.


너무 끔찍하지만

만약 괴물 같은 적응력으로

지금도 그 회사를 다니고 있다면

겨우 세후 200을 받으면서

길고 긴 라벨을 뽑고 있겠지.

벌써 7년 전 일이 되었다.


명함에 내 네이버 이메일을 넣는 바람에

주문 메일이 그쪽으로 와서

어떡해야 하나... 하다가

최악의 결정을 해버렸다.


그때 10개월 정도 된

아가 블로그가 있었는데

무사히 백업을 받아놓고

사장님께 죄송하다는

이메일을 한 통 보내고

당시 10년 넘게 사용하던

네이버 계정을 폭파시켰다.



안 읽어도 되는 TMI


한 거래처 사장님이

업무시간 이후에도

카톡으로 주문을 넣었다.

나는 1달짜리 신입인데도


사장님,
카톡으로 주문 넣지 마세요.
카톡 확인 안 합니다.
이메일로 다시 주문 넣어주세요.

정중히 부탁드렸더니

갑질 안 하시고 그 후

이메일로 잘 넣어주셨다.


삼성동 아줌마는 사장 마인드라

아무리 업무시간 이후라도

카톡 답변 하나 하는 게 뭐가 어렵냐고

요즘 애들은 너무 이기적이라며

누가 이기적인지는 모르겠지만.


파란만장한

권고 퇴사와 무단 퇴사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 같다.


인생은 웃기게도

소송 건다는 사장님은

내가 사는 아파트 옆 단지에

나란히 살고 있고

나는 지금 더 잘 풀렸다.


우연히라도 만나면

웃으며 인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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