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 코로나와 이별할 수 있을까
사무치게 그리운 코로나 이전의 삶
외출하기 전 마스크를 챙기는 게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거리를 다니다 마스크를 쓰고 엄마 손 붙잡고 지나가는 아이들을 볼 때 가슴속에서 울컥 눈물이 솟아날 때가 있다. 어쩌다 아이들이 이렇게 답답하고 힘겨운 하루를 살게 된 걸까. 마음껏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에게서 웃음을 빼앗아버린 코로나가 원망스럽고,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다는 것에 절망감을 감출 수가 없다. 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 물음에 'yes'라고 당당히 답할 수 있는 시점이 오기는 하는 걸까.
참 끈질기고도 지독한 코로나는 우리 모두의 삶을 비집고 들어와 평화로웠던 일상들을 무참히, 거세게 흔들어 놓았다. 짓밟는 수준을 넘어 사정없이 뭉개버리고 비틀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가만히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전례 없는 마스크 대란 속에서 어떻게든 마스크를 확보해야 했고, 마음대로 외출할 수 없게 되었다. 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설마 했던,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보란 듯이 현실이 되는 순간 막연한 불안감이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로 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코로나는 육아에도 참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도서관이 폐쇄됨에 따라, 아이와 도서관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함께 책을 읽는 여유를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다. '2미터 사회적 거리두기'는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마음도 멀어지게 만들었다. 아이는 더 이상 친구와 만나 악수를 할 수도, 안아줄 수도 없었다. 아이 친구 엄마에게 함께 만나자고 연락하는 것조차 민폐가 될 것이 분명하여 망설이다 그만두게 되었다. 그나마 몇몇 엄마들과 소통하며 그동안 외로웠던 육아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었는데, 또다시 아이와 집에만 있게 되면서 짙은 고립감과 우울감이 밀려왔다.
마스크를 쓰자마자 벗어던지는 아이 때문에 사람들 많은 놀이터는 갈 수도 없었다. 가끔이라도 놀이터를 찾을 때면, 마스크 안 한 우리 아이를 보며 자리를 슬슬 피하는 엄마들의 따가운 시선이 견디기가 힘들었다(물론 그들을 이해한다). 집이 답답해서 외출이 너무 하고 싶을 때는 밀폐된 공간 말고 인적이 드문 숲길이나 산책로에 잠깐 들러 바람만 쐬고 들어오곤 했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수도권 중심으로 다시 확진자가 증가한다는 소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잠시 주춤했던 탓에 경계심이 살짝 풀렸었는데, 곧 끝나리라는 희망을 잠시나마 가졌었는데 또다시 시작이라니. 여태까지 살면서 이런 고통이 있었는가. 내 삶 곳곳에 침투하는 제약과 금지 조항들 속에서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내가 너무도 비참하고 답답하다. 아이에게 평범한 일상을 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언제쯤 우리는 코로나와 이별할 수 있을까. "여보, 요즘 삶이 진짜 영화 같아. 우리 어쩌다 이렇게 됐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지?" 물었을 때 조용히 듣던 남편이 말했다. "힘들고 절망적이지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하는 것, 그게 답이야." 교과서 같은 얘기지만,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안다. 납득이 안 가는 상황 속에서 나조차 쓰러져버리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임을 알고 있기에,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해 나가보려고 한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람이 밀집되어 있는 집합 장소에 가는 것을 자제하고, 소독과 방역을 철저히 하며, 무엇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흔들리는 멘털을 잘 부여잡아야겠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이 어두운 터널에서 그래도 언젠간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내가 매일 하는 작은 행동들이 코로나 극복을 앞당기는 데 보탬이 된다는 믿음을 가져본다. '이런 때가 있었지. 그래도 우리 잘 견뎠어.'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