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유미 Aug 22. 2020

나도 우울증일까?

육아 그리고 우울

   마음이 가라앉을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다양한 감정이 존재하듯이, 우울도 기쁨이나 슬픔처럼 내 안에 있는 여러 감정들 중의 하나라고 여겼다. 혜민스님의 책에서도 우울은 내 마음에 잠시 떠 있는 구름 같은 거라고 했다. 고요히 응시하면 곧 지나가는. 그러나 육아를 하면서 겪는 우울은 그동안 내가 느껴왔던 것과는 가히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우울의 깊이나 정도가 그전에 내가 경험해 본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했다. 단순한 짜증이나 슬픔이 아니라 화병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명치가 답답해져 올 때도 많고, 내 삶과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 때는 우울의 늪에서 오래도록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왜 육아로 인한 우울증이 이리도 무섭다고 했는지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이해가 되었다.


   내가 우울증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란 지극히 단순한 사실 몇 가지에 불과한데, 세로토닌이라는 물질이 적게 생성되면 생길 수 있고 우울감이 2주 이상 지속되면 검사를 받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 정도이다. 나는 2주가 아니라 출산 이후 줄곧 우울했던 것 같은데 그럼 만성 우울증인가 싶다가도, 맛있는 걸 먹거나 잠을 푹 자서 컨디션이 회복이 되면 기분이 많이 나아지는 편이니 우울증까지는 또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좋아진 기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곤두박질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지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이를 키우며 아이에게서 느끼는 행복이 굉장히 크지만, 육아 과정에서 느끼는 우울은 그것과 별개라는 점이다. 아이가 주는 사랑과 행복이 나의 우울을 상쇄시켜 주지는 못했다. '아이가 너무 예쁘니까 그것으로 나의 육아는 좀 더 달콤해질 거야, 모든 걸 견딜 수 있을 거야' 하는 생각은 완전히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육아를 하다 어떤 경우에 내가 우울감을 자주 호소하는지 생각해보면, 아이가 사정없이 울 때 특히 그렇다. 만 21개월이 지난 우리 아이는 아직 말을 못 한다. 욕구는 점점 많아지는데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 떼를 쓰거나 우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려고 한다. 그것은 아이로서는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일 테고, 나도 어렸을 때 엄청난 울보였을 거다. 그럼에도 나는 아이의 울음을 매번 견디기가 힘들다. 자주 반복되는 상황임에도 좀처럼 익숙해지거나 무뎌지지가 않는다. 아이가 또 울까 봐 미리 겁부터 나는 날이 많아졌다. 엄마가 아이의 울음을 못 견뎌한다는 것, 그것은 교사가 학생을 싫어한다든가 주방장이 요리를 싫어한다는 것과 비슷하게 여겨졌다. 육아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내가 받아들여야 할 몫인데 그것이 이토록 어려운 것을 보면 '나는 엄마 자격이 없나 봐'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우울감에 좌절감까지 더해지고 만다.


   우는 아이를 상대하고 나서 녹초가 되는 나에게 남들이 해 주는 말들은 불행하게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애가 안 울면 이상한 거 아니야? 다들 그렇게 키우는 거야.', '조금만 더 견뎌. 금방 지나간다' 따위의 말들. 나를 위해 해 주는 이야기들이겠으나 아무것도 내 마음을 건드려 주지는 못했다. 또다시 다가온 우울 속에서 발버둥 치기보다는 그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그게 나에게는 최선이다. 오늘 아이는 오후 세 시가 넘도록 낮잠을 자지 않고 오래도록 떼를 썼다. 이것은 즉 오전부터 오후까지 나의 휴식시간이 단 1분도 없었음을 의미한다. 겨우 낮잠에 들도록 한 후, 나는 노트북을 켜서 글을 쓰고 있다. 글이 지금 어떻게 써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가는 대로, 벽에 대고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사람처럼 그렇게 나는 글을 쓰고 있다. 글이라도 쓰지 않으면 내 짜증과 우울과 화가 부정적인 방법으로 분출될까 봐 걱정이 되었고, 글을 쓴다고 해서 엄청나게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글을 쓰고 나면 조금이나마 편안한 상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여전히 앞으로도 줄기차게 울어댈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우는 횟수만큼 나는 또 우울에 빠져들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갈 거고 아이는 조금씩 성장해 갈 거고 그러다 보면 나도 지금의 힘듦을 극복할 수 있는 나름의 요령 정도는 생기지 않을까 한다. 아이가 울 때 다독이며 아이의 마음을 읽어준다든가,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으로 관심을 이동시켜 본다든가, 아이가 많이 운 날은 고된 육아에 대한 보상으로 맛있는 닭발을 야식으로 먹는다든가. 아이가 아무리 울어도 말을 하기 시작하면 덜 울게 될 거고, 그때 되면 울지 않고도 다른 방법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테니까 일말의 희망을 가져본다. 누군가 말했다. 육아에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다고. 그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인지 이제 알겠다. 육아에 끝은 없겠지만, 울음에는 끝이 있을 것이다. 울고 떼쓰고 난리 치는 이 시기가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부디 그 끝이 어서 오기를 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언제쯤 코로나와 이별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