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에서 지낸 지 삼일 째다. 이곳에 오면 엄마 덕분에 나는 육아는 잠시 내려놓고 오롯이 '나'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언젠가부터 친정집에 오면 매일 아침 일찍 아빠와 집 근처 뒷산에 가는 습관이 생겼다. 아빠와 단둘이 산길을 걸으며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도 나누고 숲 속의 공기도 마음껏 마시고 온다. 내게는 호강이다.
오늘도 아침 식사 마치기가 무섭게 일찍부터 집을 나섰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기분 좋은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귀를 행복하게 한다. 아빠와의 산행은 육아에 지쳐 운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엄마가 어느 날 제안한 것이었는데, 처음엔 아무 느낌 없이 그냥 따라나섰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꽤 괜찮은 일인 것 같다. 결혼하고 아이 키우는 딸이 아빠와 오붓하게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있는 게 아니니까.
산에 와 본 지가 언제인지 문득 떠올려본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걸 보니 꽤 오래되었나 보다. 평소 산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남편과의 만남 이후로 난 산을 좋아하게 되었다. 남편과 두 번째로 데이트를 하던 날 산에 함께 올랐는데 그 날의 감정이 너무 좋아서 산은 내게 따뜻함을 주는 곳으로 기억되어 있다. 오늘 오른 산에서 만난 적절한 바람과 온도와 풍경은나에게 산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선사해 주었다. 코로나 때문에 외출도 어렵고 사람들 만나기도 힘든 시국인데 '산속에서 딱 한 달만 살아도 좋겠다'는 얘기도 아빠와 나누었다. 내가 산에서 살 리 없겠지마는 그만큼 나는 그곳에서 평온함을 느꼈다.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그대로의 내 모습대로 있을 수 있는 곳, 산은 '쉼'이었다.
우리가 늘 가는 코스 중의 정점은 소나무 숲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두 개의 나무 의자. 갈 때마다 30분 정도 그곳에 누워 쉬다 내려온다. 눈을 뜨면 하늘과 구름과 소나무가 보이고, 눈감고 가만히 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느껴진다. 그러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산이 내게 주는 것을 그대로 온 마음으로 느껴보는 것이다. 이 산을 계속 찾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빠는 내가 원하는 만큼 쉴 수 있게 조용히 옆에서 자리를 지켜 주셨다.
며칠 후 친정을 떠나게 되면 한동안은 산에 오르지 못하겠지만, 산행에서 얻은 엔도르핀으로 얼마간은 거뜬히 육아를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약발(?)이 떨어질 때쯤 다시 이 산에 올라볼 거다. 산이 지금 모습처럼 그 자리에 오래도록 남아 있어 주면 좋겠다. 그리고 아빠도 건강하게 오랫동안 함께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다. 내일도 어김없이 산에 갈 것이다. 아침에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고 자야겠다.